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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카이짱팬 둘.

면도히 2014. 5. 9. 14:41


 

02.

 



지금 난 초조함에 둘러싸여 있다. 이리도 심중이 불편할 줄은 미처 몰랐다.

멍 때리고 있다가 들어오는 지하철을 그냥 지나치고 넘길 뻔했다. 두 다리가 지금 걷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처음으로 갔었던 팬싸에서는 변백현과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지금은 혼자다. 혼자서 가고 있다.

혼자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문득 거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하는 전에 하지 않았던 걱정마저 들었다.

가는 지하철에서 내내 손톱을 물어 씹었다.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내가 남자 아이돌 팬 사인회를 가는 중이라는 건 알지 못하겠지. 그러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스렸다.

김종인 이름을 거꾸로 불러가며 쿵쿵 뛰는 가슴팍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한참을 멍 때리다가 또 다시 내릴 역을 놓칠 뻔했다.

 

음반점으로 찾아가 내 이름을 확인하러 갔다. 내부에는 팬일 것이 분명한 학생들과 여성들이 가득했다. 직접 만든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띄었다.

기다리던 줄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앨범을 샀을 때 브로마이드가 부족하여 받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 나누어주고 있었다. 대신 앨범을 샀을 때 받은 영수증이 있어야한단다.

그 때 영수증을 분명 지갑에 넣어놓은 것 같다. 구석구석 뒤지고 있는 중에 어느 새 차례가 되었다.

신분증을 먼저 달라고 하여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앞서 찾고 있던 영수증을 계속해서 뒤적거렸다. 한참만에야 지갑 사이 깊숙하게 구겨 넣어져 있던 걸 발견하고 산뜻하게 내밀었다.

밝은 얼굴로 마주한 사장 아저씨는 황당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날 쳐다보고 계셨다. 아마 줄곧 이 표정으로 계셨던 듯하다. 민증 사진이랑 내가 그렇게 다르게 생겼나.

한 번 확인을 하려는데, 세상에 맙소사. 꺼내놓은 물건은 신분증이 아니었다. 더욱이 안에 박혀있는 얼굴도 내가 아니었다. 뒷면에 그어진 싸인과 멘트가 유독 큼지막하게 확대되어 보였다.

그건 민증과 크기도 제법 비슷한 포토카드였다. 코팅까지 되어 형광등에 비춰져 빛을 펑펑 뿜어내고 있다. 교환하기 위하여 애써 가져온 물건이 하필 신분증을 넣어놓은 주머니와 같은 데에 들어있던 것이다.

이것들이 다 한 곳에 쏠려있으니 손이 헷갈릴 만도 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건 오직 나밖에 없으니 민망함도 오롯이 홀로 가져갔다.

 

가져온 카드는 총 9장. 그렇다. 그냥 몽땅 다 들고 왔다. 중복된 얼굴들도 많아서 교환 하려는 이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리 다양한 선택은 하지 못한다.

그래도! 9장을 다 바쳐서라도 그 단 한 장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이곳에 그런 각오를 안고 왔다. 양과 질 중에 무엇을 택하겠냐고 한다면 두말하지 않고 질이라고 외칠 것이다.

일단 주머니에 들어있는 같은 크기의 카드들을 몽땅 꺼냈다. 이중에 무엇이 진짜 신분증인지 촉감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민망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그만 바닥으로 놓쳐버렸다. 학교에 갇혀 자유를 갈망하다 풀려난 아이들처럼 재빠르게도 퍼졌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포토카드들이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개중에는 꽤 멀리까지 가버려 CD들을 구경하는 손님 신발 밑창으로 들어간 것도 있었다. 다행히 신분증은 내 신발 위에 착지했다. 브로마이드 챙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번호표만 대충 받고 튀어나왔다.

줄줄이 늘어진 포토카드들에 곁에 있던 아이돌 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너무 잘 들린다. 그들 사이에 내 귀가 끼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또렷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주웠다. 마치 포토카드 상인인 것처럼 굴었다. 있는 힘껏 표정을 굳혔다.

 

주변에 널려져있는 것을 다 주웠는데도 총 8장이었다. 바닥만 보고 있다가 옆으로 허리를 돌리니 누군가 내밀고 있는 손이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는 놓쳤던 마지막 카드가 들려있었다.

아직 땅에 박힌 눈은 상대의 신발을 보았다. 아, 맞다. 아까 다른 손님 밑창으로 들어갔다 했더니 이 사람인가보다.

 

 

“고맙습니다.”

 

 

진심을 담아 말하고 받으려는 때에 급작스레 손이 휙 옆으로 돌려빠졌다. 주는 시늉만 하다 뒤로 뺀 것이다. 이게 뭔가 싶어서 똑바로 눈을 떴다.

키가 꽤 작은 남학생 한 명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까만색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확실히 남자였다. 남자교복을 입고 있었고, 눈썹도 진했으며 무엇보다 눈이 엄청 똥그랬다. 눈만 보이는데도 인상이 굉장히 셌다는 뜻이다.

 

 

“아까 보니까 포카 많으시던데.”

“네? 포...카요?”

“네, 포토카드요.”

 

 

역시 남자였다. 정황상 나와 같은 그 아이돌의 남자 팬일 것이다. 반가움이 일어야하는데 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한 톤 정도는 더 낮아서 머리털까지 쭈뼛 섰다.

무릎을 꿇어야할 것 같은 기운이다. 게다가 남학생에게서 왠지 모를 전문가 냄새가 풍겨왔다.

 

 

“제가 이 멤버만 없거든요. 교환 하실래요?”

 

 

입고 있던 두려움을 얼른 벗어냈다. 날 구하기 위해 내려오신 구원자였다. 형광등 불빛이 쨍하게 비춰져 어쩐지 등에 날개 형상이 보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놓치고 그가 주운 카드 주인공은 아이돌 그룹 리더였다. 눈이 선하게 생기고 전체적으로 웃는 상인 멤버다.

 

 

“네, 네! 당연하죠!”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음반점에 목소리를 널리널리 퍼뜨렸다. 또 다시 눈길이 꽂혀왔다.

남학생 역시 느꼈는지 우선 나가서 이야기하자며 먼저 길을 밟아나갔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데도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다.

 

 

“누구 드려요?”

“카이...요.”

 

 

그는 끄덕거리며 작은 지갑을 꺼냈다. 안에는 무슨 순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멤버들 얼굴이 박힌 카드가 줄지어 끼워져 있었다. 종류가 꽤 여러 가지였다.

한 곳에 정확하게 멈춰 꺼내지고 있는 이는 분명 며칠 전에 누나에게 납치당했던 카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저려와 바지에 몇 번 닦아냈다.

 

당장에라도 카드를 품에 껴안고 뛰어다니고 싶었지만 학생의 눈빛이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분명 교환은 끝났을 텐데 계속 서서 멀뚱히 쳐다보고 있길래 주머니에서 다른 카드들을 다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학생이 잠시 끔뻑였다. 힘을 풀고 있을 때도 컸는데 확실히 선이 강하다.

카이를 얻었으니 이제 다 되었다. 굳이 그 외 카드들이 있을 이유가 없다.

정말 고마워서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이내 멀어지려는데 학생이 불러 세운다. 정말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괜한 부담을 준 것인가 했다.

 

 

“저기.”

 

 

하지만 그건 아닌 듯하다. 이미 카드들은 모두 작은 지갑 속으로 끼워 넣어진 뒤였다.

대신 딱 하나만 손에서 흔들거렸다. 들고 있는 한 장은 약간 낯설면서도 익숙한 형태였다. 저 물건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아챘다.

내 민증.

 

 

 

 

 

팬싸 시간은 성큼 다가왔다. 이번에는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현장이었기에 조금 더 마음이 편했다. 비교적 사람들 눈에 덜 보여 지겠지.

저번에 갔던 카이 단독 팬싸에서는 주변 팬들과 더불어 지나가던 이들이 쏘아대는 눈총까지 맞았다. 사방에서 꽂아온다. 피할 새도 없이 건드려왔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사죄를 해야 하는 느낌이었다. 앞으로도 쭉 이런 식으로 비공개적인 행사가 열렸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종이에 적힌 번호대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옆 자리에 익숙한 모습이 있다. 분명 아까 낮에 나에게 카이를 전해준 남학생이다. 이곳은 온풍이 제법 세서 후텁지근함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는 벗지 않는다.

뭐든 간에 이번에는 확실한 반가움이 번져났다. 고개를 비틀어 행동을 가만 지켜보았다.

열심히 메신저를 보내고 있었는데 상대 이름이 무슨 매니저라고 저장이 되어있다. 고등학생이라 패스트푸드점 알바라도 하나 더욱 고개를 빼고 지켜보았다.

그가 시선을 느낀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돌아선 고개에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는 눈매라 전보다 배는 매서웠다.

 

 

“어, 안녕하세요.”

 

 

머쓱함에 인사가 절로 나왔다. 남학생은 힘 뺀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화면을 까맣게 꺼버리기도 했다.

상대 기분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나 보다. 어찌 사과할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데 학생 쪽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증보니까 동갑이던데. 그냥 말 놔.”

 

 

남학생이 한 말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녀석이 형을 놀린다. 이 애가 나보다 아이돌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사회로 따지면 선배인 건 확실하나 옳지 못하다. 타인들이 어찌 말하는 건 상관없이 그게 내 신조였다.

김카이에게 줄 편지 첫 문구가 ‘종인이 형’인건 나와 변백현만 아는 사실이니 굳이 따져 물을 필요 없다.

내가 아래위로 훑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배에서 끓어온 숨을 푸욱 내뱉는다. 무시당한 감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진득한 날숨이었다.

그는 걸고 있던 목걸이 형태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건 딱 보아도 신분증이었는데 앞쪽에 박혀있는 숫자가 나와 엇비슷하게 일치하는 것이라 입을 떡 벌렸다. 생일이 연초인 것으로 보아 빠른 년생이다. 내 기준으로 따지면 변백현보다 더 가까운 나이였다. 

나랑 동갑이라면 대충 잡아도 대학 졸업반이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 있다. 혼란에 가득차 입 주변 근육이 일그러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팬 코스프레야.”

 

 

도경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스크 때문에 정확히는 안보여도 눈이 여전히 풀려있는 걸로 봐서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듯하였다. 그리고 왜 그가 마스크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멀쩡한 대학생이 교복을 입고 아이돌 팬 사인회에 왔다는 건 감추고 싶은 일일 것이다. 더욱이 남자가, 남자 아이돌을 보러 왔다는 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나도 다음에는 안경이라도 쓰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멤버들 지금 다 왔는데 앞쪽에 팬들이 막아서 못 들어오고 있대.”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정말로 행사 관계자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신기하다는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경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렸다.

 

 

“리더 형 포카 5장이나 줬으니까 너한테만 말해줄게.”

 

 

5장,2장,2장 비율로 들어가 있던 9장의 포토카드 중에 다행히도 그가 좋아하는 멤버가 가장 양이 많았다. 내심 흡족해하고 있었던 거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도경수가 손가락을 까딱여 곧장 그곳으로 귀를 갖다 붙였다. 마스크 속 웅얼거림에 소리가 먹혀 재차 물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리고야 말았다.

주변에 웅성거리던 데시벨이 화악 솟구쳤다. 사진 찍지 마세요! 카메라 압수합니다! 하는 스태프들 음성마저 한순간에 뒤덮였다.

무대 옆쪽 커튼에서 한 사람씩 튀어나왔다. 총 6명이 나오기로 한 일정이었다. 도경수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듯 보이는 리더 역시 당연히 참석하였다.

눈알을 연신 한쪽으로 굴리다가 딱 멈추었다. 물 빠진 머리색으로 앞머리를 쭉 쓸어 올리면서 나타난 남자는 포토카드 9장으로 구해낸 납작한 김카이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입체적으로 생긴 옆모습이 피곤함을 담았다. 팔다리가 쭉쭉 뻗어나가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여섯 명 중에 가장 어두운 피부 톤을 가졌으면서 가장 번쩍거렸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독 팬싸 때보다 더욱 시선을 위협했다.

이제는 의자에 앉아 자신들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팬들을 한 명씩, 천천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때는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날 보고 있는지는 확신 못한다. 그저 피곤함으로 둘러싸여 저만큼 쳐져있던 눈 꼬리가 쭉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살며시 웃었다. 그가 미소 지었다. 김종인이 입매를 한 가득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