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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카이짱팬 서막.

L2014. 5. 7. 23:13

※본 내용은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픽션입니다.

 

 

 

 

 

 

누군가를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한 순간 마주친 것만으로 사랑하게 됐다는 꿈같은 이야기는 믿어주면서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한 번 본 것만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는 비웃다니 말이 안 되죠.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도 사랑이에요. 사랑은 평등한 겁니다.

-타블로, 꿈꾸는 라디오 中.

 

 







언제가 처음이었더라. 정확한 날짜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분명 텔레비전 채널을 수도 없이 돌리고 있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것들만 골라할 수가 있나하는 마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그 때 했던 그 프로그램은 일요일 아침 고정프로였으니까. 아무튼 케이블까지 쭉 돌고 다시 공중파에서 헤매던 때였다.

열심히 위쪽 화살표만 누르고 있던 터라 순간 지나갔던 얼굴에 멈칫할 새도 없이 채널이 넘어갔다. 헐? 방금 뭐였지? 내가 뭘 본거지. 혹여나 방금 나왔던 장면이 지나갔을까싶어 서둘러 아래 쪽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그 얼굴은 아직 앵글을 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얼굴에 넋을 놓은 건 처음이었다. 이국적인 생김새에 놀랐고, 저리 잘생길 수 있나싶어 두 번 놀랐다. 물론 호불호가 강한 상이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완전 내 취향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혼을 앗아갔다.

출연진들이 짤막한 연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런 데로 재미도 뽑아냈다. 끝난 후 광고로 넘어갔음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참 뒤 현실성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불렀다. 이봐, 학생. 방금 네가 본 연예인은 남자야. 그리고 너는?

 

 

“남자......”

 

 

처음은 실수였다고 치부할 수 있다. 현실이 날 구원해주었다는 생각에 악수를 청하였다. 며칠 후에 그 손이 뺨을 후려치리라고는 가만 있다 얻어맞은 현실도, 심지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평일 저녁이었다. 흥밋거리라고는 두피 때만큼도 없는 시간대다. 거실 바닥에서 관자놀이를 기대어 누웠다. 슬슬 지겨움을 못 이기고 한 예능프로그램 재방송에 멈추었다. 그리고 또 만났다. 아니, 아니 만난 게 아니라 보았다. 머리 스타일은 바뀌었지만 확실히 그 때 그 남자다. 제법 큰 눈으로 카메라를 계속 응시하고 있다. 옅게 미소를 띠고 있기도 했다. 전체 패널들이 잡혀있을 때도 유독 한쪽으로만 시선이 쏠렸다. 그 남자는 마치 카메라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응시하듯 계속 쳐다보았다. 화면에 잡힐 때마다 언제는 안경을 쓰고, 또 언제는 쓰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저 연예인은 정신없게 왜 저러냐했겠지만 나는 여지없이 넋을 놓았다. 미친 사람이었다. 어떻게 안경을 쓴 것도, 안 쓴 것도 둘 다 잘 어울릴 수가 있나.

 

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두 번이나 정신을 뽑아간 저 남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당장에 검색창을 켰다. 연예인이다 보니 인터넷에 정보가 자세하게도 나와 있다.

정체는 비교적 단순했다. 가수였다. 그것도 아이돌이다. 몇 번 들어봤던 그룹이기도 했다. 인원수가 많아서 인터넷 기사로 접해본 게 다인 그런 그룹이다. 세상에, 내가 아이돌을... 그것도 남자 아이돌을... 손이 떨리다 못해 이젠 두 다리까지 달달거렸다.

심호흡을 하고 침착하게 아이돌 그룹 팬 카페를 검색했다. 왠지 여기까지는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럼 그럼. 여자들도 가끔씩 보면 여자아이돌 좋아하잖아? 그거랑 똑같은 거야. 그럼 그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아이돌이 좋아서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식 없이 일단 가입하기 버튼을 누른 것에 대해서는 딱히 얹을 변명하지 않겠다.

그런데 가입 절차에서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닉네임을 설정하라고 한다. 박찬열...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아 공지를 읽어봤다. 실명은 안 된다고 쓰여 있기도 하니 뭔가 무난하게 흘러가는 그런 것이 필요했다. 그 애 이름이 뭐더라. 김종인. 마음속으로 낸 질문에 누군가가 번쩍 대답을 했다. 어떤 정신머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고오맙다.

종인까지 썼다가 얼른 지워냈다. 그러고 보니 본명과 활동명을 달리하는 사람이었다. 괜히 본명으로 해놓으면 진성팬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그냥 책상에 머리를 박고 손가락만 놀려서 자판을 쳤다.

 

가입이 끝났다. 이렇게 카이짱팬 님이 탄생하게 되었다. 사실 카이남팬으로 하려고 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여자가 많았기 때문에 괜히 돋보이기 싫었다. 나는 내가 여기까지 한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우스웠다. 카이짱팬이라니. 헛웃음이 새어나와 한동안은 자세를 굳히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카페 등급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신청 글을 올려야했다. 뭘 이렇게 구구절절 써야하는 게 많은지 일일이 다 검색해 보면서 작성해 나갔다. 인간 박찬열. 한다면 한다.

곧이어 스케줄 표를 보기 시작했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무대를 보면서 저곳에 가고 싶다! 하는 마음이 뭉실뭉실 피어났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미쳤네. 박찬열이 미쳤네. 내가 왜 이러고 있네? 아직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지만 차분히 밟아나갔다.

그리고 사실상 모든 일의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여느 때처럼 일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유독 눈에 띄는 한 부분이 있었다.

 

 

20yy.mm.dd. 8:00 ㅁㅁ역 ㅇㅇ백화점 5층 브랜드 이그조 홍보모델 팬 사인회 - 카이.

 

 

팬 사인회. 팬 사인회. 팬 사인회. 몇 번이고 읽었다. 모니터가 타들어갈 것처럼 눈을 굴렸다. 옆에 자리한 이름도 계속 곱씹었다. 유명 옷 브랜드 이그조의 단독모델인 건 알고 있었다. 슬쩍 가서 옷을 사고 눈치껏 브로마이드를 받아온 일도 있다. 그런데 팬 사인회라니. 이건 가야해. 날짜도 마침 주말이었다.

왠지 혼자 가는 건 기다릴 때도 심심할 것 같아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재미없는 통화음이 몇 번 가더니 이내 받았다. 역시 새벽에도 대기조는 여전하다.

 

 

“야, 변백!”

[아뭐야... 야 지금 몇 시인데,]

“됐고. 이번 주 토요일 날 ㅁㅁ역 가자.”

[뭐? 왜?]

"알았지? 가자."

 

 

그렇게 끊어버렸다. 남자, 그것도 아이돌 팬 사인회 장에 남자가 한 명인 것보다는 두 명이 눈에 덜 뜨일 것이다.

 

 

 

 

 

 

토요일 전날에는 제대로 잠도 못 잤다. 일찍 가야할 것 같은 마음에 10시에 잠자리에 누웠건만 보람도 없이 몇 시간 째 뜬눈이었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지하철로 향한 그 날, 같은 목적으로 온 사람 중에 남자는 역시 변백현과 나뿐이었다. 각자 번호표를 받고 뒤로 돌아나가 시간이 될 때까지 최대한 떨어졌다. 소녀들의 시선이 꽂히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두 명이라 눈에 덜 뜨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상 그 두 명이 친구라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민망함에 아예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했다. 이런데 처음이라며 오히려 변백현이 혼자 신났다. 임마, 나도 처음이다.

그 시선들을 다 떨쳐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김종인, 활동명 카이. 이 사람 역시 딱 들어왔을 때부터 이쪽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하.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카이짱팬입니다. 한순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 돈으로 직접 앨범까지 사왔다. 가수이니만큼 왠지 앨범에 받아야할 것 같았다. CD를 열고 안쪽에 있는 자켓 사진에서 개인 컷을 펴보았다. 여기다 받아야지 했는데 그러면 얼굴에 펜이 그어질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다 받아야지.

역시 눈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크고 움푹 파였다. 따지자면 쌍꺼풀라인이 굉장히 짙어서 그렇게 보였다. 화면으로 거쳐서 볼 때도 느꼈지만 참... 취향이다.

 

한참 기다린 끝에 차례가 되어 앨범을 슥 내밀자 굉장히 기뻐하는 내색이었다. 우와, 직접 산거에요? 하는 목소리에 내가 다 떨렸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했다. 싸인을 먼저 슥슥 하고나더니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맞췄다. 그 때 나는 현실감이 마이너스로 뚝 떨어져있었다. 이대로 받고 나가기에는 아쉬웠다.

 

 

“안녕하세요. 박찬열입니다!”

 

 

목소리가 얼마나 컸을 지는 잘 모르겠다. 저쪽에서 다음으로 대기를 타고 있던 변백현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만 들렸다. 망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다시 머리를 내리고 앨범에 싸인 외에 무언가를 쓱쓱 적어냈다. 멍한 정신으로 정수리만 쳐다보느라 집중하지 못했다.

 

 

“아, 악수 한번만.”

 

 

스스로 듣기에도 애절한 톤으로 부탁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마카를 미처 옮겨내지 못하고 손을 잡았다. 엄청 작았다. 키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니라 내 손에 다 덮이는 크기는 다소 충격이었다. 뭐지?

밖으로 나오는 것도 어려웠다. 5층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변백현에게는 따로 문자를 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오른손바닥을 한참 쳐다보았다. 여기에 쏙 담겼다. 그렇게 강해보이는 인상주제에 손이 작다니. 어떻게 잡았더라. 모양을 만들어내 공중에 잡는 시늉을 해보았다.

앨범을 들어 싸인을 확인하는데 바로 위쪽에 To.찬열^^ 이라는 글자가 추가되어있다. 또 다른 충격이었다. 뭐지? 이 웃음표시 뭐지?

잠시 후에 변백현이 내려와 행사 측에서 준 종이에 받은 싸인을 보여주었다. 재밌었다면서 나중에 또 이런 거 있으면 데려와 달라고 했다. 등을 팡팡 때리며 너 그런 얼굴이 취향이었냐고 덧붙이는데 사실 뒤부터는 제대로 못 들었다. 변백현과 내가 받은 싸인이 사뭇 달랐다. 그것만 눈에 들어왔다. 저 웃음표시는 내 것에만 담겨있었다. 변백현 것에는 없다. 너무도 확실한 희열이 일었다.

그 날부터였다. 그렇게 난 당당한 카이짱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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