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카이짱팬 일곱.

L2014. 5. 29. 20:27

 

 

 

 

07.

 

 

변백현은 애초에 소개를 목적으로 만남을 조장했던 것이다. 응해줄 생각은 있다. 나에게 바라온 것은 더 깊은 관계성이겠지만 꼭 연인에 관련되어 생각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그럴 생각조차 없다. 사람 하나에 엮여있는 관계는 무궁무진하다. 지금처럼 누군가가 이어준 만남이 생길 수도 있고, 오랫동안 보아온 친구, 뜻이 맞는 일행,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에서 이상형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게 설사 브라운관 속이라고 할지라도. 만나기 위해서는 일방적으로 찾아가야 할지라도.

마음이 너무 초조했다. 무의식중에 손톱을 물어뜯으려하기도 했다. 시간은 야속하게 죽죽 흘러갔다. 가능하다면 못으로다가 박아놓고 싶었다. 집으로 가는 건 진즉에 포기했다. 얼추 맞춰서 공항까지 가기만 하면 된다. 8시 34분, 출발해야 한다. 어찌나 불안했으면 다리가 달달 떨렸다. 대화중이라 차마 어쩔 수 없이 얼굴은 웃어야했다. 상대가 포크라도 떨어뜨렸으면 줍다가 제법 소름 끼쳐했겠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는데 사실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동반사적으로 호응이 나간다. 무엇에 대해서 말을 하면 아 그렇구나 정말? 힘들었겠다 정도로 대꾸를 하였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도 있다. 다행히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만, 여보세요."

 

 

간신히 물 마시는 중간이 생겼을 때 진동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이 시간이라면 당연히 도경수다.

 

 

[너 어디야? 사람 엄청 많아. 들어올 수 있겠어?]

 

 

조용한 카페 안에 퍼진 스피커 음량이 컸다. 지현이는 빨대를 입 안에 담고 얼음을 돌돌 굴렸다. 무관심한 양 시선을 피해준다. 서둘러 줄여놓고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너는?”

[나는 이쪽 귀국장 문 앞에 있어. 아씨, 야 잠깐만 이따 전화할 게.]

 

 

웅성웅성 소리에 파묻혔지만 어떤 말인지는 이해했다.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최대한 미소를 지어야 한다. 그녀는 한번 쪽 빨아올린 음료를 삼켜내고 올려다보았다.

 

 

“미안, 중요한 사람이랑 만나야 해서 먼저 갈게. 커피 잘 마셨어."

 

 

여기서 말하는 중요한 사람이란 물론 김종인이다. 지현이는 살짝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너무 다급하게해서 그녀가 내 말을 이해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가방을 매지도 못하고 든 채로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지하철? 버스? 아직 퇴근시간이랑 겹치는 때다. 그러면 역시 지하철이 낫겠지. 짧은 새에 최단경로를 파악하고 발을 꺾어 돌아나갔다.

 

 

 

 

 

카드를 찍는데 지하철 들어오는 음성이 들려 서둘러 계단을 뛰어내렸다. 두발을 동시에 짚어놓자마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들숨 날숨이 한데 엉겨 거친 콧바람을 만들었다. 까만 눈알들이 도록도록 굴러왔다. 얼른 몸을 돌려 섰고 가슴을 크게 들었다 놓았다.

최신통화목록 제일 위에 있는 이름을 옆으로 밀었다. 통화음은 역시나 재미없는 기본이다. 얼마 후 뚝하고 통화음이 끊겼다.

 

 

“나 탔어.”

[어, 알아서 뚫고 와.]

 

 

자기말만 내뱉고 통화가 단절되었기에 이 자식이? 싶었는데 메신저로 사진이 우르르 전송되어왔다. 사람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몰려있다. 아직 9시정도밖에 안됐음에도 엄청난 인원이다. 도경수 쯤은 거뜬히 파묻힐 수준이었다. 그 역시 근래에 이렇게까지 많이 몰린 적은 없다고 한다.

도착해 올라가는 길에 역시 같은 이유로, 비슷한 목적지를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리들은 서로 견제하느라 발을 바삐 움직였다. 나 역시 견제는 되었지만 그들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아직 준비할 과정이 남아있어 화장실로 빠졌다. 가방 끈에 걸려있던 스냅백과 안에서 홀로 방황하던 알 없는 안경을 꺼냈다. 이럴 용도는 아니었는데 맞게 쓰니 나름 신변보호는 된다. 아무렴 맨 얼굴인 것보다는 낫지.

국제선 귀국장으로 가보았다. 하나둘 방대하게 펼쳐진 사람 머리통들이 보였다. 저들 중에 도경수를 찾는 건 무리다. 나름대로 방안을 모색했다. 얼쩡거리는 도중 진동이 먼저 울렸다.

 

 

[어디야.]

“다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들어갈 것 같아.”

[하긴.]

 

 

뒷말을 더 잇지 않아 한동안은 주변 잡음만 잡혔다. 침묵은 금방 깨졌다.

 

 

[그럼 너 그냥 밖에 나가있어. 어차피 차타고 이동해야 되니까 거기로 갈 거야. 주차장 쪽이나... 아, 아니다 그냥 거기 있으면 시간될 때 우르르 몰려올 거야. 차든 사람이든.]

“너도?”

[응, 이겨라.]

 

 

밀지마세요! 하는 한 여성의 비명과도 같은 괴성이 스피커 너머에서 들리다 통화는 또 다시 끊겼다. 얼핏 너나 밀지마라는 낮은 목소리와 육두문자가 쏟아진 것도 같다. 저쪽은 많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다소 흐지부지 끊났지만 마지막으로 그가 한 말은 정확히 들었다. 뭘 이기라는 것인지도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그래, 이기자. 주먹을 꾹 쥐고 눈을 크게 떴다.

 

멤버들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왔다. 금방 그쪽으로 갈 테니 차 근처에 알아서 잘 있으란다. 지금에서는 그것보다 어려울 일이 없었다. 도로 안쪽에 밴을 포함한 다인승 승합차 3대가 줄지어 붙었다. 어린 사람들은 앞옆뒤 덕지덕지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살기위해 물러서야 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공항 내부에서부터 사람들이 파도처럼 떠다녔다. 가히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이 나타나는 공항이 이정도로 살벌한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겠다. 난 그저 카이가 보고 싶을 뿐인데 왜 이래야하지. 문득 현재 상황을 되짚게 되었다.

그를 보고 싶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결론을 깔끔하게 매듭지었다. 그러자 방금보다는 이곳에 있어야한다는 마음을 먹기가 훨씬 수월하였다.

그를 위해 음료수 하나를 샀다. 자주 먹는다고 전에 종종 언급했던 음료다. 옆에 접착식 메모지도 붙였다. 글귀도 몇 자 적었다.

 

 

카이야, 오랜만이야. 안전히 한국에 돌아온 걸 환영해. -카이짱팬

 

 

양 팔다리에 소름이 돋아나도 괜찮다. 어차피 읽어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받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보다 어림에도 양심 없이 항상 존칭어에 형이라고 불렀는데 오늘은 변장을 해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름을 쓸까 말까하다 그냥 안 썼다.

 

 

밤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이 오스스 떨려왔다. 역시 집을 들렀어야했다. 일교차가 심한 지금에는 저녁 시간 때 맞춘 옷이 필요하다. 한 시간 넘게 밖에서 찬 음료를 들고 서 있다 보니 추위가 전신으로 휘감겼다. 이 얕은 질환이 낫는 법은 비교적 쉽다. 카이를 보면 된다. 그러면 춥지 않다. 이건 정말이다. 과학적 고증은 들 수 없지만 카이를 보면 바로 전까지 느끼고 있던 고통이 싹 잊힌다.

안에서 겹겹이 싸여 둥근 무리를 이루던 사람들이 마침내 대이동을 하였다. 눈치가 있다면 알아챌 수 있다. 이정도 파급력을 가진 것은 그들이다.

유리문이 열리자 플라스틱 팩에서 쏟아진 젤리처럼 까만 머리통들이 몰려나왔다. 웅성대기만 했던 소음에 몇 배가 그곳부터 물밀 듯 퍼졌다. 틈바귀에서 간신히 솟아난 살구 색을 보니 마침내 익숙한 얼굴이다. 아직 깊숙이 들어서있었지만 짙은 인상을 가진 이 역시 번듯하게 떠올랐다.

 

카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가 생각을 한 후 뒤를 돌았다. 보이는 것보다 멀다. 저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가까이 오기위해서는 나라도 길을 터야한다. 딱히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다.

차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나왔다. 이어져있는 인도에 서서 자리만 지켰다. 몇 발자국 차이인데도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다르다. 저기는 너무 꽉 막혀있었다. 밖인데도 답답했다. 그 속에서 사방으로 꽉 눌려있는 저들은 얼마나 더 숨이 막힐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뭉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뒤에서 보아도 알 수 있다. 밀치고 밀쳐지는 저들 사이에서 표정이 많이 어두워져있다. 번져 나오는 분위기 자체도 시커멓다. 그저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다. 하지만 저런 모습을 보려고 온 건 아니다. 밝게 웃는 얼굴이 가장 좋다. 웃어주었으면 한다. 가까이에서 그저 얼굴만 보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느끼는 행복이 그에게도 역시 묻어나기를 바랐다.

 

세상 모든 피로가 담긴 카이 얼굴을 보자 그대로 사고가 정지했다. 소개팅 자리인지 모르고 억지로 끌려 앉혀진 사태보다 훨씬 불편해보였다. 걷고 있음에도 갈 곳을 잃었다. 초점 역시 불분명했다. 아까 내가 느끼고 있던 감정에서 적어도 몇 배는 떠안고 있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이들에게 지금은 너무 가혹하다.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렀다. 가장 가까운 출입구는 사람들이 다 막아서서 최대한 멀리까지 가야했다. 멤버들은 여전히 길을 뚫고 있다. 계속해서 큰 소리가 오고 갔다. 아예 장소를 벗어났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이건 어떠한 관계도 아니다. 무작정 강요하고 있음이다.

도로를 끼고 걸어 거의 끝 쪽 출입구까지 왔다. 지하철을 타러 가려면 출입구를 통해 공항으로 들어가, 왔던 길을 똑같이 되돌아가야한다. 그래도 아직은 저 근처로 가고 싶지 않았다.

인도 끄트머리에 발바닥을 아슬아슬하게 붙이고 섰다. 휘청 휘청대는 몸뚱이를 느끼며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작게 자른 찰흙들이 엉겨붙어있는 모양새다. 그나마 여기는 저기보다 평안했다. 바삐 움직이는 이들은 많았지만 적어도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없었다. 도경수는 아직 저 안에 있다. 무리들이 조금 헤쳐지기를 기다려야겠다.

 

모자랑 안경도 벗었다. 몽글몽글 맺혀있던 땀방울이 바람에 씻겨갔다. 시원하다. 입으로 말이 나왔다. 덕분인지 찬기가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만 바라보았다. 달이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많은 것도 아니니 틈새로 숨은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속으로 날짜를 셌다. 순간, 뭉쳐져 웅성거리기만 하던 소음이 조금 다른 형태를 가졌다. 왼쪽 시야에 하얀색 승합차 한 대가 걸렸다. 도로가 이쪽으로 이어져있어 차 역시 어쩔 수없이 여기로 와야 했다. 아직 거리가 조금 떨어져있을 때도 잠시 앞 차창을 뚫어져라 보았다. 누가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어쩐 일인지 캄캄하게 막혀서 구분이 되지를 않는다. 안에 누가 있는지는 몰라도 허리는 절로 굽혀졌다. 약속처럼 꿋꿋이 해왔던 인사방법이었다. 멤버가 없다면 매니저라도 받으라는 마음이었다.

 

다가온 속도가 그렇게 빨랐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멈출 정도로 느리지도 않았다. 하얀색 차는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리고는 어쩐 일인지 정확히 조수석 부분이 내 앞으로 닿았다. 멈춰선 차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보니 저쪽 차들은 아직 멈춰 섰다. 아마 저들끼리 속도를 맞추기 위함인가싶다. 차가 멈춘 것을 보고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덩어리들이 바삐 뛰어온다. 저러다 넘어지면 깔리지.

까맣게 칠해진 창을 응시하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제 어쩌면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길거리에서 이와 같은 차종에 본능적으로 머리를 조아린 적도 있다. 아마 그 때 그 안에 있던 사람은 꽤 당황했을 것이다.

어디다 시선 둘 곳도 없어서 까만 창만 빤히 보았다. 그런데 정말 이 뜬금없는 타이밍에 창이 살짝 내려갔다. 그것도 약간 공간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끝없이 까만 막이 밑으로 사라졌다. 뭔가 길이라도 물어보려나 싶어서 목을 비스듬하게 꺾었다. 그리고 곧장 숨을 집어삼켰다. 완전히 창이 사라진 그 안에는 다름이 아니라 카이 그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뜯어봐도 카이였다. 짙게 깔린 졸음 가득한 눈을 두툼하게 접어 넣고 둥글둥글한 얼굴을 가진 그다. 활동 명 카이, 본명은 김종인인 딱 그 본인이었다. 그는 머리를 밖으로 살짝 빼고 정확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사람들에 치여서인지 피곤함이 흩뿌려져있다. 그 안에서 깜빡이는 두 눈이 정면으로 꽂혔다. 아래에서 쏙 나온 손은 좌우로 똑바로 흔들렸다.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발도, 얼굴도 얼어버렸다. 어느 신체 기능도 바른 구실을 못했다. 정확히는 뇌부터가 명령을 내릴 정신이 아니었다. 그나마 동공 혼자 절로 커져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지금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

간신히 앞으로 걸음을 떼려는 이내 옆에서 귀를 찌르는 고음들이 터졌다. 우르르 쏟아져오는 덩어리가 앞을 가렸다. 순식간이었다. 카이는 흔들던 손을 멈추고 눈을 굴려 주변을 인식했다. 상대를 향한 묘한 두려움이 겹쳐지는 게 설핏 보였다. 열릴 때와는 반대로 창문이 닫히는 건 아주 빨랐다.

앞을 막았던 그들은 밟아 나가는 차 뒤꽁무니까지 마저 쫓아갔다. 뒤에 머물렀던 다른 차들도 같은 도로를 쌩쌩 지나쳤다.

손에 꽉 차게 들고 있는 핸드폰이 몸을 죽어라 흔들었다. 진동은 느꼈지만 그저 느껴질 뿐이었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흰색 차를 눈앞에 그리는 것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가방에 들어있는 음료가 떠올랐다. 아, 이거 못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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