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그림자

S2015. 12. 7. 04:12

140621





나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선배는, 그림자도 참 잘생겼네요.”


앞서 걸어가던 발이 박자를 놓쳐 어긋나는 모양을 가졌다. 얼핏 넘어질 뻔했다. 내가 재빨리 기타 가방을 붙잡은 덕에 선배는 다시 곧게 설 수 있었다. 그럴 리 없는데 그 등판을 다 차지한 기타 가방 안에서 현이 팅팅 튕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딱 벌어진 어깨임에도 끈이 흘러내려 다시 고쳐 메기도 했다. 혹여나 잃어버릴까 귀퉁이에 적어 놓은 이름이 마침 눈에 띄었다. 박찬열. 이름까지 잘생겼어요. 옆에 새겨진 열매 그림은 내가 그려준 것이다. 동글동글 귀여운 열매. 
찬열 선배가 우뚝 멈춰서 나도 따라 멈췄다. 땅만 보고 있던 터라 그 잘생긴 그림자가 내 것과 겹쳐지는 순간을 보았다.
한 템포 쉬었다가 아주 느리게 돌아보는데 귀신이라도 본 눈알이다. 목젖이 꿀렁이는 것이 딱 보였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작게 말했다 생각했는데 반응을 봐서는 아니었다. 불에 달아오른 솥뚜껑에 손을 대 아픔이 서서히 느껴지는 것처럼 번져났다.
허, 김종인 이 미친놈. 둥그런 뒤통수에 넋을 잃었던가보다. 아니면 걸을 적에 교복 바지 겉으로 나타나는 다리 선에 홀렸던가. 스스로를 꾸짖어도 이미 말은 튀어나간 뒤였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그를 지나쳐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렀는데, 그건 뼈가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일기장에 써야겠다. 오늘은 김종인이 미친 말을 지껄인 경사스러운 날이다. 씨발.


“너, 너도 잘생겼어.”


이번에는 내 발걸음이 어긋났다.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 중심을 잡고 얼른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엄청 어색하게 입을 쭉 찢어 웃고 있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여기서는 뭐라고 받아쳐야할지 모르겠다. 내 거지같은 말에 고맙게도 해준 대답이다. 나 역시 거기에 맞는 어떤 응답이든 빨리 하고 싶었다.


“네? 이거 이번에 쓸 노래 가사인데.”


씨발. 하필 해도 이딴 말만 골라나온다. 말 좀 곱게 하면 뭐가 덧나기라도 하냐, 김종인 새끼야! 정신은 몸을 수도 없이 채찍질했다. 
찬열 선배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발개져갔다. 저것마저 한숨 나오게 잘생겼는데 또 헛소리 내뱉을까 두려워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걸었다. 점점 사이가 벌어져간다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쪽팔려서 며칠 동안 선배 얼굴 못 보게 생겼다. 그게 또 억울해 이번에는 마구잡이로 달렸다. 아무리 달려도 자꾸 날 따라오는 내 그림자에 괜히 화를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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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안부

S2015. 12. 7. 04:08

140619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종인이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들린 말이었다. 상황이 제대로 인지가 되지 않아 몇 번 더 끔뻑였다. 앞에 자리한 물체들이 가진 색 전부가 기괴하게 엉켜 보여 차라리 다시 감아버릴까 했다. 뻐근함에 손목을 돌리자 따끔한 감촉이 쓸려왔다. 등줄기가 싸하게 저려왔다. 어쩐지 뒤로 돌려진 팔이 불편했다. 손가락을 길게 내어 근처를 더듬었다. 밧줄이 잡혔다. 묶여있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위험을 감지한 차였다. 굳어진 온몸이 감각을 세웠다.
목소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장식장도 없어 바닥에 덩그러니 놓였다. 생김새는 꽤 구식이었다. 시꺼먼 색이라 덮여있는 먼지가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안에는 녹음된 테이프가 들어있는 듯하였다. 문장이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낮은 음색이다. 잘 지낸다는 그의 말이 들릴 적마다 자꾸 소름이 돋았다. 
눈과 입은 자유로웠다. 단지 움직일 수 없을 따름이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그저 좁고 평범한 집으로 보였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묵힌 빨래 냄새가 같이 났다. 베란다 문은 닫혀있었지만 이른 햇살인지 노을인지 모를 빛도 쬐어 들어왔다. 시계 초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목소리가 모든 소음을 잡아먹었다.
귀가 얼얼하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작은 파열음과 함께 말소리가 멈췄다. 테이프가 안에서 꼬인 것 같았다. 고요함이 단숨에 공기를 잠식했다. 지금이 더욱 두려워졌다. 종인은 이를 꽉 물고 눈알을 바삐 돌렸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탁자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집으로 들어왔다. 굽힌 다리 사이에 머리통을 비집었다. 마치 이리 하면 상대 쪽에서 보지 못하고 넘어가리라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럴 리 없었다.


종인아, 잘 지냈어요?


막지 못한 귓구멍으로 음성이 구겨 넣어졌다. 라디오에서 죽어라 흐르던 그 목소리였다. 기계를 통하지 않아 더욱 분명히 박혔다. 날고기에서 나는 비린내가 함께 번져났다. 거뭇한 팔다리에 작은 돌기들이 돋아났다. 두려움을 응집한 동공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오랜만이에요. 커다란 입이 벌어지며 다른 문장을 뱉었다. 몇 시간 만에 듣는 새로운 언사였다. 어딘가 불편한지 종인은 몸을 배배 꼬았다. 분명한 것은 그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이 목젖을 타고 꿀렁꿀렁 넘어왔다. 차마 쏟아내지 못해 입 안에만 가득 차올랐다.
남자가 종인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어찌 피할 새도 없이 엄지로 턱을 벌려내 혀를 밀어 넣었다. 팍하고 터진 것은 남자의 살덩이만이 아니었다. 꾹 막고 있던 입이 억지로 벌려져 가득 찼던 것이 단숨에 폭발했다. 피 섞인 가래를 죽 끓어다 바닥에 냅다 뱉었다.


박찬열, 이 씨발 새끼야!!


종인에게서 떨어져 나온 찬열은 시뻘건 핏물을 뚝뚝 흘렸다. 오른손으로 자기 입을 막아섰다. 사이로도 흘러내렸다. 꽤 깊게 씹은 모양이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는 종인을 덩그러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또 가만 웃었다.


다행이다. 잘 지냈나 봐요.


목소리가 허공에 떠다녔다. 날이 잔뜩 서 있는 그것은 망설임 없이 종인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안쪽에서부터 그를 베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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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작별

S2015. 12. 7. 04:03

140618





눈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두 사람은 다정하고 두 사람은 충분하다.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는 낮이었다. 두 사람은 무정하고 두 사람은 젖어있다. 시선은 각자 달리 흘러다녔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물줄기가 자꾸만 얼굴을 타고 내려와 눈살이 절로 구겨졌다. 한 발 뒤로 빠져나왔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느 때와 겹쳐보이는 지금에 종인은 푸스스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처음 만난 장소에서 마지막을 떠낸다. 앞이 흐려 보였다. 어떤 말을 건네야할지 몰라 그저 웃었다. 곧 그도 따라 웃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미소였다. 여태 있었던 모든 것을 단숨에 끊어내는 형태였다. 그대로 돌아 멀리멀리 흐려져갔다.

종인아.

목소리가 고요히 떨어졌다. 그건 눈송이와 함께였다.
 
부름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종인은 혀에 닿는 물방울을 씹어넘겼다. 아무 맛도, 식감도 느껴지지 않을진데 부러 인상을 찌푸렸다. 곧 텁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듣는 이가 없어 금세 땅으로 꺼져갔다.


잘가
.
.
.
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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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한낱

S2015. 12. 6. 01:04






밀어닥친 충동은 쉬이 누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찬열은 이미 눈이 마주쳤고, 그것은 입을 벌려 비명을 쏟아냈다. 공포보다 고동이 앞섰다.

밤바다는 물이 차가웠다. 바위는 생각보다 깊은 곳에 자리했다. 정강이 정도 올까 여긴 생각과 다르게 사타구니까지 닿아 찰박였다. 그럼에도 무작정 나아갔다. 어깨에 걸치고 나오는 순간은 정말 아찔했다. 의지를 담은 몸부림 때문에 고꾸라질 뻔한 다리를 몇 번이고 다잡았다.

물 밖에서도 다행히 숨을 쉬었다. 단지 간헐적인 호흡이었다. 간혹 지르는 소리가 고막에 확 꽂혔다. 고통이 만만치 않은 듯했다. 찬열은 계속 조금만 참으라며 중얼거렸다. 틀어막고 있는 손바닥 전체에 꿀렁거리는 촉감이 느껴졌다. 하필 흰 셔츠라 다 묻어났을 것이다.

가로등 불빛에 어렴풋이 살폈을 때도 상태가 심각했다. 사람으로 치면 왼쪽 대퇴부쯤에 덮인 비늘이 아예 다 벗겨졌다. 별장까지 이고 와 일단 욕조 안에 담갔다. 낚싯줄이 미처 제거되지 않은 바늘에 의해 죄 갈려나갔다. 찬열은 피에 푹 절여진 옷을 벗어내 그것에게 물려주었다.



“좀 아플 거니까.”



살을 조금 더 벌려내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꽉 조여든 동공이 잿빛으로 차 있었다. 비명은 아가미를 통해서도 터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어깨에 귀를 뭉개며 작업에 집중했다. 들썩이는 몸뚱이 때문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타일은 물론 찬열의 얼굴 역시 붉힌 듯 빨개졌다. 제 입가에 묻어난 시뻘건 진물을 혀로 훔쳐냈다. 바다에서 사는 생물이라 그런 지 짠맛이 강했다.

손목에 둘둘 말아놓은 낚싯줄이 제법 길었다. 얼마나 되는 대어를 낚으려 한지 몰라도 바늘 크기가 한 뼘은 되었다. 둘은 한참동안 숨을 골랐다. 물려둔 셔츠는 입에서 빼내어 저 구석으로 내던졌다. 짓이겨져 튀어나온 살이 끔찍한 모양새를 가졌다. 찬열은 그 큰 손으로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고는 마구 흩뜨렸다.

소독액과 거즈를 한 가득 들고 와 욕조 근처에 두었다. 달리 쓸모는 없었다. 그새 상처가 싹 아물어 있었다. 당황에 찬 얼굴을 빤히 보던 그것은 무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빠끔거렸다. 물 끓는 주전자에서 들릴 법한 조음만 났다. 뜻을 알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 꿇어 앉아 틈을 붙였다. 욕조에 올린 손을 가만 내려다보더니 곧 눈을 감았다. 소식도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바늘 끝에 비벼져 달아올랐던 살갗이 금세 아물었다.

찬열이 웃자 그것 역시 따라지었다. 벌어진 잇새에 뾰족하게 걸린 이빨이 눈에 띄었다.

인어에 대한 목격담은 종종 돌았지만 전부 구전되어올 뿐이었다. 그런 식이라도 망망대해 정도는 나가 주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인어.”



직접 눈으로 보고 있어도 현실성이 덜하여 입으로 내보았다. 소리는 제 모습을 갖추기도 전에 부서져 수면 위를 울렸다. 가장 밑바닥에서 헤엄을 치고 있던 그것이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찬열은 제법 실하게 생긴 생선을 덥석 집어 물속으로 던졌다. 낚아채는 순간과 같이 찬열은 타일 바닥에 드러누웠다. 수영장이 수조로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대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잠깐이지만 분명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만일 인어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우습게도 그런 상상 따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마저 아까웠다. 존재가치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매기는 일만도 벅찼다.

—예술가라는 양반이 그래 갖고 먹고 살겠남.

혀 차는 소리가 아까울 정도로 찬열은 정말 잘 먹고 잘 살았다. 공상 속 이미지를 제외하고도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소재는 지천에 널렸다. 비아냥거리는 말을 비평이라 둘러대며 찔러대는 꼴이야 이쪽에선 흔한 일이었다. 모두들 한마음으로 떡잎부터 짓밟아준 덕택에 이 악물고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렇게 몇 해를 버텼다. 찬열은 지쳐있었다. 이제 그만 하자. 간지러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별장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하염없이 응시하였다.



“이제 그만 할까.”



마침내 눌러온 대답을 냈다. 쥐었던 붓이 바닥으로 떨어져 창문 근처까지 굴렀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바닷바람이 살을 에워싸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오는 내내 멈추지 않고 들리던 웃음이 일순간 비명으로 변했다.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잠자고 있던 몸을 뒤흔드는 감각이었다.

맨발에 모래더미가 푹푹 박혀 들어왔다. 가까워질수록 그 끝에서부터 전율이 감겼다.

넘쳐흐르는 숨결 너머로 마주한 인영은 흡사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마주친 눈알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저 내지르고 있을 뿐인 목청에서 그는 뜻을 알아차렸다.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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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첫 눈

S2015. 11. 29. 00:35






제법 몸놀림이 가벼운 아이였다. 뼈대가 가늘어 붙어있는 살이 적은 탓이다. 유난히 마른 발목뼈가 걸음을 잴 때마다 도드라졌다. 날이 매서워져도 바짓단은 발목 어귀를 맴돌았다. 심지어 신발 속은 감싼 천 하나 없이 살과 꼭 닿았다. 양말을 신지 않는 특별한 이유를 물으니 답답해서— 라는 단답만 돌아왔다.

대화에 있어서 덧붙이는 말을 귀찮아했다. 덕분에 잘못을 한 경우에 핑계를 찾거나 변명을 늘어놓는 일이 없어 좋았다. 무언가를 저지르면 곧 시인했다. 빙빙 돌린 말이 싫다며 끝에는 꼭 그래서 요점이 무엇이냐 물었다. 질문에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아저씨는 눈 싫어?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세찼으나 결정이 뭉치기에는 성에 덜 찬듯했다.

나무 바닥에는 종인이 끌고 들어온 물 발자국이 선명했다. 비에 젖은 정수리 위에 수건을 올려주자 몇 번 털어내고 턱에 꾹 묶어냈다. 파르르 떠는 윗입술이 눈에 잡혔다. 뜨끈하게 데운 우유를 건네주었다. 얌전히 두 손으로 받쳐 겨우 한 모금만 넘기고 탁자에 올렸다. 아직 물기 어린 발바닥이 향한 곳은 창문 근처였다. 딱 달라붙어 유리 위에 뜬 숨을 불어냈다. 종인에게 딱 맞는 캔버스가 만들어졌다. 손가락을 세워 작은 점들을 여럿 찍었다. 곧 손바닥으로 밀어 닦고는 얼른 눈이 오면 좋겠다며 눈을 빛냈다.

대답 없이 가만히 앉은 행동이 마음을 비뚤어지게 했나보다. 순식간에 변한 음색이 답을 재촉했다. 그렇다, 아니다 둘 중 하나만 말할 수 있다.



“눈이 왜 싫어.”



굳이 따지면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쪽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대강 얼버무렸다. 12살 종인에게는 궁금한 일이 참으로 많았다. 왜, 라고 물어도 달리 이유가 없었다. 마침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종인 몫으로 따른 우유로 목을 축이고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 종인이 네가 항상 올라가는 나무 보여? 아저씨가 아끼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눈이 너무 많이 쌓이면 네가 올라갈 수가 없잖니.”

“그럼 나뭇가지 부러뜨릴 일 없어서 더 좋잖아.”



예전에 한 번 혼났던 일이 떠올랐는지 입술을 죽 내밀었다. 종인은 한순간에 그늘에서 벗어나 탁자 앞으로 달려갔다. 남은 우유를 빠르게 들이키더니 곧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따라 나섰을 때는 이미 시야에서 흐려졌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아이는 언제나 갑자기 찾아왔다가 갑자기 가버리고는 하였다. 집에서는 할 일이 없다면서 요일을 정하여 찾아오던 그가 이후로 발길을 한참이나 끊었다. 아저씨 집은 넓고 따뜻해서 좋다는 말에 아이를 위해 따로 만들어놓은 방도 찬기만 내렸다. 헤집어 놓은 이불 모양 역시 그대로였다.

찬열은 줄곧 현관을 활짝 열어두었다. 며칠 째 내리는 비에 복도까지 스며들어 물이 고였다. 그럼에도 닫히는 일은 없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정확히 새벽 3시 반이었다. 어떤 간 큰 잡도둑인가 싶어 구석에 놓인 방망이를 집어 내려갔다. 계단을 막 밟아 올라오는 인영은 생각보다 작았다.



“아저씨—.”



작게 떨리는 목소리는 분명 종인이었다. 찬열은 재빨리 거실을 전등을 켜고 종인 앞으로 가 꿇어앉았다. 피곤이 가득한 눈은 불안하게 깜빡거렸고 입술은 퍼렇게 질려있었다. 발등은 살갗이 다 붉게 일어나 까졌다. 급하게 달려온 듯 색색 내쉬는 숨에 입김이 서렸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밖에 눈 와서.”



나무 잘 있나. 찬열은 종인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끌어다 품에 꾹 안았다. 벌벌 떠는 작은 몸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열려있는 문으로 작은 눈송이가 날아들었다.

올해 들어 처음 맞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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