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카이짱팬 다섯.

L2014. 5. 17. 00:12

 

 

 

 

 

05.

 

좋아하는 사람이 꿈에 나타나는 건 당연해. 그리고 네가 한 건 꿈이 아니야. 그럼... 뭔데? 음, 그건 그냥 귀접이지. 귀접은 몸이 피곤할 때 많이 나타나. 아... 하긴. 어제 많이 피곤했지. 그러니까 괜히 김종인한테 미안해하지 마. 그냥 즐겨.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거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며칠 전 도경수와 했던 통화 내용이 계속 머리 안을 휘저었다. 완벽한 답은 얻지 못했지만 한 떨기 걱정은 덜었다. 선 경험자가 괜찮다고 한다면 괜찮은 것이다. 중간 중간마다 날 위로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어구들은 대부분 우리 둘 모두에게 속했다. 도경수는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딱 보면 딱이다.

눈치 빠르다는 소리를 제법 듣고 살아서 알 수 있다. 확실하다. 도경수도 겪은 일이다. 어디까지 갔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모든 일에서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가있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 길을 그대로 걸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답답했다.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방법이 최선이다. 도경수 말이 백 번 맞다. 즐기면 되는 것이다. 즐기자.

 

 

잠들기 전마다 했던 마음가짐 덕분에 뜻이 통했나보다. 이불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결이 불어왔다. 살며시 눈을 뜨자 벽에 붙어있는 내가 느껴졌다. 발밑에 축축한 감각까지 들었다. 단이 긴 검은 바지와 단추가 몇 개 풀어진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현실인 듯 굉장히 생생했다. 내려다보니 풀잎이 주변에 가득이었다. 잔뜩 날이 선 발등 뼈가 바로 보였다. 수평선 너머에 줄지어 피어있는 작은 꽃송이들이 흐리게 반짝였다.

아무리 보아도 바깥인데 등 뒤에는 벽이 있다. 과연 벽일까 싶었는데 마침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귀에서 들리는 건 아니었다. 속 안에서 울려왔다.

 

 

또 보네.

 

 

얼른 몸을 틀어 상대와 마주했다. 그는 나와 등을 대고 있던 것이다. 어쩐지 벽이 들락날락한다했다. 어둡게 깔려있던 침대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얼굴이 이제야 선명해졌다. 하얗게 색이 빠져있는 머리카락이 투명하게 보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눈코입을 보지 못했을 때도 예감하고 있었다.

 

 

김종인.

 

 

두터운 선이 눈과 눈썹 사이를 가르고 있다. 코끝이 망울져보였다. 시선이 둥글게 다가오며 유한 미소를 내보였다. 두툼하게 잘라낸 덩어리 두 개가 가벼이 나눠졌다. 더 이상 엇나갈 수 없게 딱 그 얼굴이었다.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불렀어?

 

 

인식하기 전에 벌써 고개가 끄덕였다. 너무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푸스스 웃음을 냈다. 그러고는 내 턱을 손가락으로 훑어 옆으로 지나갔다. 바로 쫓았는데 벌써 저만치 떨어졌다. 아무리 뛰어도 멀게만 느껴졌다. 잡힐 것처럼 근처에 다가왔다가도 다시 훅 거리가 떨어졌다.

한참 이름을 불렀다. 제발 멈춰달라고, 가지 말아달라고 질러댔다. 김종인은 한없이 달려 나갔다. 속에서 울려대던 목소리마저 묻혀가고 있다.

숨이 차 자리에 우뚝 서서 무릎을 잡았다. 그렇게 몇 번 호흡을 가다듬다 문득 뒤를 돌았다. 풀잎은 여전히 수평선에 걸쳐져 뻗어있다. 여태까지 달려왔던 길을 거슬러 뛰어갔다. 저곳을 향해 간 종인은 이제 점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곳은 신경 쓰지 않고 반대쪽만 집중해서 내달렸다. 일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꽃밭에 코를 묻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처음 눈을 뜬 곳으로 찾아왔다. 거기에는 종인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햇살을 닮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일렁였다. 일정 거리가 되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속으로는 셈을 했다. 꺾어지는 숫자에 맞춰 뒤꿈치를 풀잎에 붙였다. 그가 닿아올 수 있도록 느린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하나. 하나. 하나. 하나... 닿았다.

 

공기를 코로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면 종인은 숨을 내쉰다. 내가 내쉬면 그는 들이쉬었다. 편안한 감각이다. 작은 쉼터 안에 있기라도 한 듯 마음이 놓였다.

맨발바닥이 푹신하게 들어 올려졌다. 축축함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또 끝났구나. 오늘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얼굴을 봤다는 부분이다. 지난밤에 대한 괜한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그 역시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시야를 닫았다. 종인은 여전히 살을 맞대고 서 있다. 확실한 온기가 느껴져서 꿈이 아니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참 견고한 세계라고 마음이 읊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종인 역시 조용히 소리를 내었다.

 

 

꿈이 아니야.

 

 

 

 

 

 

 

 

 

시끄러운 알람 음이 침대에 번져나갔다. 금방이라도 두개골이 깨질 것 같았다. 양 옆으로 정확히 갈라질 소음이다. 눈이 안 떠져서 급박하게 손바닥을 놀렸다. 한참만에야 화면을 밀어 넘기고 고요함을 되찾았다.

첫 번째로 울린 알람만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일은 거의 드물었다. 심해에서 표면으로 한순간에 끌어올려진 느낌이라 개운하지 못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꿈이다. 이 상태로 눈을 감으면 꽃밭으로 전송될 수 있으려나. 꺼풀을 열고 닫을 때마다 앞에 있던 종인이 흐려져 갔다. 이상 생각해 봤자 허무해지기만 더 하겠나.

어깨를 열심히 돌리며 간밤에 날아온 메신저들을 확인해 보았다. 변백현이 잔뜩 날아와서 날 부르고 있었다. 무음이라 다행이지 하마터면 꿈속에서 진동 벌레들을 만날 뻔했다.

하지만 쉽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다 쓸모없는 내용들이라 넘기고 있었는데 단 한 단어가 내 몸뚱이를 세게 때렸다. 뻐근하던 근육들이 일제히 날 짓누르며 침대 밖으로 향했다.

 

 

「과제했냐고 똥멍충아!」

 

 

했을 리 없다.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마당에 끝을 보았을 리 만무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단장을 마치고 튀어나갔다. 익숙한 통화음이 이어지며 얼마 후 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어디야.”

[아 뭐야 박찬열 나 지금 졸려......]

“과제는.”

[어? 어어. 다 했지. 끝냈지.]

 

 

목소리에서 졸음이 묻어나온다. 비몽사몽간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금 찾아가도 제대로 된 사고는 못할 것이라 짐작되었다.

학교 쪽으로 향하던 발을 다른 곳으로 틀었다. 자취하는 놈이라 새벽같이 찾아가도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 이건 편리하게 굴려먹을 수 있다는 뜻도 같이 담고 있다.

시간을 확인하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꿈에서도 그렇게 뛰더니 현실에서도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게 뜀박질이다. 종인이 꿈이 아니라고 말했던 건 이걸 이야기하려던 것일까. 문득 원망스러워졌다.

뛰는 속도를 더 올렸다. 빠르게 맞닿는 공기 감촉에 물기가 어렸다. 원망해야할 건 꿈에서 나타나 뛰어다니게 만든 종인이 아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정하는 순간 급속도로 현실이 다가와 앞을 막아버릴 것이다. 난 아직 축축한 풀잎들이 가득 펼쳐져있는 꽃밭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 전화로 잠에서 깨어난 변백현이 열심히 방어한 덕에 과제를 베끼지 못했다. 이건 절망이었다. 학점이 이렇게 도루묵이 되는가싶어 여기서 변백현을 죽일까하는 생각도 했다. 허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교수님께서 과제 제출 기한을 밀어주셨다. 이건 희망이었다.

수업 중에는 한껏 노려보던 변백현이 다 끝나고 나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목을 졸라왔다. 여전히 머리색은 금빛 찬란하다. 그래도 전보다 상대적으로 편해졌다. 비슷한 머리라 할지라도 얼굴은 전혀 다르다. 변백현은 두 번 죽었다 깨어나도 카이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점점 조르는 힘이 강해져서 천장에 하얀 빛이 보일 지경이라 얼른 손을 쳐냈다. 숨 쉴 구멍은 남겨두고 목을 졸라야지. 눈빛을 보아하니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기야 밤까지 새면서 작성한 과제물인데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여섯 음절로 변백현을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다.

 

 

“돈가스 사 줄게.”

 

 

 

 

 

*

 

 

 

 

 

도경수와 만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앨범 활동하고 있을 때 바짝 달려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때 아니면 마땅히 볼 곳이 없다면서 날 볶아댔다. 학교에 있다가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면 바로 달려 나갔다. 그가 부르는 곳으로 가면 멤버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가 있는 곳으로 멤버들이 따라온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회사 앞까지 가기도 하였다. 고작 세 번 중에 카이를 만난 날은 딱 하루였다. 도경수가 보려는 멤버는 내가 간 날마다 항상 나타났다. 확률 싸움에서 이미 이기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또 엄청나게 크고 대단해 보였다. 실질적으로는 한참 작았지만.

카이가 나타난 날은 처음으로 회사 앞에 찾아갔을 때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위치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경수는 이미 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는지 눈길이 쏠리지 않았다.

대신 내가 모든 것을 받아냈다. 아래쪽에서 향해오는 따끔한 눈초리가 피부를 잘게 두들겨 아팠다. 그나마 안경을 쓰고 있어서 전보다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음악 방송이 끝나고 시간이 꽤 지났다.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서 툴툴거리는 미성들이 주변에서 터져 나왔다. 회식 간 거 아니냐는 울림도 들렸다. 불안함에 도경수를 보자 너무도 확실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회사 뒤쪽으로 주차되는 하얀 차는 전에 봤던 승합차보다 조금 더 작았다. 경차 정도 크기였다. 설마 그 안에서 카이가 나오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안에서는 카이를 비롯한 세 명이 튀어나왔다.

리더도 나오다 안에서 먹은 것으로 보이는 음료수 병 하나를 떨어뜨렸다. 저도 당황했는지 굴러가는 병을 지켜만 보았다. 유리병이라 깨질 줄 알았는데 용케 버티었다.

도경수는 그걸 보고 쪼르르 달려가 병을 주워 리더에게 넘겨주었다. 만담을 옮겨놓은 것 같은 장면이었다. 리더도 그걸 두 손으로 받아 들고 도경수에게 고개를 슬쩍 숙였다.

회사로 들어가는 그들에게 던져지는 것들은 수많은 이름이었다. 아마 자신들 이름이겠지. 도경수는 홀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멤버들을 한없이 쳐다만 보았다. 내가 입을 벌린 건 딱 그 순간이었다.

 

 

“이번 앨범 대박나세요!”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에 들어가려던 멤버들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내 목소리를 제외한 전체가 고요해졌다. 그러고도 몇 번 비슷한 말을 질렀던 것 같다.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종인이 형, 머리 예뻐요. 새하얀 머리를 위로 넘겨 시원스러운 이마가 딱 마음에 들었다.

 

몇 분 뒤, 카이는 매니저를 동반하고 다시 나와 차를 탔다. 복장이 다소 편해져 있었다. 저쪽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모였다. 이번에도 역시 응원을 해주려 숨을 크게 들이쉬는데 곧바로 막혔다.

카이가 뒷좌석에 타려다 말고 얼굴을 돌렸다. 공중에서 얽힌 시선에 확 굳어버렸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정확히 이쪽을 향한 손바닥은 양쪽으로 흔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곧장 허리를 숙였다. 연속적으로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그는 얼른 문을 닫았고 차는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옆구리가 쿡 찔려와 내려다보니 도경수였다. 왠지 한 건 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카이는 머리 스타일을 바꿨다.

 

후로 두 번 더 갔을 때는 어쩐 일인지 카이만 만나지 못했다. 아마 시기가 잘 맞지 않았던가보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 삼았다. 도경수는 저 혼자 신나서 리더와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말했다.

카이가 없을 때도 난 계속해서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더욱이 리더는 도경수말고도 내 얼굴까지 얼핏 기억해주는 듯 싶었다. 카이에게 주려던 선물을 리더에게 주기도 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약속을 잡지 않고 무작정 상대를 기다리는 일은 힘들다. 체력이 무서울 정도로 깎여갔다. 이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집에 오면 눅진해져 바로 잠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과제는 날 붙잡았고, 더 나아가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항상 가는 건 아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어색한 때는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일도 그러했다.

오늘은 언제나처럼 멤버들이 가끔 오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안을 비롯해서 바깥까지 역시 사람들이 우글우글하다. 조금 일찍 와서 자리를 잡기를 잘했다. 이제 이런 계산 머리까지 돌아가는 것을 보니 도경수가 옮은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여유로울 줄 알았으면 노트북이라도 가져올 걸. 기한이 모레까지인 과제가 남아있다. 뭐, 밤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일단 그렇게 일단락 짓고 유자차를 빨았다. 도경수는 건너편에서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떠먹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뒹굴뒹굴 구르다 딱 멈춰 섰다. 포크까지 테이블에 소리 나게 놓는다.

누가 왔나 싶어서 도경수가 보는 곳을 같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저 여자 손님들만이 도란도란 모여 있을 따름이다. 그를 마주하고 보니까 이번에는 그 큰 눈알이 이쪽을 향했다.

 

 

“왜 그래.”

“너 혹시 종이 있어?”

 

 

뜬금없이 종이는 왜 찾나 싶어 받아온 영수증을 슥 내밀었더니 이게 아니란다. 쉽게 버리지 않는 수첩이 필요하다고 했다. 무슨 중요한 걸 써야 된다고 수첩까지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애꿎은 지갑만 뒤졌다.

순간 무슨 생각이라도 났는지 도경수가 신속하게 지갑을 뺏어갔다. 손에 걸려 나온 물건은 내 신분증이었다. 가락 사이마다 움직이는 놀림이 제법 익숙했다.

저 신분증은 도대체 왜 이리 도경수 손에 자주 들어가는 걸까. 지갑 안쪽에서 뭔가 재밌는거라도 봤는지 잠깐 헛웃음을 냈다. 숨겨둔 카이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 가방에서 꺼낸 얇은 마카 뚜껑을 소리 나게 열었다. 망설임 없이 뒤편을 돌려 무언가를 열심히 긁적거린다.

 

 

“뭐해.”

 

 

메모를 할 생각이라면 거긴 완전 잘못된 곳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빼앗지도 못했다.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민증은 평생 가니까.”

 

 

착실하게 적어낸 끝에 점까지 찍고 돌려주었다. 그 평생 가는 민증에 대체 뭘 적어낸 건지 얼른 들어 확인했다.

낯선 주소가 길게 적혀있었다. 우리 집 주소는 확실히 아니다. 이사를 몇 번이나 다니는 바람에 신분증에 나와 있는 주소를 굳이 바꾸지 않았었다. 사실 귀찮았다. 그런데 도경수가 단숨에 우리 집 주소를 이상하게 바꿔놓았다.

 

 

“숙소 주소야.”

 

 

그래서 그렇게 비밀스러운 곳을 원했던 것이다. 혹여나 나중에 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알아두라고 했다. 이제는 내가 알아도 될 것 같다나 뭐라나. 믿음이 생겼단다.

이 말은 어쩐지 가시가 담겨있었다. 꽤 많은 일정을 같이 다녀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도경수는 아니었나보다. 카페에서 케이크 먹다가 생긴 믿음은 어디서 뛰쳐나온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주소를 속으로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학교에서는 그나마 가까웠다. 고맙다고 하자 그는 어느 새 깨끗이 비워낸 접시를 두 번 두들겼다.

도경수 믿음은 4500원짜리 조각케이크 값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신분증을 다시 끼워 넣은 지갑을 들고 일어서 카운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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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카이짱팬 넷.

L2014. 5. 13. 10:50

 

 

 

 

 

04.

 

 

예상은 했지만 도경수는 아주 전문적이었다. 그가 가진 능력은 매니저와 멤버들 연락망을 가진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인회 일정이 끝나고 천천히 나가려고 하는 때에 팔목을 잡혔다.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뚫고 지나갔다. 밀치는 사람 따로, 사과하는 사람 따로 있었다.

많은 이들의 눈총이 날 헤집어놓았다. 도경수는 밑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았나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말해봤자 그가 좋은 소리를 해줄리 없었다.

대체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건지 금세 숨이 찼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뒤에 있는 나도 신경을 써 줬으면 하였다.

비상구와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타면서 도착한 곳은 지하였다. 타이어와 바닥이 마찰하면서 만들어진 지독한 냄새가 가득했다. 도경수가 차가 있어서 이리로 왔나하는 생각은 바로 접었다.

그는 주차되어있는 승합차 두 대를 가리켰다. 경호원같이 보이는 사람들도 몇 명 주변에 돌아다녔다. 작은 몸이 밀치듯 시멘트벽에 날 숨겨두었다.

 

 

“멤버들 나오면 저쪽으로 갈 거야. 잘 따라와.”

 

 

출구로 이어진 길을 눈짓으로 쭉 살폈다. 꽤 긴데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자 경호원들이 반복해서 소리쳤다. 얼른 위로 올라가라고 하는데 순간 엄청 찔렸다. 유난히 큰 눈이 뻔뻔하게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그나마 위안했다.

숨이 막히지도 않은지 마스크를 쓴 채다. 경호원들은 수상한 행색을 한 도경수를 무시했다. 나 역시 그다지 옆에 붙어있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보는 저 눈초리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이곳을 벗어났을 것이다.

어디선가 여학생들이 구석구석에서 뛰쳐나왔다. 넓은 주차장 전체에 비명이 얽혔다. 경호원 여러 명이 일순간 한쪽으로 붙었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틈바귀에 카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토기가 몰렸다. 머리 안쪽이 웅웅거리고 생각이 하얗게 불탔다.

옷깃이 끌려갔다. 도경수가 잡아끌어 당겼다.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고, 그걸 신호로 그는 아주 빠르게 차 사이를 넘어갔다. 그 뒤를 따라가기가 무섭게 차 역시 저쪽에서부터 출발했다. 정확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도경수는 어느 때부터 발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흰색 승합차를 노려보았다. 나도 옆에 같이 서서 차를 가만 응시했다. 조수석에는 팀 리더가 타고 있었다. 도경수 역시 이를 본 듯했다. 마스크를 집어 내리고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경례 자세를 취한다. 그 멤버도 이런 도경수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반갑다는 느낌이 확 드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알만했다. 역시 도경수는 비범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저들이 자신을 기억하는지 포인트를 잘 잡고 있다. 똑같이 해야 하나 머뭇거리다 타이밍을 놓쳤다. 대신 본능이 예의를 붙잡았다. 차가 가까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두 대 모두 그렇게 떠나갔다.

 

 

“오, 괜찮은데?”

“뭐가?”

“그렇게 인사하는 거.”

 

 

작은 머리통에서 데이터를 저장하는 철컥철컥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거수경례한 사람이 말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 중 어느 차에 카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인사 하는 건 봐줬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하나씩 욕심이 늘어가는 것인가 보다. 아무것도 몰랐던 몇 시간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눅눅한 냄새는 계속해서 풍겨오고 있었다. 조금 어지럽기도 해서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도경수는 이미 마스크를 올려 쓴 뒤였다.

저게 냄새를 좀 막아주는 역할도 하는 것 같다. 황사용 마스크라도 다음에는 들고 와볼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뜸 내 핸드폰을 들고 간 그는 무언가를 입력했다. 전화를 거는 폼으로 봐서는 자기 번호를 해놓은 듯하다. 엄청난 거라도 준 양 건네주는 손에서 자신감이 넘쳐 나왔다.

 

 

“너 내 일행해라.”

 

 

도경수가 도대체 어디까지 내 범주를 벗어날지 감히 예상도 안 된다. 대답은 굳이 하지 않았다. 거절은 거절한다는 눈이었다.

남자 팬이 흔치 않은 이곳에서 아마 많이 외로웠나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 역시도 이를 놓치면 안됐다. 우리 둘은 조용히 손을 마주 잡았다.

 

 

 

 

 

현실성이 부족해진 게 확실하다.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피곤한 것은 확실했다. 내일은 오전 수업이라서 이렇게 뜬눈으로 있을 수 없다. 억지로 눈을 우겨 닫고 나서도 여전히 깜빡였다.

천장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저 얼굴이 진짜로 앞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냐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한다.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이지지 않았다. 너야말로 지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얼굴만 둥둥 떠 있던 그림자 덩어리가 점점 모양을 바꿔갔다. 팔다리가 생겨나는가 싶더니 알몸이 되어 배 위에 떨어졌다. 너무 어두워서 그런지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도 들린다기보다는 안쪽에서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악수를 못해주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대신 그것보다 더 좋은 걸 해주겠다면서 밋밋한 가슴을 가까이 붙였다. 따뜻한 숨이 코 바로 앞에서 끼쳐왔다. 아랫도리에 둥글게 문질러지는 자극에 전신이 굳었다.

숙맥처럼 보였는지 잘 빠진 그림자는 부서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어딘지 익숙한 소음이었다. 창가에서 희미하게 들어오던 달빛이 힘을 더했다. 흐드러져있는 금색 머리카락이 맨 먼저 보였다. 진한 피부가 묘한 향을 만들어내며 하늘거렸다. 내 위에 올라가있는 사람은 확실히 남자였고 알고 있는 이였다. 남자는 혀로 입술을 야살스럽게 굴렸다.

 

 

 

 

 

“변백현, 죽여 버린다.”

“이 새끼 왜 또 아침부터 지랄.”

 

 

결국 방이 푸르스름하게 변해가는 시간이 되어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심한 가위에 눌린 터라 눈 주변이 시커멓다. 거울 속에서 마주한 얼굴은 가히 가관이다.

동방이라도 가서 눈을 붙일까하다 자체휴강이 되면 큰일이라 강의실로 왔다. 한참 뒤 변백현이 왔을 때 욕이 절로 나왔다. 잠을 푹 자지 못해서 괜히 기분이 나빴던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연유였다. 다른 이들이 봤을 때 어이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머리색 뺐냐.”

“어제 했는데. 왜.”

 

 

변백현은 괜히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별로야? 묻는다. 어울리는 건 나중 문제였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저 머리스타일이 눈에 밟혀 죽겠다. 전등에 따라 반짝이는 금발 머리가 유독 거슬렸다.

밤새 양기를 뺏어간 남자와 같은 머리를 한 변백현은 너무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심한 욕을 지껄여주고 싶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 껴서 나타난 금발 남자는 충격을 남기고 떠났다. 분명 얼굴을 봤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 더 뇌리에 박혔다. 처음이었다. 남자 때문에 팬티가 젖어있는 경험은. 나이 먹고 하얗게 묻은 속옷을 내 손으로 직접 빨게 될 줄이야. 묘한 죄책감과 책임감만은 예전에 느꼈던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남자가 나와서 애무한 것 정도로 몽정을 해 버린 난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가. 이런 말을 변백현에게 해봤자 별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재차 노려보는 것으로 대화를 끊었다. 그 역시 아침부터 욕을 들어서인지 입술을 쭉 내밀고 멀리 떨어져 앉았다.

 

빈 시간을 이용해서 캠퍼스 밖으로 나왔다.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도경수라 저장돼 있는 번호를 찾아 누르려다 멈칫 했다. 전화로 하기에는 뭔가 민망한 내용이다. 번호 자체는 그가 먼저 알려주었다. 그래도 이런 용도로 쓰라고 준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자로 보낼까, 메신저로 보낼까 한참을 고민하다 일단 카페에 들어갔다.

음료를 앞에 두고 열심히 화면을 만졌다. 눈을 감아 곰곰 떠올려 보았다. 어릴 적에 했던 첫 몽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수영복을 입은 갈색 머리 여인이 숲 속에서 나타나 날 호수로 이끌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그 때는 분명 여자였는데......

카이를 본 뒤로 내 안에 새겨져있던 정의가 미묘하게 엇갈려가고 있다. 새벽에 나왔던 그 남자가 알고 보니 김종인이라면 난 이제 완전히 끝이다.

관자놀이를 누가 누르기라도 하는지 무지막지하게 저려왔다. 아무리 봐도 너무도 확실히 끝을 향해 곧장 뛰어가고 있다. 한 걸음마다 데드라인이 다섯 걸음 가까워져 온다.

어제 만났던 종인은 머리를 노랗게 빼서 야한 느낌이 강했었다. 그 얼굴이 오늘 새벽에 나타난 남자와 자꾸 겹쳐 보여 더 죽을 것 같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야. 수도 없이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는 김종인이었다.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종인이라고 확신하자 점점 기억이 또렷해진다.

도경수라면 혹시나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것대로 궁금하면서도 징그럽다. 한 자리에서 고민을 반복했다. 커피는 서서히 식어갔다.

그냥 한번 물어보자는 마음에서 서둘러 자판을 쳤다. 혹시 팀 리더가 꿈에 나왔던 적이 있냐고 물었다. 확인을 누르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숫자 1이 사라졌다. 답장 또한 아주 빨랐다.

 

 

「ㅇㅇ」

 

 

반발할 수 없는 명확한 대답이었다. 그랬구나. 하긴 도경수 입장에서 보면 안 나온 쪽이 더 억울하고 이상할 것 같다. 너무 뻔한 질문을 했다. 내가 필요한 건 이것보다 더 깊은 내용인데 말이다. 어떻게 돌려 말해야 될지 정리가 되지 않아 엄지만 공중에서 움직였다. 화면에 상대 쪽 말풍선이 하나 더 생겨났다.

 

 

「왜? 너 김종인나옴?」

 

 

너무 놀라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목구멍이 바짝 조여 들어온다. 쉽사리 긍정하는 뜻이 손으로 옮겨가기는 어려웠다. 도경수는 꽤 감이 좋아 보였다. 내가 어떤 말을 뱉으면 그 뒤까지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는 내용이 담긴 답장을 가까스로 보냈다.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꿀꺽꿀꺽 넘겼다. 이번에도 숫자는 금방 사라졌다.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걱정과 두려움을 같이 껴안고 있었다.

뜬금없이 진동이 울려와서 보니 도경수라는 석자가 버젓이 화면에 떴다. 전화가 올 정도면 이게 그리 중요한 일이었던가 곱씹기까지 했다. 이거 받아도 되는 건가.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먼저 확인했다. 창가 자리에 이어폰 꽂은 여성 분, 두 테이블 옆에 커플 한 쌍, 조금 멀리서는 우리 학교 학생들로 보이는 몇 명이 옹기종기 모였다. 이정도면 전화를 받을만하다. 커피로 한 번 더 목을 축였다.

 

 

“여보세,”

[너 김종인이랑 잤냐?]

 

 

지금은 커피를 마실 때가 아니었다. 아직 끝 쪽에 머물러있던 커피가 순간 열린 기도 쪽으로 흘러갔다. 토하듯 터져 나오는 갈색 액체는 주변인들 시야에도 정확히 걸렸다.

도경수는 이제 무서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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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카이짱팬 셋.

L2014. 5. 10. 19:33

 

 

 

 

03.

 




“뭐? 김종인이?”

 

 

도경수가 지르는 이름에 주변 이목이 일순간 집중되었다. 마스크를 썼으면서 발음은 또 아주 정확했다. 대각선 앞에 앉은 단발머리 소녀가 고개를 휙 돌리는 모습에 얼른 머리통을 내렸다. 숨은 곳은 고작해야 다리 사이였다.

문득 내가 마치 타조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슬금슬금 허리를 폈다. 씁쓸한 맛이 입 안에서 펑 터졌다. 도경수 쪽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어떤 눈 모양일지 알 것 같았다.

그도 역시 소란을 부르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은지 이어지는 뒷말은 조용했다. 왼쪽 어깨에 가까이 붙어서 마스크를 검지로 집어 내렸다.

통성명까지 하고난 뒤 30분 만에 본 얼굴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곳이 아닌 바깥에서 봤다면 그가 팬인 것을 전혀 몰랐겠다. 학교에서 돌아다니는 남자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작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으로 넘어오자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이제 보니 명찰에는 도경수라는 석자 대신에 아이돌 멤버 이름이 적혔다. 눈을 몇 번이고 밀어 떴다. 정신이 아찔해지려고 한다.

 

 

“악수를 해줬어?”

 

 

눈두덩을 좁게 만들어 원래도 컸던 도경수의 동공이 뚜렷해졌다. 확실히 선이 큼직한 얼굴이다. 이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물음에는 고개를 가만 주억대었다. 악수한 것이 그리도 큰일인지 팬들에게 가려진 김종인과 나를 계속해서 번갈아보았다. 혹시 이거 말하면 안 되는 일이었나. 아랫입술을 슬쩍 물어 씹었다. 평범한 악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얘네 팬싸에서 스킨십 금지인데. 그게 회사 방침이야.”

 

 

금지. 나는 무려 절대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행위를 하였다. 무엇보다 소속 회사에서 내린 방침이라고 한다. 전혀 몰랐다. 어쩐지 그 순간 등에 식은땀이 쫙 퍼져 나오더니 이유가 있었다.

도경수는 다시 마스크를 올려 쓰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다. 카이인가. 카이를 노려보고 있는 건가.

역시 말을 잘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는 게 아니었다. 입술을 아예 안으로 쭉 밀어 넣었다. 이제 카이에게 피해가 갈 말은 안해야지. 그래봤자 이미 할 말은 다 하고난 뒤였다.

 

이번 팬싸에서 당첨된 명수는 150명이다. 우리는 각자 70번, 71번을 받았다. 거의 중간이라 아직 차례가 돌아오려면 멀었다. 천천히 담소를 나누기에는 알맞았다.

삼각형으로 변한 눈동자가 무서웠지만 이대로 두기에는 찝찝했다. 어딘지 심리적으로 뒤틀려진 느낌도 들었다. 이런 경우에는 달래주는 게 맞다.

뒤이어 질문을 한 건 나였다. 저들이 등장하면서 소란스러워지는 바람에 듣지 못한 뒷내용을 알고 싶었다. 대답은 싱거웠다. 까만 화면을 눌러 보여주는 게 끝이었다.

메신저 창은 꺼지지 않은 채였다. 얼핏 보았던 이름에는 확실히 매니저라는 글자가 담겨있다. 이걸 갑자기 왜 보여주는지 이해를 못했다.

어딜 봐야할지 몰라 눈알을 빙빙 돌려댔다. 손가락으로 내용을 짚어주고서야 느지막이 깨달았다. 도경수는 OXE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팬들많아 입구막혔어」

 

 

오늘 행사시작 예정시각에 보낸 질문에 날아온 답변이었다. 이게 바로 관계자보다 먼저 상황을 안 비법이다. 당연하게도 마술을 부려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돌 매니저와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나누고 있다. 게다가 도경수나 상대 말투로 봐서는 꽤 친해보였다.

별다른 질문이 생각나지 않아 계속해서 탄성만 내었다. 그제야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듯 마스크를 다시 집어 내린다.

 

 

“카이 꺼는 아직 모르지만.”

 

 

이번에는 메신저 즐겨찾기를 하나씩 보여주었다.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빨리 눈치 챘다. 매니저라 저장된 이름 셋 외에 5명 정도가 더 있었다. 그것들 모두 이 아이돌에 소속된 멤버였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도경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나와 같은 팬이 아니었던가. 하는 행동이나 복장을 보았을 때 아무리 좋게 보아도 골수팬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신기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니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혹시 회사에서 내보낸 팬 스파이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카이가 언젠가 했던 팬싸 금지행위 때문에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거기까지 예상이 미치자 얼른 도경수의 손을 끌어 잡았다. 팔과 함께 한쪽 어깨가 그대로 끌려왔다.

 

 

“제발.”

 

 

카이 혼내지 말아주세요. 카이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제가 악수해달라고 한 거예요.

회사가 굉장히 치밀한 구석이 있다. 팬들 사이에 스파이를 심어두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짙게 깔린 눈썹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반대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스윽 쓸며 입을 열었다.

 

 

“너 카이 팬 아니었어? 다른 멤버인데 알려줘?”

 

 

자기가 직접 저장해 주겠다면서 손을 내밀어왔다. 진정한 선의가 내포된 손짓이었다. 또 다시 혼란이 가해졌다. 회사 사람이 이리도 친절히 자기네 연예인 정보를 알려줄 리가 없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걸 알아챘다. 혹시 회사 측에서 내보낸 스파이 아니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냥 닫았다. 그는 눈이 참 커다랬지만 선한 분위기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이런 말을 했다가는 도리어 살기를 뿜어낼 것이다.

도경수 손목에 붙은 손가락을 천천히 다 떼어냈다. 입매를 억지로 밀어올리고 고개는 좌우로 흔들었다. 신경 써주어 고맙다고 덧붙이고 자세를 편하게 기댔다.

 

 

“70번부터 80번까지 나와서 대기해주세요.”

 

 

스태프들이 포스트잇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본인 이름 쓰고 앨범 위쪽에 잘 보이게 붙이라는 말도 함께였다. 몇 가지 주의사항도 같이 해주었다.

앨범이외에는 받을 수 없다. 무릎 꿇고 앉으면 안 된다. 촬영 및 녹음도 안 된다. 그밖에 여러 가지가 많았으나 또렷이 들려오는 건 한 가지였다. 악수나 포옹 같은 스킨십은 불가하다.

곰곰이 떠올려보니 말해주는 관련 내용을 어디선가 들어봤다. 단독 팬싸 때 분명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보니 듣지 않은 건 나였다. 긴장과 소음이 한데 엮여 귀를 막고 있었다. 여성분이 최선을 다해 공중에다 소리치던 모습까지 기억났다.

당시는 선착순으로 나누어진 터라 팬들 간에 균열도 많았고, 무엇보다 공개된 곳이라 스태프들은 사람 막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다보니 무얼 지키고 어기는지 신경을 못 쓴 것이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악수를 나한테만 해주었다는 사실에 티는 내지 않았으나 괜스레 뿌듯함을 갖고 있던 것이 부끄러웠다.

한 마디로 멍청한 행동이었다. 특별히 해준 게 아니라 그도 정신이 없던 거였다. 나 같아도 갑자기 누가 소리 꽥 지르면서 자기소개하고 악수해달라고 하면 얼떨결에 해주겠다.

 

그런 정신으로 서 있었더니 어느 순간부터 싸인을 받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멤버 순서였다. 각자 인사를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내가 아무 말도 없으니 뒷사람이 계속 밀어냈나보다.

바로 앞 번호인 도경수가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마스크를 벗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온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앉아 있는 사람이 고개를 쭉 빼주어야 했다.

역시 한 두 번 온 솜씨가 아니다. 회사 내부에서 고용된 스파이는 아니어도 치밀한 건 맞다. 저 마스크가 저런 용도로도 쓸 수 있구나.

 

카이는 가장 마지막에 앉아 있었다. 한 명씩 나누어 주려고 했던 편지는 주머니에 넣어놓은 채로 꺼낼 타이밍을 놓쳤다. 그렇게 앞쪽 다섯 명은 건너뛰다시피 카이 앞에 당도했다.

 

 

“어, 안녕하세요.”

 

 

책상을 손톱으로 따다닥 굴리며 다음을 기다리고 있던 종인이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 진득한 눈매는 변하지 않았다. 머리색이 연하게 빠져서 한층 성숙한 면이 돋보였다.

그래도 역시 특유의 어린 티는 남았다. 저 목소리에 반가움이 섞여있었다고 느꼈다면 괜히 또 주책일 거다. 한 번 본 얼굴을 그리 쉽게 기억할 리가 없다. 대충 침을 삼켜 넣었다. 입 안이 계속 바짝 마르는 게 느껴진다.

 

 

“이이이이거 편지......”

 

 

목구멍에서 괴이한 음색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편지봉투 12장을 부채마냥 펼쳐 책상 위에 살며시 밀어주었다. 고개를 쭉 돌려 봉투를 읽던 종인은 머리를 들어 재차 말을 내었다.

 

 

“멤버들 꺼? 왜 앞에서 안 주고요.”

“기기기기긴장 해서......”

 

 

미친 혀. 이놈은 미친 혀다. 아까 전까지 잘 굴러가던 놈이 박힌 돌이라도 만났는지 자꾸만 걸린다. 잠시 고개를 내렸을 때 얼른 숨을 바로 쉬었다.

언뜻 웃음소리가 들렸다. 종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꺽꺽대고 있다. 안면 전체가 구겨져 말도 제대로 못했다. 화한 기운이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간다.

이제야 포스트잇에 써 놓은 이름을 읽는 듯싶다. 앨범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집중한다. 이 순간에도 난 초조했다. 정수리 쓰다듬으면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될 일이다. 쓸데없이 동글동글한 모양이라 끝없이 충동이 일었다.

 

 

“이름 뜻이 뭐에요?”

“알찬 열매요!”

 

 

종인은 계속 킥킥거렸다. 이름 때문에 웃는 건 아니겠고 내 반응이 너무 열정 한 가득이었나. 자기 사진 위에 계속 펜을 놀렸다. 긋는 선 하나 하나가 모두 유연했다.

이동하겠다는 말에도 꿈쩍 못했다. 이미 싸인은 끝났고 종인 역시 날 살피고 있다. 뒷사람이 눈치를 주는 것이 느껴져서 서둘러 앨범을 접었다.

 

 

“또 봐요.”

 

 

무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수도 없이 곱씹었다. 또 보자고 했다. 또 보자고. 또 보자. 또, 또, 또. 신나서 속으로 팔짝거렸다. 그러다 브레이크 걸린 목소리로 했던 말들이 떠올라 관자놀이를 푹 찔렀다.

저 멀리서부터 보는 도경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카이가 내 앞에서 박장대소를 했으니 이유를 묻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일단 자리에 앉아 싸인을 확인했다. 파라락 넘기며 찾은 필체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을 간질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얼굴이 힘껏 위로 올라가 있다는 건 알겠다. 이게 뭐라고 이러는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그림까지 그려줬네.”

 

 

불쑥 나타난 머리통에 잠시 안면이 굳었다. 도경수 말을 듣고 확인해보자 정말로 아래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힘을 꾹꾹 눌러 정성스레 그은 흔적이 팍팍 담긴 그런 그림이었다. 자기한테는 본래 싸인에 있는 그림이라며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남겨져 있던 그림은 알이 탐스럽게 열려있는 앵두였다. 아마 열매라고 그려준 것 같은데 남들이 보면 쉽게 추측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었다.

이건 조금 흡족해해도 되는 거겠지. 입을 쭉 찢고 괴상한 떨림으로 웃어젖혔다. 잠시 동안 사방에서 겨냥해 오는 시선 따위 잊었다. 오늘 밤 꿈에는 카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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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카이짱팬 둘.

L2014. 5. 9. 14:41


 

02.

 



지금 난 초조함에 둘러싸여 있다. 이리도 심중이 불편할 줄은 미처 몰랐다.

멍 때리고 있다가 들어오는 지하철을 그냥 지나치고 넘길 뻔했다. 두 다리가 지금 걷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처음으로 갔었던 팬싸에서는 변백현과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지금은 혼자다. 혼자서 가고 있다.

혼자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문득 거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하는 전에 하지 않았던 걱정마저 들었다.

가는 지하철에서 내내 손톱을 물어 씹었다.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내가 남자 아이돌 팬 사인회를 가는 중이라는 건 알지 못하겠지. 그러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스렸다.

김종인 이름을 거꾸로 불러가며 쿵쿵 뛰는 가슴팍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한참을 멍 때리다가 또 다시 내릴 역을 놓칠 뻔했다.

 

음반점으로 찾아가 내 이름을 확인하러 갔다. 내부에는 팬일 것이 분명한 학생들과 여성들이 가득했다. 직접 만든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띄었다.

기다리던 줄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앨범을 샀을 때 브로마이드가 부족하여 받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 나누어주고 있었다. 대신 앨범을 샀을 때 받은 영수증이 있어야한단다.

그 때 영수증을 분명 지갑에 넣어놓은 것 같다. 구석구석 뒤지고 있는 중에 어느 새 차례가 되었다.

신분증을 먼저 달라고 하여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앞서 찾고 있던 영수증을 계속해서 뒤적거렸다. 한참만에야 지갑 사이 깊숙하게 구겨 넣어져 있던 걸 발견하고 산뜻하게 내밀었다.

밝은 얼굴로 마주한 사장 아저씨는 황당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날 쳐다보고 계셨다. 아마 줄곧 이 표정으로 계셨던 듯하다. 민증 사진이랑 내가 그렇게 다르게 생겼나.

한 번 확인을 하려는데, 세상에 맙소사. 꺼내놓은 물건은 신분증이 아니었다. 더욱이 안에 박혀있는 얼굴도 내가 아니었다. 뒷면에 그어진 싸인과 멘트가 유독 큼지막하게 확대되어 보였다.

그건 민증과 크기도 제법 비슷한 포토카드였다. 코팅까지 되어 형광등에 비춰져 빛을 펑펑 뿜어내고 있다. 교환하기 위하여 애써 가져온 물건이 하필 신분증을 넣어놓은 주머니와 같은 데에 들어있던 것이다.

이것들이 다 한 곳에 쏠려있으니 손이 헷갈릴 만도 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건 오직 나밖에 없으니 민망함도 오롯이 홀로 가져갔다.

 

가져온 카드는 총 9장. 그렇다. 그냥 몽땅 다 들고 왔다. 중복된 얼굴들도 많아서 교환 하려는 이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리 다양한 선택은 하지 못한다.

그래도! 9장을 다 바쳐서라도 그 단 한 장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이곳에 그런 각오를 안고 왔다. 양과 질 중에 무엇을 택하겠냐고 한다면 두말하지 않고 질이라고 외칠 것이다.

일단 주머니에 들어있는 같은 크기의 카드들을 몽땅 꺼냈다. 이중에 무엇이 진짜 신분증인지 촉감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민망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그만 바닥으로 놓쳐버렸다. 학교에 갇혀 자유를 갈망하다 풀려난 아이들처럼 재빠르게도 퍼졌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포토카드들이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개중에는 꽤 멀리까지 가버려 CD들을 구경하는 손님 신발 밑창으로 들어간 것도 있었다. 다행히 신분증은 내 신발 위에 착지했다. 브로마이드 챙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번호표만 대충 받고 튀어나왔다.

줄줄이 늘어진 포토카드들에 곁에 있던 아이돌 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너무 잘 들린다. 그들 사이에 내 귀가 끼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또렷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주웠다. 마치 포토카드 상인인 것처럼 굴었다. 있는 힘껏 표정을 굳혔다.

 

주변에 널려져있는 것을 다 주웠는데도 총 8장이었다. 바닥만 보고 있다가 옆으로 허리를 돌리니 누군가 내밀고 있는 손이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는 놓쳤던 마지막 카드가 들려있었다.

아직 땅에 박힌 눈은 상대의 신발을 보았다. 아, 맞다. 아까 다른 손님 밑창으로 들어갔다 했더니 이 사람인가보다.

 

 

“고맙습니다.”

 

 

진심을 담아 말하고 받으려는 때에 급작스레 손이 휙 옆으로 돌려빠졌다. 주는 시늉만 하다 뒤로 뺀 것이다. 이게 뭔가 싶어서 똑바로 눈을 떴다.

키가 꽤 작은 남학생 한 명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까만색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확실히 남자였다. 남자교복을 입고 있었고, 눈썹도 진했으며 무엇보다 눈이 엄청 똥그랬다. 눈만 보이는데도 인상이 굉장히 셌다는 뜻이다.

 

 

“아까 보니까 포카 많으시던데.”

“네? 포...카요?”

“네, 포토카드요.”

 

 

역시 남자였다. 정황상 나와 같은 그 아이돌의 남자 팬일 것이다. 반가움이 일어야하는데 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한 톤 정도는 더 낮아서 머리털까지 쭈뼛 섰다.

무릎을 꿇어야할 것 같은 기운이다. 게다가 남학생에게서 왠지 모를 전문가 냄새가 풍겨왔다.

 

 

“제가 이 멤버만 없거든요. 교환 하실래요?”

 

 

입고 있던 두려움을 얼른 벗어냈다. 날 구하기 위해 내려오신 구원자였다. 형광등 불빛이 쨍하게 비춰져 어쩐지 등에 날개 형상이 보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놓치고 그가 주운 카드 주인공은 아이돌 그룹 리더였다. 눈이 선하게 생기고 전체적으로 웃는 상인 멤버다.

 

 

“네, 네! 당연하죠!”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음반점에 목소리를 널리널리 퍼뜨렸다. 또 다시 눈길이 꽂혀왔다.

남학생 역시 느꼈는지 우선 나가서 이야기하자며 먼저 길을 밟아나갔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데도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다.

 

 

“누구 드려요?”

“카이...요.”

 

 

그는 끄덕거리며 작은 지갑을 꺼냈다. 안에는 무슨 순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멤버들 얼굴이 박힌 카드가 줄지어 끼워져 있었다. 종류가 꽤 여러 가지였다.

한 곳에 정확하게 멈춰 꺼내지고 있는 이는 분명 며칠 전에 누나에게 납치당했던 카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저려와 바지에 몇 번 닦아냈다.

 

당장에라도 카드를 품에 껴안고 뛰어다니고 싶었지만 학생의 눈빛이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분명 교환은 끝났을 텐데 계속 서서 멀뚱히 쳐다보고 있길래 주머니에서 다른 카드들을 다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학생이 잠시 끔뻑였다. 힘을 풀고 있을 때도 컸는데 확실히 선이 강하다.

카이를 얻었으니 이제 다 되었다. 굳이 그 외 카드들이 있을 이유가 없다.

정말 고마워서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이내 멀어지려는데 학생이 불러 세운다. 정말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괜한 부담을 준 것인가 했다.

 

 

“저기.”

 

 

하지만 그건 아닌 듯하다. 이미 카드들은 모두 작은 지갑 속으로 끼워 넣어진 뒤였다.

대신 딱 하나만 손에서 흔들거렸다. 들고 있는 한 장은 약간 낯설면서도 익숙한 형태였다. 저 물건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아챘다.

내 민증.

 

 

 

 

 

팬싸 시간은 성큼 다가왔다. 이번에는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현장이었기에 조금 더 마음이 편했다. 비교적 사람들 눈에 덜 보여 지겠지.

저번에 갔던 카이 단독 팬싸에서는 주변 팬들과 더불어 지나가던 이들이 쏘아대는 눈총까지 맞았다. 사방에서 꽂아온다. 피할 새도 없이 건드려왔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사죄를 해야 하는 느낌이었다. 앞으로도 쭉 이런 식으로 비공개적인 행사가 열렸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종이에 적힌 번호대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옆 자리에 익숙한 모습이 있다. 분명 아까 낮에 나에게 카이를 전해준 남학생이다. 이곳은 온풍이 제법 세서 후텁지근함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는 벗지 않는다.

뭐든 간에 이번에는 확실한 반가움이 번져났다. 고개를 비틀어 행동을 가만 지켜보았다.

열심히 메신저를 보내고 있었는데 상대 이름이 무슨 매니저라고 저장이 되어있다. 고등학생이라 패스트푸드점 알바라도 하나 더욱 고개를 빼고 지켜보았다.

그가 시선을 느낀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돌아선 고개에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는 눈매라 전보다 배는 매서웠다.

 

 

“어, 안녕하세요.”

 

 

머쓱함에 인사가 절로 나왔다. 남학생은 힘 뺀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화면을 까맣게 꺼버리기도 했다.

상대 기분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나 보다. 어찌 사과할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데 학생 쪽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증보니까 동갑이던데. 그냥 말 놔.”

 

 

남학생이 한 말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녀석이 형을 놀린다. 이 애가 나보다 아이돌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사회로 따지면 선배인 건 확실하나 옳지 못하다. 타인들이 어찌 말하는 건 상관없이 그게 내 신조였다.

김카이에게 줄 편지 첫 문구가 ‘종인이 형’인건 나와 변백현만 아는 사실이니 굳이 따져 물을 필요 없다.

내가 아래위로 훑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배에서 끓어온 숨을 푸욱 내뱉는다. 무시당한 감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진득한 날숨이었다.

그는 걸고 있던 목걸이 형태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건 딱 보아도 신분증이었는데 앞쪽에 박혀있는 숫자가 나와 엇비슷하게 일치하는 것이라 입을 떡 벌렸다. 생일이 연초인 것으로 보아 빠른 년생이다. 내 기준으로 따지면 변백현보다 더 가까운 나이였다. 

나랑 동갑이라면 대충 잡아도 대학 졸업반이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 있다. 혼란에 가득차 입 주변 근육이 일그러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팬 코스프레야.”

 

 

도경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스크 때문에 정확히는 안보여도 눈이 여전히 풀려있는 걸로 봐서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듯하였다. 그리고 왜 그가 마스크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멀쩡한 대학생이 교복을 입고 아이돌 팬 사인회에 왔다는 건 감추고 싶은 일일 것이다. 더욱이 남자가, 남자 아이돌을 보러 왔다는 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나도 다음에는 안경이라도 쓰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멤버들 지금 다 왔는데 앞쪽에 팬들이 막아서 못 들어오고 있대.”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정말로 행사 관계자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신기하다는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경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렸다.

 

 

“리더 형 포카 5장이나 줬으니까 너한테만 말해줄게.”

 

 

5장,2장,2장 비율로 들어가 있던 9장의 포토카드 중에 다행히도 그가 좋아하는 멤버가 가장 양이 많았다. 내심 흡족해하고 있었던 거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도경수가 손가락을 까딱여 곧장 그곳으로 귀를 갖다 붙였다. 마스크 속 웅얼거림에 소리가 먹혀 재차 물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리고야 말았다.

주변에 웅성거리던 데시벨이 화악 솟구쳤다. 사진 찍지 마세요! 카메라 압수합니다! 하는 스태프들 음성마저 한순간에 뒤덮였다.

무대 옆쪽 커튼에서 한 사람씩 튀어나왔다. 총 6명이 나오기로 한 일정이었다. 도경수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듯 보이는 리더 역시 당연히 참석하였다.

눈알을 연신 한쪽으로 굴리다가 딱 멈추었다. 물 빠진 머리색으로 앞머리를 쭉 쓸어 올리면서 나타난 남자는 포토카드 9장으로 구해낸 납작한 김카이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입체적으로 생긴 옆모습이 피곤함을 담았다. 팔다리가 쭉쭉 뻗어나가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여섯 명 중에 가장 어두운 피부 톤을 가졌으면서 가장 번쩍거렸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독 팬싸 때보다 더욱 시선을 위협했다.

이제는 의자에 앉아 자신들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팬들을 한 명씩, 천천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때는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날 보고 있는지는 확신 못한다. 그저 피곤함으로 둘러싸여 저만큼 쳐져있던 눈 꼬리가 쭉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살며시 웃었다. 그가 미소 지었다. 김종인이 입매를 한 가득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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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카이짱팬 하나.

L2014. 5. 8. 02:24

 

 

 

01.

 

 


솔직히 나보다 어린 상대에게 형이라는 존칭을 붙이는 데에는 약간 거부감이 있었다. 사회에 나가면 그런 건 다 필요 없다고들 했지만 난 그랬다. 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게 제대로 된 예의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존대어라면 몰라도 보다 어린 사람에게 형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대학에서는 재수를 하는 이들이 꽤 많다보니 선배가 저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서로를 존중해서 선배님, 후배님이라고 부르는 때는 많이 보아왔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간혹 겉보기에도 한두살 이상은 거뜬히 차이나는 사람이 한참 어린 아이에게 '형'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많이 어긋난다. 보는 이도, 듣는 이도 불편했다. 직접 말하는 사람만 해맑았다.

 

 

“이 새끼 또 편지 쓰네. 얼씨구, 종인이 형? 혀엉?”

 

 

보는 이도, 듣는 이도 불편했다. 직접 말하는 사람만 해맑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게 내가 되었다. 나만 해맑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지금 가장 후회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변백현과 수능등급이 비슷했던 거요. 평소 실력이라면 내가 한수 위였는데 그게 실전에서 뒤집혔다. 더불어 원래부터 지원하는 과도 같았다.

 

성적표가 나오고 예상 등급보다 하나씩 떨어져있어 울적했다. 그런 내 앞으로 이죽거리는 얼굴이 다가왔다. 찍은 게 잘 맞았다는 같잖은 소리를 하여 정강이를 까주었다. 고통에 찬 얼굴을 보고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가 금세 또 기어오르는 브이 자에 아예 눈을 찔러버렸다.

수강신청 때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바람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다. 변백현은 대체 뭘 하는 새끼일까.

 

 

“내놔, 인마!”

“뭐야 너 왜 징그럽게 남자한테 편지 쓰고 있어.”

 

 

앞서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은 몇 번 봤었지만 직접 뺏어가서 읽은 건 지금이 처음이다. 물론 그동안은 어떻게든 종이를 사수했기에 가능했다. 풋풋한 연애 편지정도로 생각했었는지 형이라는 단어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제 와서 무엇을 변명하리오. 같이 보고 온 그 남자라는 걸 알려주었더니 표정이 더욱 이상해진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톡톡 쳐냈다. 이제는 아예 백안시다.

 

 

“야이, 이 새끼 이것 봐라. 우리보다 어리잖아!”

 

 

지금 말하는 새끼는 박찬열 새끼냐, 카이 새끼냐. 아직도 변백현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편지지를 도로 뽑아왔다.

 

 

“빠른 년생이라 한 살밖에 안 어려.”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인데 자꾸만 사람 거슬리게 해서 손바닥으로 휙휙 밀어냈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궁금증이 끝나지 않았나보다. 이런 거 써서 걔한테 어떻게 줄 건데? 편지 주면 읽긴 한데?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제일 궁금하긴 했다. 그래도 팬이 준건데 읽지 않을까하는 희망이다. 볏짚보다 매가리 없는 희망이기도 했다. 툭 치면 끊어질 희망.

 

 

“며칠 뒤에 팬싸 있어.”

“어? 진짜? 예전에 갔다 왔던 그런 거? 나도 갈래!”

“너 10만 원 있냐.”

 

 

뜬금없이 통장 사정을 묻는 말에 놈은 고민 따위 내던지고 바로 고개를 젓는다. 없을 것 같아서 물어봤다.

 

 

“이번에는 앨범 팬싸라서 추첨이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었더니 뭔 소리인지 도통 이해를 못하고 있다. 무지한 놈. 아 이런 건 무지한 게 원래 맞는 건가.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미 흥미를 잃은 표정이다.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 움직인다. 내려오는 눈빛이 어쩐지 측은했다. 야레야레. 이 자식이 요즘 일본어학과 친구들이랑 붙어 다니더니 이상한 말을 배워왔다. 한층 더 상대하기 싫어졌다. 이제는 기분 나쁜 움직임으로 정수리를 쓰다듬어대 감정을 담아 쳤다.

 

 

“간밧떼. 여리쨔응.”

 

 

그렇게 떠나갔다. 그래, 내 통장 간밧떼.

 

 

 

 

 

 

 

 

당첨됐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직 캠퍼스 안이라 그러지 못했다. 입술을 꾹 눌러 잡고 묵은 신음을 냈다.

 

당첨 공지가 올라오는 5시까지 액정이 녹아내릴 정도로 매만졌다. 조금 닳은 것 같기도 하다. 평소 무교인 주제에 오늘만은 온갖 신들을 끌어다 품에 담았다. 그동안 교회 가서 국수만 먹고 온 거 죄송해요. 절밥만 얻어먹은 거 죄송해요. 코끼리 머리에다 다리도 많다고 해서 죄송해요. 인자하신 마리아님 절 보아주세요.

혼자서 계속 중얼거렸다. 오랜 시간 걸쳐서 했던 기도가 무색하게 5시가 돼도 문자는 오지 않았다. 역시 될 사람만 되는 구나 싶었다. 집 책상에 쌓여있는 표지가 똑같은 앨범 10장이 왠지 울음을 쏟고 있을 것 같다. 기대했던 만큼 심적 충격이 강했다. 어깨가 절로 축 내려간다. 술이라도 마시러갈까 하다가 주책이란 생각에 발걸음만 재촉했다.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아 당장에 확인했다. 술. 이 한 글자만 떠 있는 메신저는 변백현이었다. 이놈이 술을 마시고 싶었나보다. 그럼 마셔야지. 코로 마시게 해줘야지.

 

하지만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답장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혹시! 해서 열어보았으나 역시 변씨였다. 술술. 답이 없는 게 그리도 속상했는지 또 보냈다. 어지간히 마시고 싶나보다. 지금 가면 왠지 변백현 귀로 술을 들이부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 전화를 하려다 그냥 다시 집어넣었다. 괜히 기운 뺄 필요 없이 오늘은 집에 가서 가스 밸브 켜놓고 잠이나 자야지. 조금이라도 빨리 안락함을 추구하러 가야했다.

또 진동이 울렸다. 우리 백현이가 술을 눈으로 마시고 싶은가하여 욕지기와 함께 화면을 열었다. 그런데 무언가 감이 달랐다. 메신저 창이 아니라 편지봉투 모양이 떠 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선물 포장지 뜯는 것처럼 설렜다.

아직 내 품 안에 갇혀있던 여러 신들이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마음으로 주신 게 틀림없다. 오류로 인해 당첨문자가 늦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당첨되었으니 공지 읽고 시간날짜 잘 맞춰서 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첨됐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당첨되었다. 로또 1등이 되어도 이보다 기쁠까했다. 곧바로 변백현에게 전화했다. 이 즐거운 소식을 알려주어야 했다. 상대 쪽에서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내 사정부터 늘어놓았다. 쉼 없이 지껄이는 데도 대꾸 한 번 없는 게 수상해 화면에서 떨어져 나왔다. 끊겼다. 배경화면에다 자랑을 실컷 늘어놓고 있던 것이다. 그치지 않고 다시 번호를 누르는데 바로 진동이 온다.

 

 

[오메데또ㅗ]

 

 

일본어에서 이 말이 축하한다는 뜻 인건 잘 알겠다. 그 외에 다른 뜻이 더 함축되어보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이런 일로 기분을 흐려놓을 때가 아니다. 얼른 집에 가서 가스 밸브 잘 잠겼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정성들여 썼던 편지를 정리해야 한다. 너무 김카이한테만 집중하는 게 부끄럽기도 해 괜히 다른 멤버들 것도 써놓았다. 이러면 김종인이 좋아 죽으려고 해서 그런 것보다는 단순한 팬으로 보이겠지.

벌써부터 긴장돼 죽을 것 같다. 당일 날 가면 아마 둘 중 하나일 거다. 좋아 죽든지, 긴장돼 죽든지.

 

 

 

 

 

어렸을 적에 누나가 거실에 앉아 가수들 무대 보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는 건 많이 보아왔다. 가끔씩은 자기가 직접 부르기도 했다. 춤까지 외어 저 여자 아이돌과 똑같이 않느냐고 선보여 주었다. 아니라고 하면 곧장 발뒤꿈치가 날아왔기에 절대적으로 긍정해야했던 날을 기억한다. 가수들 춤을 외울 시간에 그 기억력을 다른 곳에 이용하면 좋을 텐데 느꼈다.

어린 박찬열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영혼 없는 박수를 칠 게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다. 저걸 내가 기필코 외우고 말리라. 나는야 인간 박찬열, 하고 말 것이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다급하게 춤 영상을 껐다. 대답도 하기 전에 머리를 구겨 넣어 안쪽을 휘 둘러보는 누나가 무섭다. 머리에 맺힌 물방울들에 이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우리 OXE 애들 노래가 들렸는데.”

 

 

내가 그렇게 노랫소리를 크게 틀어놨던가 하여 침이 넘어갔다. 아니면 그저 저 여인의 본능적인 안테나가 수신율이 높은 것일 수도 있다. 왠지 후자 쪽이 조금 더 가능성이 높았다.

 

 

“누나 걔네 팬이야?”

 

 

내 물음에 눈이 번뜩해졌다. 팬이구나. 눈알이 데굴데굴 움직이다 곧 책상에 꽂혀 내렸다. 아차. 그 때 샀던 앨범 10장중에서 따로 빼놓은 것이 아직 올려져있었다. 상태가 가장 좋은 데다 받고 싶은 마음에 쟁여둔 그걸 그만 누나가 발견하고야 말았다.

 

 

“어? 이거 앨범 이번에 나온 건데.”

 

 

직접 샀냐는 식으로 앨범을 들어다 흔들었다. 응, 직접 샀지. 장롱에 9장 더 있어.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게 원통했다.

 

 

“아니, 학교 여자애가 자기 많이 샀다고 줬어.”

“아아. 그 여자애 팬싸 응모했구만.”

 

 

다 부질 없는 짓이지. 혼잣말인지 다 들으라는 건지 감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맞아, 팬싸 응모했어. 누나 동생이. 누나 앞에 있는 박찬열이. 게다가 당첨까지 되어 며칠 뒤에 그들을 보러간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입이 간질간질했지만 참아야한다.

앨범은 게다가 아직 뜯지 않은 새 것이었다. 뜯어보아도 되냐고 묻는 말에 기꺼이 내주었다. 당일 날까지 먼지 묻히기 싫었는데 이제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미 질문과 동시에 뜯어내고 있었다. 곧이어 누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약간 광적인 느낌이 묻어나왔다.

 

 

“카이다!”

 

 

익숙한 단어에 바로 눈을 갖다 박았다. 그녀는 앨범 사이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집어냈다. 나도 보았다. 카이다. 카이였다. 앨범 봉오리를 펼치자 그 안에서는 작은 카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나는 내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포토카드를 들고 방밖으로 나가버렸다. 자세 그대로 굳어 생각을 정리했다. 카이가 납치당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같이 있던 카이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쫓아갈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방문을 잠그고 장롱을 열어 나머지 9장을 꺼내보는 일이 최선이었다.

한 장씩 비닐을 뜯어가면서 차차 깨달아갔다. 누나가 들고 날아간 카이는 10분의 1 확률로 들어와 있던 것이다.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깟 종잇조각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이냐 묻겠지만 중요하다. 더없이 중요했다. 앨범 10장을 더 사야하는 생각까지 하는 이 시점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찾지 못했다.

 

삶을 뜯어간 마귀를 저주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춤출 의욕도 잃었다. 팬 카페 회원들은 얼마나 당첨이 되었나 보았다. 그런 중에 아주 유용한 정보를 찾아내었다. 다른 사람들 중에도 나와 같은 고민으로 골머리를 썩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팬 사인회 현장에서 카드를 교환한다고 하였다. 당연히 가는 길이었지만 더욱더 가야할 이유가 생겨났다.

바닥에 흩뿌려진 포토카드들 중에 가장 많이 나온 얼굴을 집어 들었다. 아마 이 사람이 그룹 리더였다. 이 얼굴에 모든 것을 걸겠다. 부디 카드를 교환해주는 선량한 팬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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