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각인

S2016. 10. 28. 16:49

190321






이름이 새겨졌다. 때마침 거울을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위치다. 요 며칠 새 자꾸 따끔따끔 하다 싶어 잠꼬대 하다 긁혔나 가볍게 넘겨왔다. 연고를 발라도 나아지는 기미가 없다 싶더니 이렇게 될 줄 예상 못했다.

반전된 이름을 인지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박. 아니야, 안 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박, 바악, 아아악. 반복해서 눈에 담을 때마다 더 선명해질 따름이다.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살이 새빨갛게 달았다. 물에 닿을 때마다 진정되기는커녕 진물이 비집고 새어나오는 느낌이다.

가뜩이나 날씨도 더운데. 왜 하필 쇄골에, 이 이름이. 코로 크게 숨을 들이고 목구멍에서 신음했다. 타일에 이마를 찧다가 손톱으로 미끈한 벽면을 긁더니, 종국에는 소리를 질렀다. 아침부터 깊은 절망을 맛봤다.

하필 그 많은 이름들 중에 박찬열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



“종인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등 뒤 바로 닿는 온기가 느껴지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바짝 붙어있던 찬열은 종인을 비틀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기분이다. 목덜미가 찌릿하여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만큼 사이가 멀어졌다.

어떻게든 피해 다닐 심산이었는데 결국 화장실 앞에서 만났다. 방학 전까지 겹치는 수업만 잘 넘기자 했건만 하루 만에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래서야 종일 빙빙 돌아다닌 의미가 없다. 종인은 어떻게든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신 눈치를 보았다.

신장 차이가 그림자를 만들어 길목을 막아섰다. 여태 한참 찾았다며 의도를 분명히 했다. 문장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수업은 들어왔느냐, 점심은 혼자 먹었느냐, 이 교수님 과제 어렵지 않았느냐. 대강 고개만 끄덕였다. 이 영양가 없는 질의응답 시간만 지나면 집으로 갈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안쪽이 점점 저려왔다. 속이 덥다. 종인은 가슴팍을 몇 번 털었다.

혼자 열심히 떠들던 찬열은 일순간 말허리를 끊었다. 조용해지니 오히려 분위기가 음산했다. 조심스럽게 눈을 올렸다.



“벌레 물렸어?”



시선이 노골적으로 한 부근에 머물렀다. 가리고자 붙여둔 밴드가 오히려 흥미를 끌었다.

그렇다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제 집에 모기가 있었던가, 사소한 고민이 먼저였다.

어느 새 가까이 다가온 투박한 손가락이 목 부근을 끌어내렸다. 살짝 닿은 살이 쓰라리다. 종인은 절로 인상을 썼다.



“그냥, 좀 긁혔어.”



걸린 손길을 피해 떨어져 나왔다. 매무새를 다듬으며 뒤로 두 발짝 더 디뎠다. 어쩌다보니 변명을 냈다.

찬열은 그새 바지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삐딱하게 선 채 의연한 얼굴이다. 그 표정이 오히려 종인 안쪽에 자리 잡은 불안을 살살 긁었다.



“술 마시러 가자.”



뜬금없이 내뱉은 한 마디에 갖가지 변명거리가 우르르 떠올랐다. 심장을 텅텅 내려치는 감각은 애써 무시했다.



“약속 있어.”


“약속?”


“응.”


“누구랑.”



밀고 들어오는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박찬열은 꼭 이런 부분에서 말꼬리를 잡는다. 거짓말을 간파하고 놀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몇 초간 정적이었다. 허리를 굽힌 찬열이 살짝 웃었다.



“이따 우리 집으로 와.”



싫어. 간단한 단음이 발화되지 못하고 혀끝에 감겼다. 왜인지 박찬열 앞에서는 의사표현이 쉽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볼 안쪽만 잘근잘근 씹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찬열은 어깨를 툭툭 치고, 먼저 간다는 말과 함께 스쳐지나갔다. 닿은 부분이 화하게 달아올랐다. 종인은 반대 손으로 죽지를 감쌌다. 숨이 턱 끝에 간신히 매달렸다. 싫다고, 싫다고 말해야 한다. 초를 의식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콘돔 다 떨어졌으니까 올 때 사와.”



놀라 뒤를 확 돌았다. 넘겨보고 있어 정확히 마주했다. 시야에 들어온 이목구비가 그늘져있어 인상이 더욱 도드라지게 보였다. 오른쪽 귀를 얻어맞은 듯 이명이 퍼졌다. 이후 갑자기 몰아치는 욕지기에 찬열보다 먼저 자리에서 벗어났다.

간신히 아래층 화장실로 가 변기통을 부여잡았다. 빈속인지라 묽은 액만 넘어왔다. 손발이 같이 덜덜 떨렸다. 된소리가 어금니에서 잘게 씹혀 나왔다. 박찬열, 석자와 함께였다.

입을 헹구다 거울에 비치는 쇄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혹여 밴드가 떨어질까 꾹 눌렀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한다. 이대로 박찬열 손에 놀아날 순 없다.

찬물을 뒤집어썼다. 눈두덩 위를 진득하게 누르자 물이 턱 끝으로 흘러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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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바람풍선

S2015. 12. 7. 05:08

141202





딱히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다. 깜짝 이벤트를 해준다든가, 직접 만든 선물을 준다든가 하는 일은 전례가 없으니 당연히 마음을 접었다. 적어도 만날 수는 있을 줄 알았다. 하루하루 날짜를 셌다. 작년에 받았던 양말을 깨끗하게 빨아서 널었다. 당일 날 신고나가자는 마음이었다. 그게 깨지는 건 무엇보다 손쉬웠다.

[저 이번 달에 시간 없는데.]

“수능도 끝났잖아!”

[그러니까 그렇죠. 수능생 할인 받아서 바짝 놀아야 된단 말이에요.]


이쪽에서 입 안이 바짝 말라오는 건 신경도 써주지 않는다.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다. 친구들과 이미 약속을 잡았다는데 어쩌겠는가.

[형도 공휴일 없이 연말 부근 지내려면 힘들잖아요.]

힘들다. 힘들지 않을 리 없다. 힘드니까 더욱이 김종인을 만나야했다. 시간은 원래 쪼개 쓰라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그렇게 만났으니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허나 김종인은 다른듯하다. 친구들이 부른다고 전화도 먼저 끊어버렸다.
우울감이 부쩍 올라왔다. 점심을 먹지 못한 탓인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키보드에 올린 손은 연신 ‘김종인’ 석 자만 쳐댔다. 표에 가득히 올라오는 이름이 어색하다.

노는 동안에도 날 잊지 않는 건 고마웠다. 놀러가기 전 입은 옷, 가서 먹은 음식, 뭘 하고 놀았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도 써서 보내온다. 이런 걸 보면 딱히 어떤 심적 부분이 변했다고 여기기는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고민 상담을 하지도 못하니 홀로 머리통만 끌어안았다.

생일이 담겨있는 주로 성큼 다가왔다. 찔끔찔끔 흐를 바에야 아예 폭포처럼 쏟아지라고 빌었다. 정말 열 받게도 그렇게 마음먹자 시간은 어느 때와 같이 공평하게 지났다.

27일 아침이 되었다. 고요하고 한적한 날이다. 평소와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대형 브랜드가 보내는 문자에 정확한 이름이 담겨있다는 것 정도였다. 박찬열 님 생일 축하합니다. 1000포인트가 적립되었습니다. 
준비를 다 끝내고도 저 양말을 신을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고민하나마나 선택은 정해져 있다. 비록 약속은 없어도 그래야 했다. 발을 꼭 감싸는 양말은 제법 따뜻했다. 더불어 종인이가 한층 그리워졌다.

어째서인지 이틀 전부터 연락두절이다. 집중해야할 일이 있을 때 종종 보이는 행동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정말 신나게 놀고 있겠다고 어림잡았다. 그것도 날 두고. 나만 쏙 빼고. 오늘은 또 어떤 누구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증만 증폭되었다. 부재중을 두 통 이상 남기면 진저리를 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먼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고통이다. 회사조차 기력을 쭉쭉 빼놓고 있다. 더 남은 체력도 없는데 비틀어 짜내는 수준이다.
이불로 기어들어가 출근 전까지 퍼질러 잘 생각이었다. 계획이 무너졌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야근을 선물이라고 여기는 긍정적 자세였다. 선물상자라 무턱대고 포장을 뜯었다가는 이처럼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과장 산타가 선물을 도로 가져가 주었으면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기에는 시기가 일렀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업무를 끌어안았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 모른다. 일을 하다보면 모든 상념이 지워진다. 현실은 싹 잊히고 아예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이 일은 왜 나에게 주어졌을까. 고민해도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진다.

겨우겨우 아홉 시 전에는 빠져나왔다. 빵가게를 지나치다 전시된 케이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게 꽃단장을 하고 누군가 데려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생크림 종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잠시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유난히 눈에 꽂히는 케이크가 있었다. 곰 얼굴을 형상화한 게 겹쳐 보이는 사람이 있어 괜스레 웃음이 났다.

“만 오천 원입니다."

아직 저녁밥도 못 먹었으니 이걸로 대충 해결하기로 하였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하여 발악하는 꼴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먹은 게 없었다. 이제야 떠올랐다. 숨 쉬는 시간도 나눠서 김종인을 떠올렸건만 정작 내 영양분 섭취는 까맣게 잊었다.
혹시나 싶어 들춰본 핸드폰 화면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몇 시간 뒤면 끝나는 생일이었다. 만남이 어렵다면 통화라도 해주었으면 한다.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속 좁은 사람 만드는 것 같아 야속해졌다. 어디서 누구와 얼마나 신나게 놀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케이크도 샀으니 혼자 샴페인이라도 터뜨려야겠다.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쉽게 잠들기 어려웠다.
아직 영업 중인 마트가 있었다. 전에 종인이가 자기 20살 되면 터뜨려달라던 물건을 집었다. 이 정도 반항은 할 수 있는 거다. 뭐가 됐든 오늘은 내 생일이다.

현관문을 열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언제나 들어서던 집 안과 사뭇 달랐다. 부엌 불이 켜져 있었다. 인기척까지 났다.
슬그머니 신발을 벗는데 뭔가가 밟혔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신발이 가지런히 놓였다. 항상 해놓던 대로 반듯하게 정리했다. 그럼 저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충분히 예상되었다. 어떤 표정으로 들어서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를 않았다. 부풀었다가 터지는 건 허망한 일이다. 애초에 바람을 불어넣지도 않았다. 밋밋하고 작은 풍선 그대로였다. 그랬던 게 서서히 구 형태를 띠어갔다.

이 양말은 소음도 잘 잡아먹었다. 신고 나오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제 집에서 도둑마냥 걸어 들어가는 이도 드물 거다. 기둥 하나만 돌면 되는데 한참을 머뭇거렸다.

초침 소리가 귀에서 크게 확장되어갔다. 그 어려웠던 단 한 발짝을 떼었다.

깜짝 이벤트를 해준다든가, 직접 만든 선물을 준다든가 하는 일은 정말 꿈에도 바라본 적 없었다. 솔직히 서운했다. 나 혼자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허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종인이도 눈치 채고 있었나보다.

잘 차려진 식탁에는 그럴 듯하게 끓인 미역국이 중앙을 차지했다. 시간이 꽤 오래됐는지 푹 식었다. 그밖에도 손이 많이 가는 반찬이 한 가득이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건 역시 수육이었다. 쌈 채소도 여러 종류로 골라왔다. 물기는 말라있었다. 제 식성대로라면 당연히 닭고기가 올라와 있어야 맞다. 고집을 꺾고 물러서서 위해주었다. 가슴 전체가 꽉 막혀왔다.

이 모든 걸 준비한 이는 식탁 반대편에 앉아 팔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 분명 본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끝내놓았을 거다. 시계는 아홉 시 삼십 분을 넘어섰다. 

깰 세라 의자를 들어 뺐다. 가만 앉아서 국물부터 맛을 봤다. 소고기도 넣어서 모양도 그럴듯한 게 맛도 좋았다.
어찌나 곯았는지 젓가락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릇에 부딪히는 소음이 컸다. 곤히 자고 있던 종인이가 부스스 일어났다. 눈두덩이 그새 통통하게 부었다.

“맛있어.”

가만 바라만 보던 종인이는 어느 새 비워낸 공기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는 사람만 눈치챌 수 있는 흡족함이 새어나고 있다.

“한 그릇 더 줄게요.”

집어가는 손이 언뜻 떨리고 있다.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아 다행이다. 무엇보다 샴페인 사오기를 잘했다. 바람을 넣어 만든 풍선이 둥실둥실 하늘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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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선배는

S2015. 12. 7. 04:52

140711





박찬열은 잘생기고, 예쁘고, 영리하고, 부유한 데다 집안이 안락하고 성격이 명랑해서 이 세상의 축복을 모두 누리는 것 같았다. 분명 그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으리라고 종인은 확신했다. 저리 생긴 장군님이라면 제 목을 직접 가져다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 찬열이 종종 캠퍼스 인도를 지나다닐 때 흘낏 스치는 시선들이 모두 박 장군님 만세를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종인은 등 뒤에 남몰래 차고 있던 활로 눈 화살을 꽂아 마구 쏴댔다. 하지만 충성심과 친밀도는 반비례하는 것인지 사실 말 한번 걸어본 적 없었다. 심지어 과가 다르니 건물 위치도 정반대에 놓였다. 얼굴 한번 보려면 깨나 기나긴 길을 오래도록 밟아나가야 했다. 하지만 종인에게 그 정도 수고쯤은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습실에서 뛰어다니는 양에 비하면 그건 가벼운 근육이완용 산책이었다.

박찬열은 소속된 과마저도 자신과 꼭 어울렸다.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수건을 둘둘 말아 이마 선 위로 질끈 묶었다. 막대를 꽂고 주변은 섬세한 손길로 철사 뼈대를 꼬아 올려 찰흙을 던지듯 붙였다. 머리에 다 들어가 있는 형태를 손으로 옮겨 결국 만들어낸다. 작업을 할 때있어 찬열은 가히 예술가였다. 반팔을 고이 접어 드러난 팔뚝 근육마저 그러했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이미 프로라는 소리까지 오갔다. 해당 조소과 교수가 그에게 작업실 열쇠를 맡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또 작업 중 집중도가 굉장해서 닫힌 문을 열어도 눈치 못 챘다. 물론 아주 조심스러웠기에 가능했다. 덕분에 종인은 편하게 뒷모습이라도 훔쳐볼 수 있었다. 해가 다 저물어 갈 때까지 남아서 하는 일도 잦았기에 아예 안으로 들어가 조각상을 앞에 두고 구석진 곳에 숨죽인 적도 있다. 몸을 최대한 둥그렇게 말아 접는 것 정도는 항상 신체를 단련한 종인에게 식은 죽 퍼먹기였다.
박찬열이라는 인간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두말없이 ‘완벽’이었다. 간혹 외부에서 학생들 작품을 가져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가 만든 작품은 항상 뽑혔다. 이미 이름이 알려져 꼭 그가 만든 게 아니면 안 되겠다 한 적도 있단다. 소문인지, 사실인지 몰라도 그만큼 다들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인정했다. 박찬열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 종인은 동기들 몇 명과 연습실에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한참 몸을 풀었다. 전체를 반복해서 크게 돌았더니 땀이 줄줄 쏟아졌다. 봉에 다리를 올려 옆으로 허리를 꺾어 기대 숨만 내쉬었다. 눈을 감고 편하게 골라냈다. 표정마저 온화했다. 바로 뒤에서 똑같이 몸을 기댄 여 학우 둘이 속닥이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너 박찬열이라고 알아?”
“누구? 그 조소과?”

곧장 귀가 그쪽으로 쏠렸다. 자동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박찬열이라는 이름이 교내에 흔하지 않음을 안다. 덧붙여 과까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둘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번갈아 그에 대한 칭송을 쏟아냈다. 역시 이 박찬열은 그 박찬열이었다. 종인 역시 둘에게서 오가는 모든 말에 긍정하며 내적 예찬을 했다. 그러고는 마치 원래부터 이때쯤 반대쪽 다리를 풀려고 했다는 듯 뒤를 돌았다. 이야기를 하던 여인들은 놀랐는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태연하게 왼다리를 올려내 방금처럼 옆구리를 꺾어 붙였다. 자신들에게 전혀 관심 없다는 행동을 보고서야 다시 말을 이어갔다. 눈을 감은 종인은 더욱 예민하게 청각을 세웠다. 대부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잘생긴데다 예쁘고 머리도 잘 쓰고 집도 잘 산다. ‘박찬열’하면 튀어나오는 공식과도 같았다.
쉴새없이 주고받던 대화중에 불현듯 한 명이 작은 한숨을 훅 쉬었다. 우리가 이런 말 아무리 해봤자 다 쓸모없다며 자조하는 어투였다. 뭔데, 뭔데. 자신이 하고 싶은 질문을 대신해주는 상대방이 참 고마웠다. 앞서보다 더 작게, 거의 숨만 내쉬는 음량으로 말을 꺼냈다.

“그 선배 게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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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한낮의 기차

S2015. 12. 7. 04:47

140710





나는 한낮의 기차를 타고 있었다. 해는 흐린 구름 뒤에 가려졌으나 아직 저물지 않았다. 갈수록 거세져가는 빗물이 있는 힘껏 창을 향해 내려쳤다. 저 끝에서 사방으로 퍼진 빛줄기가 땅으로 꽂혔다.
무작정 나와 버려, 가지고 있는 건 사지 멀쩡한 몸뚱이 하나였다. 옆에는 역시나 사정이 다르지 않은 네가 잠들어 있다. 목적지는 물론 정하지 않았다. 정처 없이 아주 먼 곳으로 향할 뿐이다.
어깨에 걸린 작은 머리통은 가끔씩 색색대었다. 아직 살아있음이다. 너에게서 삶을 찾고 있다.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입가는 미소가 걸렸다. 덩어리진 입술이 귀여워 검지손가락으로 스리슬쩍 건드려보았다. 그럼에도 표정은 여전하다. 잠에서 깨어나면 물어봐야겠다. 무슨 꿈을 그리 즐겁게 꾸었느냐고.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잠들면 앞에서 사라져버릴 걸 알았다. 내가 꾸는 꿈은 너다. 가만 눈을 감고 있는 김종인, 너다.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무얼 바라보면 살아가는 지 알 리 없다. 네가 사라진 현실은 두려움만 가득하다. 그곳은 나 혼자였다.
우리는 함께해야한다. 그렇게 그 어느 곳에도 도착할 수 없다. 기차가 달리는 철로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종인이 너는 그저 잠에 빠져있으면 된다. 우린 함께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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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발화점

S2015. 12. 7. 04:46

140708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나는 그렇게 고향에 다시 와 있었다. 산 너머에 머물던 바람이 단숨에 앞으로 당도했다. 며칠 전에 눈이 내렸었는지 흐려진 주변이 약간 부수어져 보였다. 잘게 갈린 흙더미는 얼음 밭 위에 흩뿌려져 있기도 하였다. 떠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어라 쉽게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냄새가 풍겼다. 이건 오직 이곳에서만 맡을 수 있다. 숨을 크게 들이면 코끝에서 금방 흩어져버리기 일쑤였다. 안타까움마저 일었다.억울함은 공기 중에 맺혀 떠다니고 타다 남은 재가 곳곳에 덮였다. 시야를 닫지 않아도 당시 장면들이 눈길이 닿는 곳곳에 떠오른다. 비명으로 점철된 공간에 갇힌 여러 명은 오직 한 목소리를 내었다.
도저히 기억더미에 쌓아두고 싶지 않았다. 귀청이 터질 듯 맴도는 웅성거림을 밖으로 밀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진정으로 깨달았다. 실을 아무리 끊어내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시작점으로 돌아가 다시 말아 올리면 된다. 골 안쪽이 언뜻 뒤흔들려왔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채 가지만 쭉 내뻗은 나무가 여러 모양으로 하늘거려 보였다. 

도망 가. 카이야, 도망 가! 정신을 휘어 감는 그 목소리들은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을 따라 울렸다. 전에는 밖을 향해 넓게 찍혀있었다면 지금은 안쪽으로 좁게 찍혀간다. 걸어가고 있는 길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어린 나는 겁에 잔뜩 질려있다. 상기된 두 볼과 눈 알갱이들을 묻힌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흰자는 벌겋게 떴지만 한 번 깜짝이지 않았다. 꾹 다문 입 모양이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필시 저주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죽인다. ‘불’을 드러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이미 완전히 뒤로 넘어가 보이지 않는 어린 나의 음성이 얼핏 들려왔다. 이건 현재에 사는 나에게서 끌려올라오는 고함이었다.

우리 집안은 숨어 살아야했다. 도망 다녀야했다. 타 능력자들이 내모는 압박을 이기기 어려웠다. 고작 너희와 우리의 힘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삶 자체에서 내쫓겼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가진 각 능력을 열고 잠글 수 있다. 그렇기에 흩어진 공간을 모아서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을 밟아 움직인다. 아마 그게 그들 입장에서는 위험하게 느껴졌을 것이라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 날, 모든 게 타올라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부지 앞에 섰다. 하늘에서 내려온 새하얀 결정들에 푹 덮였는데도 탄내가 코를 찔렀다. 콧속이 아려올 지경이었다. 무릎을 내려 땅을 덮은 흰 덩어리들을 손바닥으로 주욱 쓸어냈다. 그을린 나무판자가 드러났다. 남아있던 부족 핏줄은 단 한명을 제외하고 전부 이 밑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완전히 털어내자 몸을 드러낸 큰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을렸지만 확실히 남아있다. 까맣게 태운 잿가루가 어떠한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후후 불어 형태를 자세히 만들었다. 초점을 다시 잡고 봐도 같은 모양이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다.
뒤집힌 삼각형 안에 꽉 들어찬 눈동자, 우리 능력을 묶어 한 곳에 가두게 하는 문장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을 줄이야. 어떤 게 된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건 부족 내에서 다들 쉬쉬하는 절대적 기밀이다. 그걸 도대체 이들이 어떻게.
어릴 적 기억이 재조합 되어갔다. 뜻을 알 수 없는 언어들이 훅 모여들어 고막을 찌를 듯 웅성거려왔다. 해방되지 못한 자들이 앞에서 제각기 내지르고 있음이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라야했다. 
직각으로 꺾어 아예 부숴버렸다. 한순간 공간에 꽉 차 머물러있던 바람이 사방으로 터졌다. 여태까지 영혼마저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다 이제야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것이다. 
더욱 분명해졌다. 이 그을음으로 봤을 때 확실히 ‘불’이 한 짓이다. 우리 부족을 전부 잡아다 죽여 놓은 것도 모자랐는지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우리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핵심인물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그 무엇도 묻지 않을 것이다. 불을 잇는 후계자가 전부 책임지게 할 생각이다. 

“어머니, 아버지.”

성대가 잠겨있어 약간 떨려왔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땅에 댔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뵙지 못하였다. 그대로 이마를 내렸다. 찬 기운이 가득 차올라왔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줄곧 기다려왔을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응축된 물이 옷에 녹아 스며들어왔다. 몇 번이고 다잡았던 마음이 여기에서 굳건해졌다.

“누나도 오랜만이야.”

몸을 일으켜 고개를 길게 꺾어 올렸다. 부연 검은 색이었던 하늘 저 끝에서 허연 가루가 소리 없이 춤을 췄다. 서서히 내려오는 눈이었다. 조금 더 두텁게 감싸안아줄 것이다.
불 후계자는 곧 진정으로 그들을 이끌 수장에 오른다.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소리 내어 불렀다. 찬열. 너를 찾아 반드시.
머지않아 모든 소리는 눈밭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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