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카이짱팬 셋.

L2014. 5. 10. 19:33

 

 

 

 

03.

 




“뭐? 김종인이?”

 

 

도경수가 지르는 이름에 주변 이목이 일순간 집중되었다. 마스크를 썼으면서 발음은 또 아주 정확했다. 대각선 앞에 앉은 단발머리 소녀가 고개를 휙 돌리는 모습에 얼른 머리통을 내렸다. 숨은 곳은 고작해야 다리 사이였다.

문득 내가 마치 타조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슬금슬금 허리를 폈다. 씁쓸한 맛이 입 안에서 펑 터졌다. 도경수 쪽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어떤 눈 모양일지 알 것 같았다.

그도 역시 소란을 부르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은지 이어지는 뒷말은 조용했다. 왼쪽 어깨에 가까이 붙어서 마스크를 검지로 집어 내렸다.

통성명까지 하고난 뒤 30분 만에 본 얼굴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곳이 아닌 바깥에서 봤다면 그가 팬인 것을 전혀 몰랐겠다. 학교에서 돌아다니는 남자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작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으로 넘어오자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이제 보니 명찰에는 도경수라는 석자 대신에 아이돌 멤버 이름이 적혔다. 눈을 몇 번이고 밀어 떴다. 정신이 아찔해지려고 한다.

 

 

“악수를 해줬어?”

 

 

눈두덩을 좁게 만들어 원래도 컸던 도경수의 동공이 뚜렷해졌다. 확실히 선이 큼직한 얼굴이다. 이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물음에는 고개를 가만 주억대었다. 악수한 것이 그리도 큰일인지 팬들에게 가려진 김종인과 나를 계속해서 번갈아보았다. 혹시 이거 말하면 안 되는 일이었나. 아랫입술을 슬쩍 물어 씹었다. 평범한 악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얘네 팬싸에서 스킨십 금지인데. 그게 회사 방침이야.”

 

 

금지. 나는 무려 절대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행위를 하였다. 무엇보다 소속 회사에서 내린 방침이라고 한다. 전혀 몰랐다. 어쩐지 그 순간 등에 식은땀이 쫙 퍼져 나오더니 이유가 있었다.

도경수는 다시 마스크를 올려 쓰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다. 카이인가. 카이를 노려보고 있는 건가.

역시 말을 잘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는 게 아니었다. 입술을 아예 안으로 쭉 밀어 넣었다. 이제 카이에게 피해가 갈 말은 안해야지. 그래봤자 이미 할 말은 다 하고난 뒤였다.

 

이번 팬싸에서 당첨된 명수는 150명이다. 우리는 각자 70번, 71번을 받았다. 거의 중간이라 아직 차례가 돌아오려면 멀었다. 천천히 담소를 나누기에는 알맞았다.

삼각형으로 변한 눈동자가 무서웠지만 이대로 두기에는 찝찝했다. 어딘지 심리적으로 뒤틀려진 느낌도 들었다. 이런 경우에는 달래주는 게 맞다.

뒤이어 질문을 한 건 나였다. 저들이 등장하면서 소란스러워지는 바람에 듣지 못한 뒷내용을 알고 싶었다. 대답은 싱거웠다. 까만 화면을 눌러 보여주는 게 끝이었다.

메신저 창은 꺼지지 않은 채였다. 얼핏 보았던 이름에는 확실히 매니저라는 글자가 담겨있다. 이걸 갑자기 왜 보여주는지 이해를 못했다.

어딜 봐야할지 몰라 눈알을 빙빙 돌려댔다. 손가락으로 내용을 짚어주고서야 느지막이 깨달았다. 도경수는 OXE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팬들많아 입구막혔어」

 

 

오늘 행사시작 예정시각에 보낸 질문에 날아온 답변이었다. 이게 바로 관계자보다 먼저 상황을 안 비법이다. 당연하게도 마술을 부려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돌 매니저와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나누고 있다. 게다가 도경수나 상대 말투로 봐서는 꽤 친해보였다.

별다른 질문이 생각나지 않아 계속해서 탄성만 내었다. 그제야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듯 마스크를 다시 집어 내린다.

 

 

“카이 꺼는 아직 모르지만.”

 

 

이번에는 메신저 즐겨찾기를 하나씩 보여주었다.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빨리 눈치 챘다. 매니저라 저장된 이름 셋 외에 5명 정도가 더 있었다. 그것들 모두 이 아이돌에 소속된 멤버였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도경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나와 같은 팬이 아니었던가. 하는 행동이나 복장을 보았을 때 아무리 좋게 보아도 골수팬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신기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니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혹시 회사에서 내보낸 팬 스파이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카이가 언젠가 했던 팬싸 금지행위 때문에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거기까지 예상이 미치자 얼른 도경수의 손을 끌어 잡았다. 팔과 함께 한쪽 어깨가 그대로 끌려왔다.

 

 

“제발.”

 

 

카이 혼내지 말아주세요. 카이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제가 악수해달라고 한 거예요.

회사가 굉장히 치밀한 구석이 있다. 팬들 사이에 스파이를 심어두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짙게 깔린 눈썹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반대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스윽 쓸며 입을 열었다.

 

 

“너 카이 팬 아니었어? 다른 멤버인데 알려줘?”

 

 

자기가 직접 저장해 주겠다면서 손을 내밀어왔다. 진정한 선의가 내포된 손짓이었다. 또 다시 혼란이 가해졌다. 회사 사람이 이리도 친절히 자기네 연예인 정보를 알려줄 리가 없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걸 알아챘다. 혹시 회사 측에서 내보낸 스파이 아니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냥 닫았다. 그는 눈이 참 커다랬지만 선한 분위기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이런 말을 했다가는 도리어 살기를 뿜어낼 것이다.

도경수 손목에 붙은 손가락을 천천히 다 떼어냈다. 입매를 억지로 밀어올리고 고개는 좌우로 흔들었다. 신경 써주어 고맙다고 덧붙이고 자세를 편하게 기댔다.

 

 

“70번부터 80번까지 나와서 대기해주세요.”

 

 

스태프들이 포스트잇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본인 이름 쓰고 앨범 위쪽에 잘 보이게 붙이라는 말도 함께였다. 몇 가지 주의사항도 같이 해주었다.

앨범이외에는 받을 수 없다. 무릎 꿇고 앉으면 안 된다. 촬영 및 녹음도 안 된다. 그밖에 여러 가지가 많았으나 또렷이 들려오는 건 한 가지였다. 악수나 포옹 같은 스킨십은 불가하다.

곰곰이 떠올려보니 말해주는 관련 내용을 어디선가 들어봤다. 단독 팬싸 때 분명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보니 듣지 않은 건 나였다. 긴장과 소음이 한데 엮여 귀를 막고 있었다. 여성분이 최선을 다해 공중에다 소리치던 모습까지 기억났다.

당시는 선착순으로 나누어진 터라 팬들 간에 균열도 많았고, 무엇보다 공개된 곳이라 스태프들은 사람 막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다보니 무얼 지키고 어기는지 신경을 못 쓴 것이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악수를 나한테만 해주었다는 사실에 티는 내지 않았으나 괜스레 뿌듯함을 갖고 있던 것이 부끄러웠다.

한 마디로 멍청한 행동이었다. 특별히 해준 게 아니라 그도 정신이 없던 거였다. 나 같아도 갑자기 누가 소리 꽥 지르면서 자기소개하고 악수해달라고 하면 얼떨결에 해주겠다.

 

그런 정신으로 서 있었더니 어느 순간부터 싸인을 받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멤버 순서였다. 각자 인사를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내가 아무 말도 없으니 뒷사람이 계속 밀어냈나보다.

바로 앞 번호인 도경수가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마스크를 벗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온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앉아 있는 사람이 고개를 쭉 빼주어야 했다.

역시 한 두 번 온 솜씨가 아니다. 회사 내부에서 고용된 스파이는 아니어도 치밀한 건 맞다. 저 마스크가 저런 용도로도 쓸 수 있구나.

 

카이는 가장 마지막에 앉아 있었다. 한 명씩 나누어 주려고 했던 편지는 주머니에 넣어놓은 채로 꺼낼 타이밍을 놓쳤다. 그렇게 앞쪽 다섯 명은 건너뛰다시피 카이 앞에 당도했다.

 

 

“어, 안녕하세요.”

 

 

책상을 손톱으로 따다닥 굴리며 다음을 기다리고 있던 종인이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 진득한 눈매는 변하지 않았다. 머리색이 연하게 빠져서 한층 성숙한 면이 돋보였다.

그래도 역시 특유의 어린 티는 남았다. 저 목소리에 반가움이 섞여있었다고 느꼈다면 괜히 또 주책일 거다. 한 번 본 얼굴을 그리 쉽게 기억할 리가 없다. 대충 침을 삼켜 넣었다. 입 안이 계속 바짝 마르는 게 느껴진다.

 

 

“이이이이거 편지......”

 

 

목구멍에서 괴이한 음색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편지봉투 12장을 부채마냥 펼쳐 책상 위에 살며시 밀어주었다. 고개를 쭉 돌려 봉투를 읽던 종인은 머리를 들어 재차 말을 내었다.

 

 

“멤버들 꺼? 왜 앞에서 안 주고요.”

“기기기기긴장 해서......”

 

 

미친 혀. 이놈은 미친 혀다. 아까 전까지 잘 굴러가던 놈이 박힌 돌이라도 만났는지 자꾸만 걸린다. 잠시 고개를 내렸을 때 얼른 숨을 바로 쉬었다.

언뜻 웃음소리가 들렸다. 종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꺽꺽대고 있다. 안면 전체가 구겨져 말도 제대로 못했다. 화한 기운이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간다.

이제야 포스트잇에 써 놓은 이름을 읽는 듯싶다. 앨범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집중한다. 이 순간에도 난 초조했다. 정수리 쓰다듬으면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될 일이다. 쓸데없이 동글동글한 모양이라 끝없이 충동이 일었다.

 

 

“이름 뜻이 뭐에요?”

“알찬 열매요!”

 

 

종인은 계속 킥킥거렸다. 이름 때문에 웃는 건 아니겠고 내 반응이 너무 열정 한 가득이었나. 자기 사진 위에 계속 펜을 놀렸다. 긋는 선 하나 하나가 모두 유연했다.

이동하겠다는 말에도 꿈쩍 못했다. 이미 싸인은 끝났고 종인 역시 날 살피고 있다. 뒷사람이 눈치를 주는 것이 느껴져서 서둘러 앨범을 접었다.

 

 

“또 봐요.”

 

 

무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수도 없이 곱씹었다. 또 보자고 했다. 또 보자고. 또 보자. 또, 또, 또. 신나서 속으로 팔짝거렸다. 그러다 브레이크 걸린 목소리로 했던 말들이 떠올라 관자놀이를 푹 찔렀다.

저 멀리서부터 보는 도경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카이가 내 앞에서 박장대소를 했으니 이유를 묻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일단 자리에 앉아 싸인을 확인했다. 파라락 넘기며 찾은 필체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을 간질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얼굴이 힘껏 위로 올라가 있다는 건 알겠다. 이게 뭐라고 이러는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그림까지 그려줬네.”

 

 

불쑥 나타난 머리통에 잠시 안면이 굳었다. 도경수 말을 듣고 확인해보자 정말로 아래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힘을 꾹꾹 눌러 정성스레 그은 흔적이 팍팍 담긴 그런 그림이었다. 자기한테는 본래 싸인에 있는 그림이라며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남겨져 있던 그림은 알이 탐스럽게 열려있는 앵두였다. 아마 열매라고 그려준 것 같은데 남들이 보면 쉽게 추측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었다.

이건 조금 흡족해해도 되는 거겠지. 입을 쭉 찢고 괴상한 떨림으로 웃어젖혔다. 잠시 동안 사방에서 겨냥해 오는 시선 따위 잊었다. 오늘 밤 꿈에는 카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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