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카이짱팬 여덟.

L2014. 6. 1. 03:20

 

 

 

 

 

08.

 

 

살아오면서 누나와 함께했던 추억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나마도 사진을 보고나서야 아, 우리가 여기도 갔었고 저기도 갔었지 하는 정도다. 머리에서 골라 찾다보면 누나만 상황에서 쏙 빠져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기억 저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누나는 다소 폭력적이었다. 남자 아이는 엄히 다스려야한다는 말을 때릴 때마다 했던 것 같다. 가늘고도 하얀 손바닥은 멀리서 인사할 때 보는 것보다 등짝을 휘두를 적에 더 자주 맞닥뜨렸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이 보는 일은 누나가 내 물건을 빼앗아갈 때였다.

분명 엄마는 나와 누나 한 명씩에게 간식을 나누어주셨다. 엄마가 등을 돌리고 단둘이 남게 되면 절로 긴장이 되었다. 미처 판단을 세우기도 전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난 바닥에 나가떨어져 있었다. 분명 내 손에 들려있어야 할 간식 역시 누나 아귀에 잡혀있을 때가 다반사였다.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면 누나는 의기양양하게 내 몫의 과자 봉지를 먼저 뜯었다.

상냥한데다 양보를 잘하는 누나란 나에게 환상과도 같았다. 쭉 이어져 온 작은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만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이가 든 지금에 와서 내가 누나 방을 뒤지는 건 합당하다.

 

누나가 그것을 버렸을 리 없다. 분명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버리지 않았음이 확실한데 책상과 침대 밑을 다 훑어보아도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서랍장을 열었을 때 형형색색 속옷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 바람에 서둘러 닫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방금 내 모습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겠지.

이렇게까지 구석구석 뒤졌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필시 품속에 꽁꽁 감추고 다니는 것이다.

두피에 땀나도록 누나 방을 뒤지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때 홀랑 가져간 카이 포토카드가 필요하다.

처음에 샀던 열 장 중에서 유일하게 든 바로 그 카이를 원한다. 도경수에게서 카이를 받아냈는데도 왜 이리 찾고 있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도경수와 교환했던 카이가 사라졌다. 납치에 이어 이번에는 미아가 되었다. 물론 갑작스레 사라진 게 아니다. 더 정확히 짚어 말하면 잃어버렸다. 그를 넣고 다니던 지갑을 통째로 잃었다. 장소는 아마 공항으로 짐작한다. 소개녀와 카페에 있을 때까지는 있었다. 공항에서 카이에게 줄 음료를 살 때도 계산을 안전하게 마쳤다. 아마 음료 병에 붙일 쪽지를 쓰면서 의자에 두고 온 듯싶다. 개찰구 앞에서 지갑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공항으로 달려갔지만 있을 턱이 없었다. 도경수에게 카이가 인사해줬다고 주절주절 자랑할 때까지가 제일 행복했다. 그는 조용히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제 계 많이 타려고 액땜했나보다. 그 말은 날 더욱 울적하게 만들었다.

안에는 내 삶의 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학생증, 체크카드, 신분증, 현금 등등. 그 중 어떤 것보다도 카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시켰다. 지갑 깊숙이 웅크리고 앉아 내가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카이가 상상되어 코가 시큰했다.

신분증이나 체크카드는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 지갑은 사면된다. 돈은 벌면 된다. 하지만 카이는 아니다. 한번 떠나간 카이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려면 많은 여정을 거쳐야했다. 지금도 다른 카이나마 찾아보지만 없지 않은가. 앨범 몇 장을 더 사야 그가 나올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상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샀는데 오히려 안 나오면 슬픔만 가중될 것이다. 잃어버린 물건 다 필요 없으니 카이만 돌려달라고 제발 사정하고 싶었다. 그게 진짜 어떻게 얻은 카이인데... 9장을 바쳐 소환한 귀중한 몸인데... 가능하다면 누나가 주는 쪽이 가장 빠르겠지만 가장 불가능한 확률이다. 무엇보다 직접 말을 꺼낼 용기가 부족했다.

10장중에 겨우 하나 들어있던 카이를 나에게 돌려주지 않을래, 누나?

들어줄리 만무하다. 턱도 없다.

 

 

내 방으로 돌아와 이불 위로 뻗었다. 들썩하는 매트리스 먼지를 코로 전부 흡수해내고 입으로 크게 뱉어냈다. 주책없이 눈가가 뜨겁게 차올라서 베개를 꾹 집어 얼굴을 파묻었다. 한이 최고치에 달했다. 소리라도 질러야 풀릴 듯하다. 아무나 잡고 속사정을 털어놓고 싶다. 왜 아무도 내 슬픔을 몰라 주냐고 목 놓아 울부짖고 싶다. 이건 카이가 와도 못 들어준다.

카이 너는 카이 포토카드 있니. 공허한 마음 속 외침은 이곳에서만 공명했다. 만약에라도 꿈에 나온다면 그때 물어봐야겠다. 너는 네 얼굴이 박힌 포토카드를 얻어냈느냐고. 있다면 나 좀 주지 않겠느냐고.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것 같으니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 오늘도 이렇게 인간 박찬열은 한 단계 더 강해졌다.

 

 

 

 

 

결국 카이는 꿈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멤버가 나왔다. 꿈속에서 우리는 아주 절친이었다. 굉장히 신나게 이야기하고 놀았는데 깨어나니 장면들이 전부 뭉그러졌다.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니 까먹어도 상관은 없다. 근래에는 카이가 출현하는 빈도가 뚝 떨어졌다. 위험을 감지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팬들 꿈에도 다니느라 카이가 많이 바빴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라도 나와서 꿈자리를 빛내주었으니 분실한 포토카드에 대해서는 얼른 잊어야겠다. 다른 멤버가 나온 것도 어떻게든 달래주려고 그런 것이라 스스로 다독였다.

체크카드는 죄다 정지해 놓았고, 일단 지금은 공강 시간을 이용해 학생증 재발급을 받으러 가는 길이다.

입 주변에 슈크림을 덕지덕지 묻히며 함께 걷고 있는 변백현은 구시렁구시렁 말도 많다. 빵이 잔뜩 들어차 있어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직접 맞춰야했다. 그가 하려는 말은 대충 이랬다.

 

 

“졸업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웬 재발급.”

 

 

하기야 이 시점에 학생증 하나 잃어버렸다고 재발급 받는 것도 웃기다. 하지만 그거라도 있어야 졸업하고서도 내가 대학생이었다는 증거 하나 남기는 거 아닌가. 그래서 집에 중고등학생 때 학생증도 다 보관해 놓고 있다. 그것은 내가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하나의 흔적이다.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는 않았다. 학생증이 있어야 대학생 할인을 받지. 그렇게 말했더니 혀로 슈크림을 날름 훔치며 고개를 주억댔다.

 

 

“야, 그런데 너 1학년 때 학생증 발급받으면서 거기다 핸드폰 번호 적어놓지 않았냐?”

“맞아.”

“그럼 누가 주워서 연락해주지 않을까?”

 

 

작게 반짝이는 눈에 나도 덩달아 헉했다가 곧바로 기대를 지웠다. 학생증은 꽤 안쪽에 끼워놓았다. 누군가 주웠더라도 그렇게 깊게는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럼 벌써 왔겠지. 근데 이미 하루 지났잖아.”

 

 

핸드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고 한숨을 훅 내쉬었다. 잊으려고 했는데 자꾸 머리에서 아른거린다. 그래도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 한다. 곁을 떠나간 지갑이다. 지갑 가져간 사람님, 현금은 얼마 없지만 그거 다 가져가시고 카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추신, 지옥 가세요.

신청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쪽 담당자도 날 이상하게 보는 듯하였다. 이때쯤에 학생증을 새로 만드는 사람은 거의 드문데. 작게 말했지만 분명 들으라고 한 것이었다. 혼잣말이라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내 학생증 내가 다시 만들겠다는데 타인들이 나서서 이리저리 말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저 허허 웃었다. 어쨌든 신청은 금방 끝냈다. 다음 주에 찾으러 오란다.

다음 강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터라 주변을 돌았다. 그렇게 지겹게 다녔던 학교 캠퍼스인데 곧 졸업이라 생각하니 공기가 남다르다. 중간고사 학점을 개떡으로 빚어놓아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햇빛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 제법 따갑다. 구름이 미처 가려주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쪼여온다. 기말고사는 기필코 잘 봐야지. 둥글납작한 변백현 뒤통수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다 먹은 슈크림이 아쉬워 쩝쩝 입맛을 다시던 그는 내 손길에 경기를 일으켰다.

 

 

“야, 맞다 너 현이랑은 어떻게 됐어?”

 

 

아래로 축 쳐진 눈매를 슬쩍 올리며 묻는다. 이 반응을 보니 그날 내가 그녀를 두고 나간 일을 모르나보다. 지현이는 나름 입이 무거운 사람인 것 같다.

 

 

“착해 보여.”

 

 

대화하면서도 느꼈었다. 혹여나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질까 쉼도 없이 주제를 꺼내는 그녀였다. 당시에는 머리에 카이밖에 없어서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더 잘해주어야겠다. 물론 변백현이 원하는 관계가 아닌 하나의 인연으로만.

 

 

“미적지근하네. 별로였어?”

“조금 갑작스러웠잖아.”

“원래 인생은 갑작스러운 거야.”

 

 

넉살 좋게 등을 퍽퍽 치면서 웃는다. 이 말에는 동의한다. 원래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기회라고 부른다. 준비가 되어있는 자라면 무난히 받아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놓쳐버릴 것이다. 내가 받아낼 기회와 그렇지 않을 기회는 어떤 것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보면 사건이 벌어지기 전,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어떠한 복선을 깔아주기 마련이다. 내 인생에서도 그러한 복선을 알 수 있다면 그건 과연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하다. 하루에도 수백 명과 스쳐지나가고 사소하게 여기는 작은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지금은 한없이 먼지 같은 일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불어날지 현재에는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변백현에게 등을 계속 얻어맞으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우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공상에서 깨어났다.

 

 

“백현이 형!”

 

 

키가 훤칠한 청년 하나가 변백현 어깨를 잡아끌어 등에 풀썩 올라탔다. 약간 경사진 땅이라 그는 당연히 휘청거렸다. 둘러진 팔을 움켜잡고, 넘어지지 않으려 빠른 걸음으로 저 밑까지 내려갔다. 매질하던 손이 없어져 휑해진 등이 어색해서 슬슬 쓸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청년은 밑에서 아직도 그에게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변백현보다 훨씬 컸다. 의지의 변백현, 용케 엎어지지 않는다. 느긋하게 뒤를 따랐다.

무거우니 이만 떨어지라는 외침에도 청년은 꼭 붙어있다. 두 다리는 이제 땅에 곧게 대고 있었으나 고개를 완전히 꺾어 관자놀이로 변백현 정수리를 누른 자세로 섰다. 눌려있는 꼴이 땅에 푹 박힌 것 같아 우스웠다. 홀로 팔짱을 끼고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든지 미간을 쿡 쑤시고 있다. 성가셔하는 듯 보였다. 허나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날 발견했는지 청년은 변백현을 쿡쿡 찔렀다. 하고 많은 곳 중에 볼을 찔리니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는 작은 심호흡 끝에 순식간에 다리를 접었다. 정수리 위에 온 무게중심을 싣고 있던 청년은 텅 비어버린 공간에 의해 옆으로 쏠려 한쪽 발로 한참을 낑낑거렸다. 눌려있던 정수리를 가볍게 툭툭 털어낸 변백은 히죽 웃었다.

변백현은 나 모르는 새에 인맥을 참 많이도 만들었다. 나를 짤막하게 같은 과 친구라고 소개했다. 매섭게 생긴 눈알이 아주 빠른 새에 날 머리끝부터 발까지 훑어 내렸다.

 

 

“はじめまして、セフンです.”

 

 

당연히 ‘안’으로 시작하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하’였다. 예상과 너무도 틀어지는 말이었다. 언어 자체가 이쪽이 아니었다. 다행히 기초적인 일본어라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방금 이 사람은 처음 뵙겠습니다, 세훈입니다라고 하였다. 끔뻑끔뻑 쳐다보다가 내가 먼저 오른손을 선뜻 내밀었다.

 

 

“찬열데스.”

 

 

전에 변백현이 같이 붙어 다닌다는 일본어과 아이가 얘였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눈을 세모모양으로 뜨고 있던 세훈은 내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내 내민 손을 툭 잡아 아래위로 재빨리 흔들었다.

 

 

“신선하네요.”

 

 

얼마 후, 이어져있는 손을 변백현이 툭 끊어냈다. 한쪽 팔을 쭉 끌어내 세훈을 길 한복판에 세워두었다.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버럭버럭 언성을 높였다. 할 일없이 나타나서 민폐 끼친다고 꾸중을 한다. 저렇게 형다운 말을 하는 변백은 낯설었다. 항상 뭐하나 빠진 듯이 행동하는 그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아 나름 진지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말을 받아내는 후배는 생글생글 웃고 있다. 똑바로 안 듣는다고 정강이를 차는 것까지 보고나서 자리를 떴다.

세훈같은 유형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옆에 일행이 있는 것을 보고도 잡아채가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슬슬 걸어가다 보면 다음 강의 시간에 대충 맞겠다. 변백현은 뭐, 알아서 올 것이다.

 

 

 

 

 

 

 

 

 

'L'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ㅊㅈ 카이짱팬 열.  (0) 2014.12.22
ㅊㅈ 카이짱팬 아홉.  (1) 2014.07.21
ㅊㅈ 카이짱팬 일곱.  (0) 2014.05.29
ㅊㅈ 카이짱팬 여섯.  (0) 2014.05.20
ㅊㅈ 카이짱팬 다섯.  (0) 201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