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기억고리

S2015. 11. 22. 03:06






앞에 앉은 아이는 한참동안 손가락만 고물거렸다. 제 옷이 아닌지 어깨선과 다른 위치에 박음질 되어있는 흰 셔츠는 그의 내면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빳빳했다. 첫 번째 단추가 울대를 옥죄고 있었다. 저것만 풀어낸다면 금방이라도 목소리를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상 숨소리라도 새어나갈까 입매까지 꽉 걸어 잠근 모습이다. 문 옆에 걸린 시계 초침이 이 안에서 가장 부산스러웠다. 상담 요청에 응해 서로를 마주한지 이제 막 10분이 넘었다.

찬열은 손에서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 안에 채워진 글귀라고는 ‘김종인, 21세’ 가 다였다.


ㅡ안녕하세요, 전 박찬열입니다.

아, 김종인이예요. 나이는 스물, 아니 스물 한 살요.

반가워요. 그럼 이제 얘기해 보시죠.


종인은 그 말에 어떤 부담을 느낀 게 분명했다. 갈 곳 없는 시선을 자꾸만 어딘가에 두고자 하였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여기고 책임감 있게 기다렸다. 펜을 놓은 이유는 단지 종인을 조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찬열은 기록하는 대신에 의자를 가까이 붙여왔다. 살짝 들었다 놓은 덕에 종인 모르게 근접해졌다. 종인 씨. 부르는 소리에 들어 올린 눈이 동그랗게 차올랐다. 단 거 좋아하나요. 종인은 짧은 사이 끝에 응하는 답을 냈다. 이제 각자 앞에는 김이 피어나는 머그컵이 놓였다.

찬열은 줄곧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호응을 하거나 자기 의견을 덧붙이지도 않았으며 그저 들을 뿐이었다.

슬슬 핫초코가 바닥을 보였다.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다 보니 종인은 호흡이 들쑥날쑥했다. 크게 내쉰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 넣었다. 하얀 컵 안에 갈색으로 된 텅 빈 원을 그렸다. 흐렸던 초점이 이제야 대상을 명확하게 직시했다.


혹시 이렇게 된 건 제 잘못일까요.


책상에 그에게만 보이는 지푸라기라도 올려져있는지 연신 손톱으로 위를 긁었다. 찬열은 그 행동 역시 가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시계 시침과 분침이 모두 위로 솟았다. 동시에 정오 알림이 작게 들려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요.

감사합니다. 친구 분께선 아마도 범인 얼굴을 봤을 겁니다. 뒤에서 타격을 받았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돌아 마스크를 벗겨낼 기운이 남아있었다는 걸 보면 말이죠. 그럼에도 기억이 안 난다는 걸 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일시적인 기억장애, 뭐 대충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쪽 분야는 제가 전문의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진 않습니다. 대신 가능성은 몇 가지로 둘 수 있는데 첫째, 친구의 극진한 노력에도 기억해낸다. 둘째, 친구의 극진한 노력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찬열은 반대편으로 성큼 다가서 종인의 어깨를 두어 번 털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종인은 허리를 확 꺾어내며 야멸친 손길로 쳐냈다. 벌레가 있어서 그랬다며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사과했다. 다 마시고 남은 빈 컵을 들고는 뒤쪽에 자리한 간이 부엌으로 잠시 사라졌다. 곧 목소리만 방으로 먼저 돌아왔다.


기억하고 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는다.


손가락은 각자 또 책상 위를 억세게 긁었다. 밀려난 의자에서 기이한 잡음이 바닥을 찔렀다. 종인은 벽에 기대고 서서 컵을 씻느라 등을 돌린 찬열에게 말을 던졌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잘못 기억하는 건 아니시구요.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컸다. 발소리를 죽이기에는 딱이었다. 시기 적당하게 설거지가 끝나지 않았더라면 부엌장 아래를 열어젖힐 시간정도는 충분했을 것이다. 바로 뒤에 자리한 종인을 보고서도 찬열은 가벼운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오히려 처음보다 인상이 유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뒤에 오기로 한 상담자가 있어서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미안해요. 괜찮다면 나중에 다시 와주시겠어요.


얌전했던 눈썹이 일순간 우그러졌다. 종인은 입을 꾹 말아 씹었다가 가벼운 목례와 함께 문을 열어 나갔다.


또 봐요, 김종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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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앓이

S2015. 9. 7. 04:07





정각에서 2분이 지나가고 있다. 달리 늦는다는 연락은 없었다. 오겠지, 오겠지 중얼거리며 구레나룻을 쓸었다. 마침 근처에서 향수냄새가 흘러들었다. 찬열은 얼굴이 환해지며 등에 대고 있던 기둥을 잡고 빙글 돌았다. 뒤에서 오던 종인과 정확히 마주했다. 인사를 건네려다말고 입술이 안으로 쑥 말렸다. 기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팅팅 부은 얼굴로 나타났다. 그것도 한쪽만 유난히 부었다. 푹 눌러쓴 모자에 마스크까지 꼈어도 알 수 있었다. 찬열은 허리를 굽혀 눈을 맞췄다. 응해주기는 커녕 종인은 모자를 더 눌러쓸 따름이었다.


"감기 걸렸어?"


걱정이 역력하게 녹아든 목소리가 물었다. 고개를 가로젓나싶더니 갑자기 빠른 속도로 끄덕였다. 어딘가 어설픈 기침까지 더했다. 공원 쪽에서 매미 서너마리가 지르는 구애합창이 들려왔다. 찬열이 낸 한숨은 그 덕에 묻혔다


"여름감기 독한데.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터덜터덜 돌아가려는 걸음을 종인이 막아섰다.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기에 뭔가 했더니 영화 예매문자였다. 개봉 전부터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바로 그 영화였다. 확 터져나온 웃음을 감출 겨를이 없었다. 어깨를 잡아끌어 곧장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 보기 앞서 꼭 주전부리를 사던 종인이었는데 어쩐 일로 멀찍이 떨어져 서 있다. 음료라도 사라는 제안 역시 거부해 버렸다. 배고프지 않냐는 물음에 잠시 멈칫하는 눈치였다.


"입맛 없어도 아플 때 더 잘 먹어야 돼. 아님 죽이라도 먹을까? 일층에 가게 있던데."


찬열의 옷깃을 꾹 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화장실을 가겠다며 절대 따라오지 말라고 덧붙였다. 우물우물 말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했다. 못 박아둔 말이 있어서 차마 쫓아갈 순 없었다. 화장실 앞에서 머뭇거리는 일이 최선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찬열 뒤로 줄을 서기도 하였다.
모자와 마스크를 피부 삼기로 했는지 상영 중에도 벗지 않았다. 기침 대신 억누르는 신음이 간혹 들려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기에 이러나 싶었다. 종인에게 신경을 빼앗겨 영화는 안중 밖이었다. 분명 느낀 점을 물어볼 텐데 무어라 답해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다행인지 종인은 말이 매우 짧았다.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들었을 뿐더러 따로 던지는 물음도 평소보다 적었다. 아프다니 분명 이해해야하는 부분이었다. 사실 찬열이 마음에 걸리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결국 그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 하고 돌아갔다.


"세 살 차이랬나."

"두 살."

"좋을 때네."

"아이구 변 할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백현은 입에 물고있던 빨대를 힘껏 뱉었다. 정확하게 찬열의 콧잔등 부근에 찍혔다. 변백현 선수, 십 점! 금메달 입니다! 지르듯 외치는 통에 카페 안 이목이 집중되었다. 제 입에서 나간 빨대가 고스란히 들어오고 나서야 그쳤다.
김종인은 21살의 여름에 꽃가루처럼 불어온 아이다. 정확히는 찬열이 가진 동물털알레르기가 계기가 되었다. 실수로 목줄에서 풀려난 종인 네 몽구는 한강을 마음껏 누볐다. 한참 뛰어다니다 허기가 질 때쯤 마침 피크닉 나온 찬열 품으로 달려든 것이다. 그가 들고 있던 천하장군 소시지가 목적이었음이다. 난리통에 나타난 피의자의 보호자는 한눈에도 어수룩하게 보였다. 목줄을 놓치지 않으려다보니 끌려가는 행색으로 연신 허리를 숙였다. 결국 찬열이 같이 잡아주고 나서야 체력 분담이 되었다. 병원비 문제로 자주 만나다보니 연을 쭉 이어나갔다. 필시 운명의 상대라고 흥에 겨워 펄펄 뛰었다. 그 때마다 백현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얼음을 양볼에 하나씩 문 백현이 종인에 관한 이야기에도 어쩐 일로 환히 웃었다. 이제야 고민상담에 제대로 응하려나 싶어 재차 물었다.


"우리 종인이가 왜 그러는 거 같아?"

"헤어지자는 거지."


꼭 쥔 주먹으로 볼을 밀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얼음을 쏘았다. 이는 또 한 번 찬열 얼굴 중앙을 향해 튀었다. 인중에 맞자 아쉽다는 기색으로 나머지 하나마저 쏠 준비를 했다. 찬열이 재빠르게 입을 틀어막아 미수에 그쳤다.


"아니면 감기가 아닐 수도 있고."


무심하게 던진 말에 직방으로 맞았다. 왜 감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눈알을 따라 백현은 입 안에서 얼음을 으깼다. 덩어리가 박살나는 소리는 제법 컸다.


"마스크 끼고, 말은 어눌하고, 유독 한쪽만 부은 얼굴에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먹는데다 가끔씩 끙끙 앓았다고. 답 나와쓰."


탁자를 경쾌하게 후려친 손이 찬열의 볼을 깊게 눌렀다. 정확히는 턱 관절 어귀였다.


"사랑니네."


순간 찬열이 심각해졌다. 백현이 찍고간 턱 끝을 슬슬 쓸던 손이 곧 멎었다. 언뜻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철컥, 결론이 도출되자마자 재빠르게 짐을 챙겨 바로 튀어나갔다. 혼자 남은 백현은 찬열이 두고간 음료를 마저 챙겨마셨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나마 메신저 답장은 오는 터라 그는 달리면서도 손을 놀렸다. 종인아 어디야. 집이죠 . 나 지금 간다. 왜 오지마요. 보고싶어. 1이 사라졌음에도 이상 받아치는 말이 없었다. 바닥에 솟아난 돌부리를 보지 못해 몸이 급박하게 내리꽂혔다. 반대편 다리가 땅을 짚은 덕에 얼굴이 갈리는 일은 없었다. 대신 핸드폰 액정이 수명을 다했다. 찬열보다 세 걸음은 앞서 나간 상태로 쩌억 벌어진 금마저 세 갈래였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급하게 주워 다시 길을 밟았다.
땀범벅으로 한참 문을 두드렸다. 비밀번호를 눌러도 안에서 잠금을 걸었는지 연신 경고음만 울렸다. 철문 반대편에 선 종인은 돌아가라고 할 뿐이었다. 이유를 묻자 안 씻어서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말만 늘어놓았다.


"너 사랑니 때문이잖아. 그치."


결국 찬열이 먼저 꺼냈다. 고동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그는 손잡이를 더욱 꽉 쥐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잊고 있었다. 종인 역시 기억하지 못할 거라 지레 짐작하여 일어난 문제였다. 그와 달리 아이는 여태 머릿 속에 박아두었다.
운명의 상대라고 떠벌리고 다녔다해서 만남이 쉽게 성사되지는 않았다. 오랜기간 지켜보며 확신을 주었다. 어느 순간 마음을 알아차린 종인은 혼란스러워 했고 찬열을 밀어냈다.
그 날은 유독 어두운 얼굴로 나타나 오래도록 침묵했다. 찬열은 묵묵히 기다렸다. 바람에 떠밀려 그네가 혼자 흔들렸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흐려지자 마침내 입을 떼었다. 사실, 저도 형이 좋아요. 좋은데 아, 잘 모르겠어요. 만났다가 만약 그런 게 아니면 어떡해요. 괜히 형만 기대하게 만들고. 근데 저 진짜 형 좋아해요.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미 모든 말을 들은 것과 다름 없었다. 종인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을 찬열은 방금 그 말로 완벽하게 다 잡았다. 자신이 생겼다.


"'정 그러면 사랑니 날 때까지만 만나줘' 라고 했잖아요."


목소리가 떨려왔다. 얼마나 담고 있었는지 들쑥날쑥하게 들렸다. 토씨 하나 틀리지않고 기억하고 있다. 위하고자 했던 말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찬열은 고개를 깊게 숙인 채로 문을 열어달라 한 번 더 간청했다. 굳게 다물렸던 철문에 공간이 생겼다. 숨을 반으로 쪼개는 순간과 같이 손잡이를 당기자 종인이 쏟아졌다. 중심을 잃은 그를 단숨에 잡아채 품에 가득 담았다. 지난 데이트에서 모자 때문에 건드리지 못했던 머리통까지 쓸어모았다. 버둥거리던 몸이 이내 옷깃을 말아쥐었다. 그 모습 그대로 집 안에 들어섰다.
품에서 떨어져나간 종인이 퉁퉁 부은 얼굴로 노려보았다. 쥐고있던 옷 안 쪽 옆구리를 슬쩍 꼬집기도 하였다. 찬열이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혹여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까 홀로 앓았을 아이가 걱정되었다가도 자꾸만 넘쳐흐르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종인은 아직 초조한 눈치였다. 옷을 잡는 손에 힘이 더해졌다. 동그란 입술 덩어리가 꿈지럭거리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다시 힘껏 껴안았다. 맞닿은 볼에서 열이 끓었다. 말랑말랑한데다 뜨끈해진 피부는 꽤 좋은 감촉이었다.


"뽑은 거야?"


어깨 부근에 이마를 대고 가만 끄덕인다. 아무래도 다 가라앉을 때까지 숨기려던 것 같았다.


"뽑은 이 가지고 있어?"

"으응. 간호사 누나가 챙겨줬어요."

"그럼 그거 심어서 나무 자랄 때까지 만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인은 찬열을 확 밀쳐냈다. 두 주먹이 명치를 힘껏 갈겼다. 현관문까지 밀려난 그에게 다시 다가가 이번에는 얼굴을 향해 내뻗었다. 찬열은 속으로 금메달을 외쳤다. 눈을 꾹 감고 가만 기다리는데 어떤 타격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가슴팍이 뜨끈해져왔다. 종인이 얼굴을 푹 기대고 있던 까닭이다. 이름을 몇 번 불러도 답이 없었다. 턱을 매만지다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그러자 몸이 움찔 떨렸다. 웅얼거리는 음성에 진동이 더해져 전신에 감겼다. 저 진짜 형 좋아해요.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날 했던 말을 조금 더 크게 굴려냈다. 찬열은 쓸어주는 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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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ㄷ 성장의식

S2015. 8. 30. 03:43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근처에 걸린 풍경이 잘게 울리며 흔들렸다. 얇은 이불 위 준면은 흐드러지듯 누워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게 오르내렸다. 주변에 아이들이 여럿 앉았다. 혹여 곤히 자는 준면을 깨울까싶어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손에는 색칠 도구가 하나씩 쥐어져 있다. 크레파스, 색연필, 마카펜 등 종류도 여러 개였다. 순간 얼굴을 푹 찡그리고 있던 한 아이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일제히 그쪽으로 시선이 꽂히며 약속이라도 한 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갈랐다. 다행히 숨을 크게 들이쉬기만 했을 뿐 깨지는 않았다. 대신 구석 자리에 누워있던 아이가 눈을 떴다. 근처에 있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은 탓에 벌떡 일어났다. 덜 깬 눈이 반쯤 감긴 채 끔뻑거렸다. 그럼에도 꽤 커다랗다.



“경수야, 쉿.”



그 중 하나가 여전히 손가락을 대고선 경수를 향해 속삭였다. 경수는 친구들과 준면을 번갈아 보았다. 베개와 이불을 양 손에 각각 들고 종종 걸어 나왔다. 아이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중간에 있는 준면에게 다가섰다. 곧 원래 제 자리인 양 베개를 놓고 눕기에 이르렀다. 잠에 드는 건 금방이었다. 준면은 아직도 깨지 않았다. 단발머리 여자 아이 한 명이 먼저 상체를 들썩였다. 그걸 신호로 동시에 곁으로 바짝 몰려들었다. 비질비질 흘러나오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각자 손을 놀렸다. 바람이 조금 더 깊숙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다들 흩어졌다. 본래 침상으로 돌아가 이불을 푹 덮어쓰거나 앉아있던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댔다. 준면 주변에는 이제 경수만 있는 셈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그림자가 곧장 다가서 준면을 흔들어 깨웠다. 눈두덩을 비집어 올린 그는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갈라진 목소리가 샜다. 상을 바르게 잡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엄마아.”


“잠깐 애들 보랬더니 네가 자고 있으면 어떡하니.”



바로 옆에 경수가 있어서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했다. 대신 허벅지를 제법 세게 때렸다. 아픔을 호소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깨서인지 뚱한 표정으로 입을 내밀었다. 원장은 준면과 얼굴을 마주한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티는 내지 않고 문을 향해 손가락을 밀었다.



“가서 세수하고 와, 얼른.”



준면이 나가자 조금 열려있던 창을 먼저 닫았다. 혹시나 자는 중에 실례를 한 아이가 없나 살펴보았다. 다행히 다들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자리 옆에 마구 어질러진 색칠도구를 주워 담았다. 정리를 다 하고 재우라 그렇게 강조를 했는데 교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다시는 준면을 낮잠 시간에 두고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얼추 정리를 끝내고 보니 벽걸이 시계가 간식 시간에 다다랐다.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뒤를 돌자 이미 일어난 원생이 있었다. 원장 쪽을 향해 앉아있다.



“경수야.”



입모양을 부러 크게 움직이며 작게 이름을 불렀다. 부름을 무시한 경수는 이내 무얼 찾는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 가까이 널브러졌던 파랑색 크레파스를 떠올린 원장이 통에서 꺼내다 주었다. 그러나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젠 아예 이불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준면이 들어왔다. 얼굴을 몇 번이나 비벼 씻었는지 새빨갰다. 아직 색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그를 발견한 경수가 그제야 밝게 웃었다. 잰걸음으로 뛰어가 준면의 다리를 모아다 꼭 끌어안았다. 다리 사이에다 얼굴을 비볐다. 준면은 원장인 제 엄마를 보았다가 손바닥만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얕은 웃음소리가 정수리를 통해 들려왔다.

간식으로는 작게 자른 밤고구마와 요거트를 차렸다. 입맛에 맞지 않는 아이를 위해서 오렌지 주스도 가져다놓았다. 종일반 선생님들이 모여 아이들에게 순서대로 배식을 해주었다. 준면은 집게로 고구마를 집어 식판 위에 하나씩 올려주었다. 받아가는 아이들 중 몇이 속닥이며 웃었다. 눈 주변에 아직 파란 원이 흐리게 남아있는 꼴 때문이었다. 저 녀석들이구만. 집게사이에 껴 있던 고구마 하나가 그만 으깨졌다.



“주세여, 경수.”



작게 들린 목소리에 앞을 보았다. 팔을 쭉 뻗어 식판을 한껏 높이 들고 있었다.



“아 미안 경수야. 자, 맛있게 먹어.”



다음 차례에서는 요거트가 놓여졌다. 양 선생님 역시 경수에게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를 건넸다. 식판에 고구마와 요거트가 다 올라왔음에도 경수는 가만 서 있을 따름이었다. 줄이 밀리자 근처에 있던 최 선생님이 아이를 잡았다. 경수야 선생님이랑 저기 가서 먹자. 허나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요지부동이었다. 식판만 가만 내려다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상황을 가만 넘겨보던 준면이 서둘러 움직였다. 주스 통을 따는 손이 다급했다.



“경수 유제품 못 먹잖아요. 전에도 다 토했구.”



뒤늦게 떠오른 특이사항에 어른들은 탄식을 터뜨렸다. 곧이어 칭찬이 쏟아졌다.



“원장 쌤 보세요. 준면이가 애들 잘 돌본다니까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들어와도 될 거 같은데.”



도마 위 고구마를 칼질하던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집이나 물려줄 것이라며 준면이 맡은 고구마 통에 조각들을 더 부어넣었다. 가까이 다가선 엄마에게 시선을 옮겨 붙인 건 잠깐이었다. 집게를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자는 각자 일에 집중했다.

배식이 끝나고 준면은 남은 고구마를 작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물론 본인 몫이었다. 원아들이 앉는 의자는 너무 낮아 대충 바닥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엄마! 요기요기.”



애탄 부름이 들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경수가 의자까지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카펫 위에 엉거주춤하게 섰다가 빠르게 아이 옆으로 갔다. 분명 받은 지 한참 되었는데 한 입도 대질 않았다.



“경수 형아 기다린 거야?”



동그랗게 뜬 눈이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대답이라 여기고 고구마 하나를 집었다. 주스를 들고 있던 경수가 얼른 고구마로 바꿔 들었다. 그리곤 준면을 올려보았다. 입을 작게 벌리니 비슷하게 벌렸다. 고구마 끝을 작게 베어 물었다. 작은 입은 그걸 또 따라했다. 그리 급하게 먹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물을 마시는 걸 보고 이번에는 컵으로 손을 옮겨 입에 댔다. 눈은 계속 준면을 보고 있던 덕에 입가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얀 옷이 금세 노랗게 물들었다.



“아유 경수야, 잘 보고 먹어야지.”



소매를 쭉 빼내어 물기를 닦아주자 아예 준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그는 안 되겠다 싶어 경수가 식판을 다 비울 때까지 바라보기만 했다. 눈을 맞추고 오물오물 먹는 모습에 그리 맛있냐며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그 때마다 꼬박꼬박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찌나 환하게 웃는지 목구멍 안쪽까지 훤히 보였다.

학교가 끝나면 향하는 곳은 어린이집이었다. 가끔씩 일손을 돕던 게 언젠가부터 고정인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달리 갈 곳이 없었을 뿐더러 아이들도 준면을 잘 따랐다. 형, 오빠 또래인 준면이 아이들에게 있어 선생님보다 편한 건 당연했다. 심한 장난을 칠 때도 있었으나 같이 놀자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중에서 경수는 특히나 준면에게 많이 의지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낯을 많이 가리다보니 말 걸기도 어려웠다.


6세 반에 새로 들어온 원생이 있다기에 인사를 하러 교실로 들어갔다. 모서리 부근에 앉아 바깥쪽을 등진 작은 등이 바로 눈에 띄었다. 다가가려하자 양 선생님이 말렸다. 이름은 도경수인데 말을 걸면 자지러지게 운다며 아까부터 쭉 저 상태라고 했다. 도로 나가려다말고 준면은 가방을 빈 서랍장 안에 넣었다. 소꿉놀이 장에서 역할 인형과 블록들을 두 팔 가득 안아들었다. 시야가 가려져 걸음이 더뎠다. 그동안 양 선생님이 알려준 이름을 입에서 반복했다. 도경수. 도경수.

종일반으로 등록한 아이들은 대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다. 엄마와 오래 떨어져있는 게 어떤 기분인지 준면은 잘 알았다. 이곳이 싫어서 우는 게 아니다. 단지 적응이 필요한 것이다.

바닥에 물건들을 죄 늘어놓고 경수 바로 근처에다 블록을 쌓았다. 어수룩하지만 반듯한 문이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인형 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복슬복슬 볶은 머리에 앞치마를 두른 인형이었다. 가슴팍에는 ‘MOM’이라 적힌 스티커가 붙었다. 목을 가다듬은 그에게서 높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똑똑똑, 경수야 엄마 왔어요.”



그제야 경수가 이쪽을 인식했다. 인형과 준면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눈 주변이 붉게 일어나 있었다. 어찌나 울었는지 볼에는 눈물길이 그대로 그어졌다. 그에 비해 눈알은 지나치게 새카매서 놀랐다. 주변이 전부 그 안에 담겨있었다. 한 번 깜빡일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역할을 잊지 않고 반복했다.



“똑똑똑, 경수야 엄마예요.”



이번에는 인형 쪽을 보지도 않고 준면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엄마라고 적힌 인형보다 준면에게 집중한 모양이었다. 울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주쳐왔다. 까만 동공에 얼굴이 그대로 비춰오자 등이 따끔따끔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일단 입을 광대에 밀어붙였다. 몇 초정도 사이가 떴다. 거짓말같이 경수의 눈이 두툼하게 접혔다. 입 모양이 동그랗게 말려서 색색 숨소리가 번졌다. 볼은 발갛게 익어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것 같았다. 자신을 보고 웃은 게 맞나싶어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경수야.”


“응!”



말을 끝맺기 무섭게 대답이 바로 붙어왔다. 등에 맺혔던 땀이 한순간에 말라갔다. 묘하게 안심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준면은 원내에서 경수에게 ‘엄마’로 불리고 있었다. 발음이 어수룩한 탓에 뭉개져 들렸지만 뜻은 정확히 통했다. 6살 아이가 초등학생 6학년 남아를 엄마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모습은 꽤 우스웠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달걀을 데리고 다니는 병아리라며 저들끼리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은 금방 지나갔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온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달리 인사조차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준면은 어린이집으로 오는 발길을 끊었다. 그 시간동안 경수는 매일같이 엄마를 찾았다. 이따 밤에 온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기다렸으나 찾아오는 건 ‘진짜’ 엄마였다. 서럽게 울 때도 있고 선생님들 뒤를 쫓아다니며 묻기도 했다. 엄마 어디 갔어요? 우리 엄마 언제 와요? 경수가 물어오는 주체가 준면이라는 걸 깨달은 선생님들은 이제 다른 말을 했다.



“엄마는 학교 갔지요. 경수도 내년에 여덟 살이니까 학교 가서 볼 수 있겠네.”



학교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크게 박힌 듯했다. 이후로는 엄마를 찾는 대신 학교에 언제 갈 수 있느냐 물어왔다. 하루하루 날짜를 세는 게 일이 되었다. 유치원 졸업식 날에 경수는 진정으로 기뻐했다. 이제 학교 갈 수 있다고 펄쩍 펄쩍 뛰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어른 손을 뿌리치다시피 하고 온 교실을 돌아다녔다. 물론 그곳에 준면은 없었다.






**






낮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어갔다. 집 안에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열어젖혔음에도 후텁지근한 공기는 계속 맴돌았다. 한 시간 전에 온다던 에어컨 기사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부채질을 할 때마다 바람과 땀이 비등하게 솟았다. 벌써 몇 명이나 집 안 온도 문제로 왔다 갔다. 쿵쿵대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보니 또 누구 한 명이 오는 듯하다. 부채질 속도를 높였다.



“아 준면 형! 이러다 쪄죽겠어!”



노크 한 번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하숙생이 불만을 토로했다. 얼굴이 벌개져서 숨을 푹푹 몰아쉬고 있었다. 민소매에 반바지를 챙겨 입고서도 더위를 이길 순 없었다. 준면은 티슈 두어 장을 가볍게 뽑아서 내밀었다.



“이참에 선풍기를 사.”


“아니 폭염주의보 쏟아진 날 에어컨을 고장 내면 어떡해!”


“야 내가 냈냐. 에어컨도 가끔은 쉬어야지 응? 그렇게 더우면 가서 등목을 하세요.”


“샤워 세 번이나 했어. 더 더워.”



그리고는 2층보다 차라리 여기가 낫다며 소파에 엎드렸다. 거의 달라붙어있다시피 하여 언뜻 녹아내린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준면이 내는 부채질 소리만 방 안에 찼다. 엎어져있던 그가 이번에는 바르게 누워 고개만 돌렸다.



“맞다 형. 내 옆방 나간지가 언젠데 청소 안 해?”



어깨만 짧게 들어 올릴 뿐 달리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부채질 소리가 공명했다. 방금 전보다 좀 더 빨라졌다. 열린 창 너머로 매미가 한참 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집 안 전체에 퍼졌다. 그와 동시에 준면이 벌떡 일어났다. 부채가 살을 때리는 차진 소리가 났다. 접힌 쥘부채를 들고 바삐 방을 나섰다. 에어컨 기사가 이제야 왔는가보다. 바깥 날씨 덥다고 도로 돌아갈 새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금쇠를 빠르게 풀어내고 급하게 당겼다. 땀은 쏟아져도 미소가 만연했다.

허나 앞에 서 있는 상대는 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심지어 교복을 입었다. 외부인은 출입금지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또 누가 친구를 부른 모양이다. 하숙생 중에 이정도 되는 또래가 있나 곰곰이 생각했다.



“누구 찾아왔어요?”



현관 벽에 몸을 기대고 물었다. 집에서 제일 어린 애라고 해도 스물은 넘었다. 혹시나 집을 잘못 찾았나싶어 나름 친절한 목소리를 냈다. 접었던 부채를 다시 폈다. 하늘하늘 지펴지는 바람이 나름 시원했다. 창문만 열게 아니라 현관을 열고 있을 걸 그랬다고 짧게나마 반성했다.



“여기 방 내놨다고 해서 왔습니다.”



인상과 달리 푹 내려앉은 음성에 부채질이 느려졌다. 요즘 학생들은 목부터 2차 성징이 오나 생각했다. 확실히 광고를 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락을 먼저 하고 오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이번 건 당황스러운 방문이었다. 옆을 보니 캐리어까지 끌고 왔다. 방을 보지도 않고 입주할 생각이었나 보다. 준면은 바깥을 마저 살폈다. 일행은 없는 듯 보였다. 코로 숨을 들이쉬고 곧장 내뱉었다.



“미안한데 고등학생은 부모님이랑 같이 와야 돼요.”



돌려보내기 위해 한 말이었다. 어제만 됐어도 돈만 있다면 당장에 내주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새 입주민을 받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짐까지 싸들고 온 노력이 가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준면의 말에 그는 어딘가 절망한 눈치였다.



“정말 미안해요. 날도 더운데 헛걸음하게 해서. 일단 방이라도 볼래요? 아직 청소를 못해갖구 좀 그렇긴 한데 어떤지는 봐야죠.”



그 말에 기운을 차린 학생은 주인 마음이 바뀔라 얼른 짐을 끌고 들어왔다. 마침 준면 방에서 하숙생이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뭐야, 기사아저씨 아녔어? 신나서 나가길래 난 또. 근데 누구?”


“이쪽은 학생이 입주하게 된다면 만날 옆 방 사람이에요. 이름은 몰라도 돼요.”


“왜 형 맘대로 그래. 안녕하세요. 박찬열이예요. 나보다 어린 거 같으니까 말 놔도 되지? 학생이 하숙하게? 

이 근처에 고등학교가 있었나. 어어 잠깐만 나 말하잖아.”



준면은 찬열을 일절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손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찬열은 거실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부엌으로 쏙 들어갔다.

겨우 한 층 차이인데도 기온이 천지차이였다. 찬열이 차라리 1층이 낫다한 이유를 이제야 이해했다. 지금 에어컨이 고장 나 그렇지 평소에는 시원하다며 괜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방 문에는 직접 적은 푯말이 걸려있었다. ‘빈 방’이라고 적힌 그것을 떼어내며 열쇠를 꽂아 돌렸다. 활짝 열었다가 얼른 다시 닫았다.



“혹시 봤어요?”



학생은 눈을 굴렸다. 동그란 머리통이 가로 움직였다. 준면은 안도하듯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퀴퀴한 냄새가 일순간 코를 찌를 정도였다. 이런 상태일 줄 몰랐다. 은근슬쩍 옆으로 옮겨와 찬열의 방을 열었다. 여기도 아수라장인 건 매한가지였으나 저쪽보다는 나았다.



“구조 자체는 비슷하니까 참고해요.”

“저 있잖아요.”



운을 먼저 띄우더니 한참 말이 없다. 방이 너무 더워서 그런가하여 창을 열기 위해 움직였다. 등을 돌리자 그제야 말을 이었다.



“계약서부터 쓰면 안 되나요.”


“그걸 부모님이랑 같이 해야 되는 거예요.”


“꼭 유효한 게 아니라도요.”



학생은 교복 밑단을 힘껏 잡아 쥐었다. 땀은 흘리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욱 답답해 보였다. 이제 보니 명찰이 없었다. 창을 여는 대신 복도로 돌아 나왔다. 마침 계단을 올라오는 찬열과 맞닥뜨렸다. 볶은 소시지와 맥주 한 캔을 들고 오던 그는 방에서 나오는 둘에게 왜 거기서 나오냐 소리쳤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답은 하지 않고 지나쳐갔다.

인쇄한 계약서에 형광펜으로 부분마다 색을 입혔다. 체크된 것만 일단 적으면 된다고 이르자 펜을 잡아 한자 한자 꼼꼼하게 채워나갔다. 물을 한 잔 떠다 놓고 옆에 서서 확인을 했다. 순간 성명 부분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자음과 모음을 나눠서 읽다가 이제는 입으로 소리를 냈다.



“도경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뇌로 꽂히는 감각이 들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찌르듯 연신 이어지던 매미소리가 이제 작게 들려왔다. 본인 이름이 들리자 바로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을 다시금 확인했다. 꼼꼼하게 살폈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나 싶을 만큼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언젠가와 같았다.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준면을 오롯이 응시하였다. 구물거리는 무언가가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목둘레에 꼭 맞게 둘러지더니 울대 부근을 아프게 눌렀다. 덕분에 말을 골라낼 수 있었다.



“전 김준면이예요.”



이름을 들어도 아이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책상을 돌아 경수 맞은편에 앉았다. 작성을 끝낸 그가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다른 부분은 다 넘기고 이름을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성명란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쓴 석자를 또 몇 번이고 되뇌었다.



“몇 학년이죠?”


“올해 2학년이요. 고등학교.”



경수는 물 한 모금을 막 넘긴 참이었다. 급하게 삼켰는지 잔기침을 냈다. 놀란 준면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팔을 기대고 등을 두들겨주었다. 한참 후에야 진정되었다. 숨을 몰아쉬던 경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감사인사를 건넸다. 아직도 등에 대고 있던 손을 얼른 치웠다. 종잇장들을 가지런히 모아 서랍 안에 넣었다. 손바닥 물기에 의해 종이 끝이 울었다. 손목 운동을 하는 양 가볍게 털어냈다.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다음에는 연락하고 오도록 해요.”



짐은 잘 맡아줄 테니 이만 돌아가라고도 덧붙였다. 현관 앞에서 준면은 부채를 건넸다. 차렷 자세로 가만 서 있자 날이 많이 덥지 않느냐 넌지시 물었다. 그제야 허리를 반으로 접어 두 손으로 받아갔다. 배웅인사는 짧았다.

방으로 돌아온 준면은 벽을 차지한 책장 전체를 급하게 뒤졌다. 구석에 세워놓은 작은 사다리까지 대고 위에서부터 찾았다. 책 사이사이를 일일이 털어냈다. 한참을 뒤적이던 끝에야 손이 멎었다. 여행 책자 속에 꽂혀있던 것은 사진 한 장이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든 준면과 환히 웃고 있는 어린 경수였다. 사다리에서 차분하게 내려왔다. 책 안에 있었는데도 먼지가 묻어있어 옷에 닦아냈다. 구석에 찍힌 날짜를 흐리게 보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준면은 서랍 안 계약서 위에 사진을 대충 덮어두었다.

1층 끝 방으로 향하다 부엌으로 방향을 바꿨다. 달그락거린다 싶더니 역시 여기 있었다. 천정에 숨겨놓았던 조미김을 꺼내왔다. 마른 반찬을 두르고 저녁을 챙겨먹는 민석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무언가 부탁이 있을 때 짓는 표정도 함께였다. 봉지를 뜯어 밥그릇 근처에 고이 올려두었다.



“바빠?”


“언제.”


“내일.”


“뭔데.”


“청소.”



젓가락이 그릇을 찢을 듯 크게 박혔다. 정수리 가운데에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파릇파릇 움직이는 모습에 종종 물을 흩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 컵에 떠다 옆에 바쳤다.



“이번 달 월세에서 돈 빼줄게.”



왼손가락 다섯 개가 버젓이 올라왔다. 준면은 고개를 저으며 나머지 셋을 접었다. 지지 않고 이번에는 네 개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턱을 검지로 톡톡 치던 준면이 그 중 하나를 억지로 꺾었다.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미소와 함께 끄덕였다. 결국 세 장으로 협상이 끝났다. 매끈한 눈매가 인상을 푹 찡그렸다. 쌀알을 신경질적으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에어컨이 돌아가자 창은 항상 닫혀있었다. 집안 분위기가 차분하게 바뀌었다. 정확히는 도경수가 이곳에 입성한 뒤부터 형성된 기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 찾아온 그는 역시나 혼자였다. 부모님이 바쁘다고 해서요. 짐 찾으러 왔어요. 캐리어를 쥐어 끄는 경수를 잡은 건 준면이었다.



“그 때 방 못 봤죠. 지금은 정리 됐는데.”



방 앞에 걸린 푯말에는 ‘도경수’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경수는 손잡이를 잡은 채로 푯말에 시선을 뺏겼다. 인기척을 느끼고 밖으로 나온 찬열이 둘을 발견했다. 뭐가 그리도 반가운지 양 팔을 흔들었다.



“오늘부터야? 밤에 좀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암튼 잘 부탁한다. 형, 우리 새로운 하숙생 들어온 기념으로 오늘 파티, 아아 나 말하고 있잖아.”



준면은 등으로 문을 닫았다. 다급하게 여느라 겹쳐 잡은 손은 들어오자마자 놓았다. 방을 편히 볼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로 단출하지만 아늑한 느낌이었다. 더 필요한 게 있다면 개인적으로 들여놓아도 상관없었다.



“잘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계약해요.”


“저 혼자 왔는데.”


“괜찮아, 괜찮아. 돈은 그 때 받으면 되니까.”



그 말에 경수가 환하게 웃었다. 눈이 둥그렇게 접히는 모양이 여전했다.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였다.

무상 거주한다는 것에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집안일에 집중했다. 주말마다 청소를 도우러 오는 아주머니께서는 요즘 집이 깨끗해졌다고 즐거워했다.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요리 솜씨 역시 제법이었다. 밤중에 옆방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딱히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도움을 주었다.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방학이라고 하기에는 경수가 집에 있는 날이 길었다. 사실상 경수가 등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되도록 무시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쓰였다. 궁금증은 날로 더해졌다. 차라리 처음에 아는 척을 할 걸 그랬다고 이불을 찬 일도 있다.




정해진 때가 되면 문을 두들겼다. 온전히 도경수가 만들어낸 시간이다. 머그컵 안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창가를 두들기는 빗소리와 어울렸다. 준면이 다 마실 때까지 경수는 반대편에 앉아있다. 이 역시 도경수가 만들어낸 공간이다.



“달다.”



경수가 작게 미소 지었다. 눈을 계속 맞춰 오는 바람에 준면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창문을 때리는 빗물이 제법 굵었다. 의자 끄는 소리에 다시 앞을 보았다. 경수는 상체를 길게 내밀고 앉아 책상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벌어지는 입이 느렸다.



“형은,”



뽑혀 나오는 목소리가 진득했다. 입 안에서 맴도는 핫 초콜릿보다 진하게 감겼다. 귀로 들린다기보다 입에서 입으로 곧장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터진 것 같았다. 컵에서 입을 떼고 주먹으로 입을 가려내 작게 기침했다.



“어땠어요?”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준면의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 귓가에 음성이 옮겨 붙었다.



“난 힘들어요. 지금도.”



경수가 더욱 가까워졌다. 밀려오는 그림자를 그대로 받았다. 까슬까슬한 촉감이 혀를 감쌌다. 목 뒤가 뻐근하게 올라왔다. 코끝이 시리다. 천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 바닥이 천장으로 솟구쳤다. 머그컵 안에 담겼던 초콜릿이 흘러넘쳤다. 넘실넘실 떠다니던 준면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왜 이렇게 답답한가 했더니 이불이 입 안에 들어가 있었다.




기묘한 꿈을 꾼 덕에 경수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끌어안았다. 부엌에서 식기들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틀어놓은 텔레비전이 거슬려 아예 꺼버렸다.

시리얼을 말아 한 입 크게 문 백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옆자리 종대를 쿡쿡 찔렀다. 데운 우유에 빨대를 꽂아 마시던 그가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백현은 개의치 않고 말을 붙였다.



“봐, 이상해.”


“모가.”



백현이 턱짓하는 곳에는 경수가 서 있었다. 싱크대에 기대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부엌과 거실을 이으면 정확히 준면과 일직선상이었다.



“나 쟤 별로.”


“못 됐네.”



백현에게 더 이상 대꾸해주지 않았다. 마시던 빨대를 빼고 그대로 들이켰다. 싱크대에 넣으려고 하자 경수가 받아들었다.



“제가 할 게요.”


“어, 안 그래도 되는데. 고마워. 야 똥 나 먼저 간다.”


“잠깐만 같이 가!”



백현은 시리얼을 양 볼 가득 구겨넣고 가방을 챙겨 나갔다. 그 사이에 경수를 한 번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기고 간 음식물을 싱크대 안에 쏟아버리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머그컵 하나를 놓고 찬장에서 갈색 통을 꺼내 옆에 두었다. 거실에 홀로 앉은 준면 쪽으로 걸어 나왔다. 경수가 가까이 왔는데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눈을 뜨고 잠든 것처럼 보였다.



“저기.”



얼굴을 가까이 내밀고 나서야 눈알에 생기가 돌았다. 초점이 맞춰지자 얼른 몸을 뒤로 젖혔다.



“어어, 어? 어어?”


“아침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직도 멍한 정신으로 부엌을 넘겨보았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소리가 싹 걷혔다. 그나마 덜 산만했다. 준면은 배를 꾹 눌러보았다. 옷 위로 판판한 모양이 잡혔다.



“난 그냥 커피.”



어쩐지 경수가 산뜻하게 웃었다. 꿈에 나타난 얼굴과 겹쳐보였다.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부엌으로 향하려는 준면을 막아섰다. 피곤해 보인다며 뜨거운 물은 위험하니 방에 가져다주겠다고 하였다. 거부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아까 텔레비전에서 떠들어대던 게 일기예보였나 곱씹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이 우중충하게 깔렸다. 창문을 열라는 식으로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와 비슷한 소리가 문 뒤에서 났다. 머그컵에 피어나는 김이 따뜻해 보였다. 경수 역시 편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컵받침에 고스란히 놓고는 반대편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준면에게 향한 눈이 퍽 부드러웠다. 꿈 때문에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것 뿐이다. 어쨌든 지금은 현실이었다. 커피를 들고 오는 일은 평소에도 잦았고, 언제나 저곳에 앉아서 빈 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별 다를 게 없었다.

커피를 입에 담은 준면은 순간 멈칫했다. 경수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담겨있었다. 아주 천천히 삼켜냈다. 커피가 너무 달았다. 빗방울이 더 거칠어졌다. 언뜻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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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그대와 나의

S2015. 8. 30. 02:50






입술 위를 유연하게 흐르는 손가락에 집중했다. 시선이 딱 박혀버렸다. 뚝뚝 끊어진 마디가 굽혀지나 싶더니 올곧게 섰다. 그대로 아랫입술을 꾹 눌러 잇새로 파고들었다. 참으로 몹쓸 버릇이다. 배고픈 아이가 어미젖을 찾듯이 종인은 간혹 손가락을 물었다. 의식 없이 하는 행동이기에 눈은 풀려있다. 흐린 초점 안에 무엇을 잡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 이룬 전체는 참으로 아슬아슬했다. 감히 표하기 어려운 감정이 불쑥 들 때가 분명 있었다. 꽤 위험한 흐름에 속했다. 그 때마다 찬열은 아예 눈을 돌려버렸다. 감아버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동요가 심하게 일어난다 싶으면 숨을 크게 들이쉬어 호흡을 골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울렁임은 여전했다.

저 손가락은 왜 매번 입에 달라붙어 있는가. 거슬린다고 해서 어찌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관심을 끊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힘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종인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때마다 손가락은 입술을 꾹 누른 채였다.

안무 연습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종인은 소파 위로 퍼졌다. 어찌나 피곤한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안쓰러움에 다들 한 번씩 그의 등을 살살 두드려 주었다. 끝으로 준면이 머리를 헝클어뜨리자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샜다. 종인아, 씻고 자야지. 덧붙이는 말에는 대답이 흐렸다. 이제 막 방으로 들어서려는 찬열을 준면이 불러 세웠다.



“가는 김에 데려가.”



말만 던져만 놓고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잠시 멈춰있던 그는 가려던 길을 마저 밟아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옷을 편하게 갈아입은 찬열이 소파 근처로 다다랐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편한 자세를 찾아다니는 듯 했다. 뒷머리를 몇 번 벅벅 긁더니 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벌써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둥그런 뒤통수와 마주한 상태로 가만 노려보았다. 아까 준면이 한 것처럼 손을 머리에 가져다댔다. 가볍게 흩뜨리면 되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직 닿지도 못했는데 손끝이 멋대로 떨려왔다. 그가 앉은 곳만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주변 공기를 다 삼킬 것처럼 입을 벌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떨림이 어느 정도 멎었다.

숨 쉬는 소리가 제법 컸던 건지 종인이 뒤척였다. 동시에 머리가 돌아가며 손바닥 아래에는 이제 눈코입이 자리했다. 굴곡진 이목구비에 놀라 기도가 열린 게 분명하다. 순간 사레가 들어 거실 한 가득 기침 소리가 찼다. 덕분에 종인이 깼다. 두툼한 눈두덩이 한 번, 또 한 번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찬열은 손을 거두며 아무렇지 않게 종인을 불렀다. 그제야 현실에 다다른 종인이 한 쪽 팔을 앞으로 길게 뻗었다. 혹여 다칠까 팔은 지지대로 삼고 몸통으로 손을 넣어 일으켰다. 바르게 앉은 종인은 이제 양팔을 건넸다. 아이같은 행동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안쪽 볼을 눌러 씹어 간신히 표정관리를 했다.



“애냐.”



정수리를 다 덮어 두세 번 흩어냈다. 방금 전까지도 그리 어려웠던 행동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또 다시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뒤를 돌았다. 손이 전보다 더 심하게 떨려왔다. 주먹을 쥐어도 여전해서 목에 감았다. 종인은 곧 붙어왔다. 기다란 상의 뒤쪽을 겨우 꼬집어서 끌려오는 중이었다.

몇 걸음 만에 방에 도착했다. 침대에 슬금슬금 기어 올라간 종인은 몸을 완전히 웅크렸다. 달리 인사는 없었다. 찬열 역시 침대에 누워 이어폰을 꽂으려던 차에 옆으로 손가락이 들어찼다. 흔들리는 모양이 그를 부르고 있는 게 확실했다.



“형 혹시.”



아니나 다를까 잠기운이 역력한 목소리가 운을 띄웠다. 길게 들어찬 사이가 조심스러웠다. 찬열은 손가락을 가만 응시하며 초를 셌다. 잠들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길었다. 덕분에 손바닥은 식은땀이 가득 차올랐다. 마침내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저한테 뭐 화난 거 있어요?”



초가 딱 멈췄다. 가지런했던 눈썹이 일순간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찬열은 모든 행동들을 다시 되짚었다. 어디서 도출된 의견인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잠꼬대로 소리친 게 아닌 이상 그럴 일은 없었다.



“없어 그런 거. 누가 그래?”

“다행이다아.”



나는 형이 요즘 저 계속 노려보고 있어서 뭐 화난 거 있는 줄 알았어요. 의식이 잠에 밀려 끝은 거의 웅얼거리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뜻은 맞출 수 있었다. 피가 쏠린 손가락은 끝이 붉게 달았다. 찬열은 속에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숨과 함께 뱉어냈다. 형체 없는 그것은 주변을 떠다니며 열기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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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ㄷ 경수야

S2015. 1. 12. 23:59





경수야. 경수야. 그렇게 딱 두 번 불러왔다. 웅웅대던 목소리가 가라앉을 쯤에 이번에는 똑똑하고 잘게 두드렸다. 아주 성가신 일이었다. 불이 다 꺼져있음에도 그는 실례라는 걸 몰랐다.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그리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러면서 이어진 말은 더욱 황당하였다. 줄게 있어서 그래. 이것만 받아줘.
대체 뭘 준비한 건지 애타는 목소리다.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가만 둘 수도 없었다. 머리 끝까지 덮었던 이불을 걷었다. 굳게 걸어둔 잠금쇠를 돌렸다.
하얀 손이 불쑥 끼어들어 허리를 꺾어서 피했다. 혹여 닫을 세라 꾸물꾸물 움직이며 틈을 만들어낸다. 그 뒤편에는 손등과 같이 희여멀건한 면상이 둥실둥실 떠 있다. 새벽 바람에 얼마나 난도질 당했는지 코끝이 시뻘갰다. 손끝 역시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창을 닫으면 마디 모양대로 깨져버릴 것 같다.
멀쩡한 현관을 두고 힘겹게 창문가에 머물렀다. 쉽게 예상하기 어려운 사고체계였다. 김준면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어쩌면 이 행보를 이벤트라 여길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까지 미쳤다.
줄 것만 주고 가라는 심상으로 창문 반의 반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리를 넓히기 위해 힘을 싣고는 있다. 그래봤자 악력에서 이쪽이 한 수 위다. 굽혀줄 생각은 없다.
가뜩이나 추위에 약한 그가 먼저 물러났다. 물러난 건 마냥 손만이 아니었다.


미안해.


뭘 잘못했는지 알고나 말하는가 의심스럽다. 그래도 내미는 상자는 곱게 받았다. 때문에 틀에 조금 더 사이가 생겨났다. 아까와 같이 팔을 쑥 들이밀어온다. 이번은 보다 깊었다. 어깨까지였다. 안으로 기어들어올 기세다.
길을 터주었다하여 기분이 벌써 풀린 건 아니었다. 도로 닫았다. 닫으려했다. 허나 이미 들어찬 어깨는 비켜줄 생각이 없이 보였다.


경수야, 들어 봐. 형이 잊은 게 아냐.


늘어놓은 건 또 변명이었다. 안쪽이 울렁거린다. 받아들일 한계치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출렁였다. 내가 이토록 속이 좁은지도 오늘에야 깨달았다. 이게 다 김준면 덕분이다.


알았어요. 줄 거 줬으면 그만 가요.

아직 남았어.


비장한 얼굴로 반대 손을 뒤적여 핸드폰 화면을 켜 보였다. 58이었던 숫자가 마침 59로 올라섰다.


제일 마지막에 축하해 주고싶었어. 생일 축하해, 경수야.


걱정했던 일은 현실이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이벤트로 여기고 있다. 어깨를 밖으로 힘껏 밀어버리고 문을 도로 굳게 잠갔다. 경수야. 경수야. 부르는 목소리를 아예 무시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새 13일이 되었다. 아무것도 못했는데 생일이 끝나버렸다. 허탈함에 웃음이 나온다. 계속 울릴 것 같던 목소리도 잦아들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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