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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검은 넥타이

면도히 2014. 9. 13. 21:33

2014.07.14





검은 넥타이에 묶인 당신. 이제 곧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이상한 광고 문구였다. 게다가 같이 실린 사진은 얼굴을 뚝 잘라놓고 목만 드러내 검은색 넥타이를 묶어놓았다. 사실 넥타이보다는 그저 까만 끈 같았다. 이 포스터가 무슨 내용을 담고자 하는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던 발까지 멈추게 하는 걸보니 홍보효과는 확실했다. 하지만 보는 즉시 눈썹 사이가 절로 구겨졌다.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종인은 그렇지 않아도 친구가 멋대로 잡은 약속 덕에 냉랭하던 참이었다. 연극을 챙겨보는 고상한 취미는 없다. 오랜만에 생긴 여유시간을 낮잠으로 보내려했던 계획이 와장창 무너졌다. 연극표가 생겼으니 당장 준비해서 나오라는 말은 신음으로 대꾸했으나 저녁밥까지 책임진다니 도무지 이기지 못했다. 대충 준비를 끝내고 터덜터덜 걸어가던 차에 마침 보행신호가 걸렸다. 우연치 않게 돌린 고갯짓이 전봇대를 시야에 담았다. 그리고 보았다. 곧 초록불이 떴음에도 자리에 우뚝 섰다. 야릇한 느낌이 풍기는 포스터만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동네에는 연극 거리라고 불릴 만큼 많은 극이 열리고 그만큼 홍보지 또한 많이 붙어있다. 이것 또한 다른 것들과 다를 바 없을 텐데 어쩐 일인지 쉽사리 발길을 돌리기 어려웠다. 종이 어디에도 극장 위치, 극 시간 따위는 적혀있지 않았다. 검은 넥타이에 묶인 당신. 이제 곧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딱 그 말만 쓰여 있다. 이제는 팔짱까지 끼고 유심히 들여다본다. 눈을 가늘게 뜨고 포스터 구석구석을 노려보던 종인은 어느 순간 마침내 딱 그쳤다. 너무 작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저 아래에 적힌 다른 글을 발견했다.
극본 박찬열. 콘셉트인지 아니면 꾸미는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모두 고딕체였다. 때문에 오히려 눈길을 사로잡았는지도 모른다. 한참 그러고 서서 있다가 울리는 전화 진동에 정신을 차렸다. 다섯 번째로 바뀐 초록 불 위를 드디어 건넜다.




연극은 기대 이상이었다. 팸플릿 앞에 떡하니 쓴 슬랩스틱 코미디라는 설명을 보고 난 이런거 취향 아닌데, 라고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종인은 보는 내내 깔깔 웃어댔다. 어찌나 재밌게 봤는지 아무거나 하나만 더 보고 가자고 스스로 조를 정도였다. 그의 친구는 잠시간 눈을 흘겨보았으나 이내 종인 손에 질질 끌려갔다.
워낙 극장이 많다보니 무엇을 봐야할지 몰라 한참을 돌아다녔다. 시간이 많이 지나 이미 날은 저물었다. 그래도 이왕 또 보는 거 확실히 재미를 뽑아야한다고 종인이 고집했다. 돌고 돌아 사람들 발길이 적은 한 골목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등불도 간간이 놓여 주변이 어두웠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걸어 나갔다. 이런 곳에 있는 게 더 재미있을 거라며 친구를 달래기까지 한다. 그리고 보았다. 유난히 어두워 보이는 건물 앞에 포스터를 잔뜩 든 남자가 있었다. 우리 저거 보자. 금세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넓혔다.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종이가 눈에 걸렸다. 무엇보다도 선명한 고딕체가 박혀져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확신이 들었다. 얼굴이 잘린 목에 검은 넥타이. 그 연극이다. 이곳에서 하는 거였다. 반가운 느낌과 동시에 등골이 싸하게 달라붙었다.
앞에 선 남자는 그들이 다가오자 들고 있는 포스터 한 장을 팔랑이며 반겼다. 큰 키가 먼저 압도했고 큼지막하게 굴러다니는 눈알에 순간 멈칫했다. 미소를 띠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나쳐 갔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두 분이신가요?”





어두운 공기에 달라붙은 목소리였다. 종인과 친구는 서로를 바라보다 다시 남자에게로 눈을 붙였다. 고개를 끄덕인 것도 동시였다. 그는 조금 더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포스터를 한 장씩 건넸다.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쓴 연극이에요. 첫 공연이니 특별히 무료입니다.”





그 말에 종인은 포스터 어귀에 다시 눈을 돌렸다. 극본 박찬열. 그렇다면 이 사람이 극본가이자 여기 적힌 박찬열이라는 말이다. 아까 한번 스치듯 본 이름이라고 어쩐지 반갑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무료라고 하니 둘은 더욱 신나 작은 탄성을 냈다.
그 전에 연극을 즐기기 위해서는 해야 할 절차가 있다고 했다. 찬열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긴 끈이었다. 까맣고 폭이 적당한, 더 정확히는 넥타이였다. 그걸 둘러야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며 조언하였다. 친구는 받자마자 별 거부감 없이 목에 빙 둘러내 리본을 묶는 여유를 보인다. 하지만 종인만은 홍보지와 끈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입을 꾹 다물어냈다. 들어가서 묶을 게요. 그러면서 웃음기를 싹 빼고 찬열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아주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는 종인이 낸 말에 가볍게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한 걸음 옆으로 가 길을 비켜준다. 저쪽에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이게 웬 횡재냐며 친구는 종인의 등을 두어 번 두들겼다. 그렇게 계단에 발을 내딛을 때였다. 





“거기.”





조금 더 낮아진 음색이 둘을 붙잡았다. 종인이 먼저 고개를 돌려냈다. 단지 몇 걸음 떨어져있을 뿐인데 남자는 훨씬 멀어보였다. 어스레하게 흐려 보이는 중에 큼지막한 두 눈만은 이상하리만큼 하얗게 빛났다. 종인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부른 상대는 자신이었다. 





“이름이 뭐죠.”
“...김...종인이요.”





김종인. 찬열이 한 번 더 이름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웃는 표정은 여전했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에요.”





아래로 먼저 내려간 친구가 종인을 크게 불러냈다. 한 계단씩 조심스럽게 밟아나가면서 눈알은 계속 저쪽에 두었다. 언뜻 따끔따끔하다. 감았다 뜰 때마다 점점 남자가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어둑한 밤에 삼켜져갔다. 삼켜지는 것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