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발화점

S2015. 12. 7. 04:46

140708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나는 그렇게 고향에 다시 와 있었다. 산 너머에 머물던 바람이 단숨에 앞으로 당도했다. 며칠 전에 눈이 내렸었는지 흐려진 주변이 약간 부수어져 보였다. 잘게 갈린 흙더미는 얼음 밭 위에 흩뿌려져 있기도 하였다. 떠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어라 쉽게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냄새가 풍겼다. 이건 오직 이곳에서만 맡을 수 있다. 숨을 크게 들이면 코끝에서 금방 흩어져버리기 일쑤였다. 안타까움마저 일었다.억울함은 공기 중에 맺혀 떠다니고 타다 남은 재가 곳곳에 덮였다. 시야를 닫지 않아도 당시 장면들이 눈길이 닿는 곳곳에 떠오른다. 비명으로 점철된 공간에 갇힌 여러 명은 오직 한 목소리를 내었다.
도저히 기억더미에 쌓아두고 싶지 않았다. 귀청이 터질 듯 맴도는 웅성거림을 밖으로 밀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진정으로 깨달았다. 실을 아무리 끊어내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시작점으로 돌아가 다시 말아 올리면 된다. 골 안쪽이 언뜻 뒤흔들려왔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채 가지만 쭉 내뻗은 나무가 여러 모양으로 하늘거려 보였다. 

도망 가. 카이야, 도망 가! 정신을 휘어 감는 그 목소리들은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을 따라 울렸다. 전에는 밖을 향해 넓게 찍혀있었다면 지금은 안쪽으로 좁게 찍혀간다. 걸어가고 있는 길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어린 나는 겁에 잔뜩 질려있다. 상기된 두 볼과 눈 알갱이들을 묻힌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흰자는 벌겋게 떴지만 한 번 깜짝이지 않았다. 꾹 다문 입 모양이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필시 저주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죽인다. ‘불’을 드러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이미 완전히 뒤로 넘어가 보이지 않는 어린 나의 음성이 얼핏 들려왔다. 이건 현재에 사는 나에게서 끌려올라오는 고함이었다.

우리 집안은 숨어 살아야했다. 도망 다녀야했다. 타 능력자들이 내모는 압박을 이기기 어려웠다. 고작 너희와 우리의 힘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삶 자체에서 내쫓겼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가진 각 능력을 열고 잠글 수 있다. 그렇기에 흩어진 공간을 모아서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을 밟아 움직인다. 아마 그게 그들 입장에서는 위험하게 느껴졌을 것이라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 날, 모든 게 타올라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부지 앞에 섰다. 하늘에서 내려온 새하얀 결정들에 푹 덮였는데도 탄내가 코를 찔렀다. 콧속이 아려올 지경이었다. 무릎을 내려 땅을 덮은 흰 덩어리들을 손바닥으로 주욱 쓸어냈다. 그을린 나무판자가 드러났다. 남아있던 부족 핏줄은 단 한명을 제외하고 전부 이 밑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완전히 털어내자 몸을 드러낸 큰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을렸지만 확실히 남아있다. 까맣게 태운 잿가루가 어떠한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후후 불어 형태를 자세히 만들었다. 초점을 다시 잡고 봐도 같은 모양이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다.
뒤집힌 삼각형 안에 꽉 들어찬 눈동자, 우리 능력을 묶어 한 곳에 가두게 하는 문장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을 줄이야. 어떤 게 된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건 부족 내에서 다들 쉬쉬하는 절대적 기밀이다. 그걸 도대체 이들이 어떻게.
어릴 적 기억이 재조합 되어갔다. 뜻을 알 수 없는 언어들이 훅 모여들어 고막을 찌를 듯 웅성거려왔다. 해방되지 못한 자들이 앞에서 제각기 내지르고 있음이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라야했다. 
직각으로 꺾어 아예 부숴버렸다. 한순간 공간에 꽉 차 머물러있던 바람이 사방으로 터졌다. 여태까지 영혼마저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다 이제야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것이다. 
더욱 분명해졌다. 이 그을음으로 봤을 때 확실히 ‘불’이 한 짓이다. 우리 부족을 전부 잡아다 죽여 놓은 것도 모자랐는지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우리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핵심인물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그 무엇도 묻지 않을 것이다. 불을 잇는 후계자가 전부 책임지게 할 생각이다. 

“어머니, 아버지.”

성대가 잠겨있어 약간 떨려왔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땅에 댔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뵙지 못하였다. 그대로 이마를 내렸다. 찬 기운이 가득 차올라왔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줄곧 기다려왔을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응축된 물이 옷에 녹아 스며들어왔다. 몇 번이고 다잡았던 마음이 여기에서 굳건해졌다.

“누나도 오랜만이야.”

몸을 일으켜 고개를 길게 꺾어 올렸다. 부연 검은 색이었던 하늘 저 끝에서 허연 가루가 소리 없이 춤을 췄다. 서서히 내려오는 눈이었다. 조금 더 두텁게 감싸안아줄 것이다.
불 후계자는 곧 진정으로 그들을 이끌 수장에 오른다.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소리 내어 불렀다. 찬열. 너를 찾아 반드시.
머지않아 모든 소리는 눈밭에 묻혔다.






'S'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ㅊㅈ 선배는  (0) 2015.12.07
ㅊㅈ 한낮의 기차  (0) 2015.12.07
ㅊㅈ 3평생일  (0) 2015.12.07
ㅊㅈ 잡은 손  (0) 2015.12.07
ㅊㅈ 엇갈린  (0) 201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