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카이짱팬 셋.

L2014. 5. 10. 19:33

 

 

 

 

03.

 




“뭐? 김종인이?”

 

 

도경수가 지르는 이름에 주변 이목이 일순간 집중되었다. 마스크를 썼으면서 발음은 또 아주 정확했다. 대각선 앞에 앉은 단발머리 소녀가 고개를 휙 돌리는 모습에 얼른 머리통을 내렸다. 숨은 곳은 고작해야 다리 사이였다.

문득 내가 마치 타조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슬금슬금 허리를 폈다. 씁쓸한 맛이 입 안에서 펑 터졌다. 도경수 쪽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어떤 눈 모양일지 알 것 같았다.

그도 역시 소란을 부르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은지 이어지는 뒷말은 조용했다. 왼쪽 어깨에 가까이 붙어서 마스크를 검지로 집어 내렸다.

통성명까지 하고난 뒤 30분 만에 본 얼굴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곳이 아닌 바깥에서 봤다면 그가 팬인 것을 전혀 몰랐겠다. 학교에서 돌아다니는 남자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작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으로 넘어오자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이제 보니 명찰에는 도경수라는 석자 대신에 아이돌 멤버 이름이 적혔다. 눈을 몇 번이고 밀어 떴다. 정신이 아찔해지려고 한다.

 

 

“악수를 해줬어?”

 

 

눈두덩을 좁게 만들어 원래도 컸던 도경수의 동공이 뚜렷해졌다. 확실히 선이 큼직한 얼굴이다. 이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물음에는 고개를 가만 주억대었다. 악수한 것이 그리도 큰일인지 팬들에게 가려진 김종인과 나를 계속해서 번갈아보았다. 혹시 이거 말하면 안 되는 일이었나. 아랫입술을 슬쩍 물어 씹었다. 평범한 악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얘네 팬싸에서 스킨십 금지인데. 그게 회사 방침이야.”

 

 

금지. 나는 무려 절대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행위를 하였다. 무엇보다 소속 회사에서 내린 방침이라고 한다. 전혀 몰랐다. 어쩐지 그 순간 등에 식은땀이 쫙 퍼져 나오더니 이유가 있었다.

도경수는 다시 마스크를 올려 쓰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다. 카이인가. 카이를 노려보고 있는 건가.

역시 말을 잘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는 게 아니었다. 입술을 아예 안으로 쭉 밀어 넣었다. 이제 카이에게 피해가 갈 말은 안해야지. 그래봤자 이미 할 말은 다 하고난 뒤였다.

 

이번 팬싸에서 당첨된 명수는 150명이다. 우리는 각자 70번, 71번을 받았다. 거의 중간이라 아직 차례가 돌아오려면 멀었다. 천천히 담소를 나누기에는 알맞았다.

삼각형으로 변한 눈동자가 무서웠지만 이대로 두기에는 찝찝했다. 어딘지 심리적으로 뒤틀려진 느낌도 들었다. 이런 경우에는 달래주는 게 맞다.

뒤이어 질문을 한 건 나였다. 저들이 등장하면서 소란스러워지는 바람에 듣지 못한 뒷내용을 알고 싶었다. 대답은 싱거웠다. 까만 화면을 눌러 보여주는 게 끝이었다.

메신저 창은 꺼지지 않은 채였다. 얼핏 보았던 이름에는 확실히 매니저라는 글자가 담겨있다. 이걸 갑자기 왜 보여주는지 이해를 못했다.

어딜 봐야할지 몰라 눈알을 빙빙 돌려댔다. 손가락으로 내용을 짚어주고서야 느지막이 깨달았다. 도경수는 OXE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팬들많아 입구막혔어」

 

 

오늘 행사시작 예정시각에 보낸 질문에 날아온 답변이었다. 이게 바로 관계자보다 먼저 상황을 안 비법이다. 당연하게도 마술을 부려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돌 매니저와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나누고 있다. 게다가 도경수나 상대 말투로 봐서는 꽤 친해보였다.

별다른 질문이 생각나지 않아 계속해서 탄성만 내었다. 그제야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듯 마스크를 다시 집어 내린다.

 

 

“카이 꺼는 아직 모르지만.”

 

 

이번에는 메신저 즐겨찾기를 하나씩 보여주었다.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빨리 눈치 챘다. 매니저라 저장된 이름 셋 외에 5명 정도가 더 있었다. 그것들 모두 이 아이돌에 소속된 멤버였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도경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나와 같은 팬이 아니었던가. 하는 행동이나 복장을 보았을 때 아무리 좋게 보아도 골수팬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신기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니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혹시 회사에서 내보낸 팬 스파이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카이가 언젠가 했던 팬싸 금지행위 때문에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거기까지 예상이 미치자 얼른 도경수의 손을 끌어 잡았다. 팔과 함께 한쪽 어깨가 그대로 끌려왔다.

 

 

“제발.”

 

 

카이 혼내지 말아주세요. 카이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제가 악수해달라고 한 거예요.

회사가 굉장히 치밀한 구석이 있다. 팬들 사이에 스파이를 심어두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짙게 깔린 눈썹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반대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스윽 쓸며 입을 열었다.

 

 

“너 카이 팬 아니었어? 다른 멤버인데 알려줘?”

 

 

자기가 직접 저장해 주겠다면서 손을 내밀어왔다. 진정한 선의가 내포된 손짓이었다. 또 다시 혼란이 가해졌다. 회사 사람이 이리도 친절히 자기네 연예인 정보를 알려줄 리가 없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걸 알아챘다. 혹시 회사 측에서 내보낸 스파이 아니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냥 닫았다. 그는 눈이 참 커다랬지만 선한 분위기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이런 말을 했다가는 도리어 살기를 뿜어낼 것이다.

도경수 손목에 붙은 손가락을 천천히 다 떼어냈다. 입매를 억지로 밀어올리고 고개는 좌우로 흔들었다. 신경 써주어 고맙다고 덧붙이고 자세를 편하게 기댔다.

 

 

“70번부터 80번까지 나와서 대기해주세요.”

 

 

스태프들이 포스트잇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본인 이름 쓰고 앨범 위쪽에 잘 보이게 붙이라는 말도 함께였다. 몇 가지 주의사항도 같이 해주었다.

앨범이외에는 받을 수 없다. 무릎 꿇고 앉으면 안 된다. 촬영 및 녹음도 안 된다. 그밖에 여러 가지가 많았으나 또렷이 들려오는 건 한 가지였다. 악수나 포옹 같은 스킨십은 불가하다.

곰곰이 떠올려보니 말해주는 관련 내용을 어디선가 들어봤다. 단독 팬싸 때 분명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보니 듣지 않은 건 나였다. 긴장과 소음이 한데 엮여 귀를 막고 있었다. 여성분이 최선을 다해 공중에다 소리치던 모습까지 기억났다.

당시는 선착순으로 나누어진 터라 팬들 간에 균열도 많았고, 무엇보다 공개된 곳이라 스태프들은 사람 막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다보니 무얼 지키고 어기는지 신경을 못 쓴 것이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악수를 나한테만 해주었다는 사실에 티는 내지 않았으나 괜스레 뿌듯함을 갖고 있던 것이 부끄러웠다.

한 마디로 멍청한 행동이었다. 특별히 해준 게 아니라 그도 정신이 없던 거였다. 나 같아도 갑자기 누가 소리 꽥 지르면서 자기소개하고 악수해달라고 하면 얼떨결에 해주겠다.

 

그런 정신으로 서 있었더니 어느 순간부터 싸인을 받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멤버 순서였다. 각자 인사를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내가 아무 말도 없으니 뒷사람이 계속 밀어냈나보다.

바로 앞 번호인 도경수가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마스크를 벗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온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앉아 있는 사람이 고개를 쭉 빼주어야 했다.

역시 한 두 번 온 솜씨가 아니다. 회사 내부에서 고용된 스파이는 아니어도 치밀한 건 맞다. 저 마스크가 저런 용도로도 쓸 수 있구나.

 

카이는 가장 마지막에 앉아 있었다. 한 명씩 나누어 주려고 했던 편지는 주머니에 넣어놓은 채로 꺼낼 타이밍을 놓쳤다. 그렇게 앞쪽 다섯 명은 건너뛰다시피 카이 앞에 당도했다.

 

 

“어, 안녕하세요.”

 

 

책상을 손톱으로 따다닥 굴리며 다음을 기다리고 있던 종인이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 진득한 눈매는 변하지 않았다. 머리색이 연하게 빠져서 한층 성숙한 면이 돋보였다.

그래도 역시 특유의 어린 티는 남았다. 저 목소리에 반가움이 섞여있었다고 느꼈다면 괜히 또 주책일 거다. 한 번 본 얼굴을 그리 쉽게 기억할 리가 없다. 대충 침을 삼켜 넣었다. 입 안이 계속 바짝 마르는 게 느껴진다.

 

 

“이이이이거 편지......”

 

 

목구멍에서 괴이한 음색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편지봉투 12장을 부채마냥 펼쳐 책상 위에 살며시 밀어주었다. 고개를 쭉 돌려 봉투를 읽던 종인은 머리를 들어 재차 말을 내었다.

 

 

“멤버들 꺼? 왜 앞에서 안 주고요.”

“기기기기긴장 해서......”

 

 

미친 혀. 이놈은 미친 혀다. 아까 전까지 잘 굴러가던 놈이 박힌 돌이라도 만났는지 자꾸만 걸린다. 잠시 고개를 내렸을 때 얼른 숨을 바로 쉬었다.

언뜻 웃음소리가 들렸다. 종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꺽꺽대고 있다. 안면 전체가 구겨져 말도 제대로 못했다. 화한 기운이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간다.

이제야 포스트잇에 써 놓은 이름을 읽는 듯싶다. 앨범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집중한다. 이 순간에도 난 초조했다. 정수리 쓰다듬으면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될 일이다. 쓸데없이 동글동글한 모양이라 끝없이 충동이 일었다.

 

 

“이름 뜻이 뭐에요?”

“알찬 열매요!”

 

 

종인은 계속 킥킥거렸다. 이름 때문에 웃는 건 아니겠고 내 반응이 너무 열정 한 가득이었나. 자기 사진 위에 계속 펜을 놀렸다. 긋는 선 하나 하나가 모두 유연했다.

이동하겠다는 말에도 꿈쩍 못했다. 이미 싸인은 끝났고 종인 역시 날 살피고 있다. 뒷사람이 눈치를 주는 것이 느껴져서 서둘러 앨범을 접었다.

 

 

“또 봐요.”

 

 

무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수도 없이 곱씹었다. 또 보자고 했다. 또 보자고. 또 보자. 또, 또, 또. 신나서 속으로 팔짝거렸다. 그러다 브레이크 걸린 목소리로 했던 말들이 떠올라 관자놀이를 푹 찔렀다.

저 멀리서부터 보는 도경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카이가 내 앞에서 박장대소를 했으니 이유를 묻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일단 자리에 앉아 싸인을 확인했다. 파라락 넘기며 찾은 필체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을 간질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얼굴이 힘껏 위로 올라가 있다는 건 알겠다. 이게 뭐라고 이러는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그림까지 그려줬네.”

 

 

불쑥 나타난 머리통에 잠시 안면이 굳었다. 도경수 말을 듣고 확인해보자 정말로 아래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힘을 꾹꾹 눌러 정성스레 그은 흔적이 팍팍 담긴 그런 그림이었다. 자기한테는 본래 싸인에 있는 그림이라며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남겨져 있던 그림은 알이 탐스럽게 열려있는 앵두였다. 아마 열매라고 그려준 것 같은데 남들이 보면 쉽게 추측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었다.

이건 조금 흡족해해도 되는 거겠지. 입을 쭉 찢고 괴상한 떨림으로 웃어젖혔다. 잠시 동안 사방에서 겨냥해 오는 시선 따위 잊었다. 오늘 밤 꿈에는 카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L'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ㅊㅈ 카이짱팬 다섯.  (0) 2014.05.17
ㅊㅈ 카이짱팬 넷.  (0) 2014.05.13
ㅊㅈ 카이짱팬 둘.  (0) 2014.05.09
ㅊㅈ 카이짱팬 하나.  (1) 2014.05.08
ㅊㅈ 카이짱팬 서막.  (0) 2014.05.07

ㅊㅈ 카이짱팬 둘.

L2014. 5. 9. 14:41


 

02.

 



지금 난 초조함에 둘러싸여 있다. 이리도 심중이 불편할 줄은 미처 몰랐다.

멍 때리고 있다가 들어오는 지하철을 그냥 지나치고 넘길 뻔했다. 두 다리가 지금 걷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처음으로 갔었던 팬싸에서는 변백현과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지금은 혼자다. 혼자서 가고 있다.

혼자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문득 거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하는 전에 하지 않았던 걱정마저 들었다.

가는 지하철에서 내내 손톱을 물어 씹었다.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내가 남자 아이돌 팬 사인회를 가는 중이라는 건 알지 못하겠지. 그러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스렸다.

김종인 이름을 거꾸로 불러가며 쿵쿵 뛰는 가슴팍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한참을 멍 때리다가 또 다시 내릴 역을 놓칠 뻔했다.

 

음반점으로 찾아가 내 이름을 확인하러 갔다. 내부에는 팬일 것이 분명한 학생들과 여성들이 가득했다. 직접 만든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띄었다.

기다리던 줄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앨범을 샀을 때 브로마이드가 부족하여 받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 나누어주고 있었다. 대신 앨범을 샀을 때 받은 영수증이 있어야한단다.

그 때 영수증을 분명 지갑에 넣어놓은 것 같다. 구석구석 뒤지고 있는 중에 어느 새 차례가 되었다.

신분증을 먼저 달라고 하여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앞서 찾고 있던 영수증을 계속해서 뒤적거렸다. 한참만에야 지갑 사이 깊숙하게 구겨 넣어져 있던 걸 발견하고 산뜻하게 내밀었다.

밝은 얼굴로 마주한 사장 아저씨는 황당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날 쳐다보고 계셨다. 아마 줄곧 이 표정으로 계셨던 듯하다. 민증 사진이랑 내가 그렇게 다르게 생겼나.

한 번 확인을 하려는데, 세상에 맙소사. 꺼내놓은 물건은 신분증이 아니었다. 더욱이 안에 박혀있는 얼굴도 내가 아니었다. 뒷면에 그어진 싸인과 멘트가 유독 큼지막하게 확대되어 보였다.

그건 민증과 크기도 제법 비슷한 포토카드였다. 코팅까지 되어 형광등에 비춰져 빛을 펑펑 뿜어내고 있다. 교환하기 위하여 애써 가져온 물건이 하필 신분증을 넣어놓은 주머니와 같은 데에 들어있던 것이다.

이것들이 다 한 곳에 쏠려있으니 손이 헷갈릴 만도 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건 오직 나밖에 없으니 민망함도 오롯이 홀로 가져갔다.

 

가져온 카드는 총 9장. 그렇다. 그냥 몽땅 다 들고 왔다. 중복된 얼굴들도 많아서 교환 하려는 이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리 다양한 선택은 하지 못한다.

그래도! 9장을 다 바쳐서라도 그 단 한 장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이곳에 그런 각오를 안고 왔다. 양과 질 중에 무엇을 택하겠냐고 한다면 두말하지 않고 질이라고 외칠 것이다.

일단 주머니에 들어있는 같은 크기의 카드들을 몽땅 꺼냈다. 이중에 무엇이 진짜 신분증인지 촉감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민망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그만 바닥으로 놓쳐버렸다. 학교에 갇혀 자유를 갈망하다 풀려난 아이들처럼 재빠르게도 퍼졌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포토카드들이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개중에는 꽤 멀리까지 가버려 CD들을 구경하는 손님 신발 밑창으로 들어간 것도 있었다. 다행히 신분증은 내 신발 위에 착지했다. 브로마이드 챙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번호표만 대충 받고 튀어나왔다.

줄줄이 늘어진 포토카드들에 곁에 있던 아이돌 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너무 잘 들린다. 그들 사이에 내 귀가 끼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또렷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주웠다. 마치 포토카드 상인인 것처럼 굴었다. 있는 힘껏 표정을 굳혔다.

 

주변에 널려져있는 것을 다 주웠는데도 총 8장이었다. 바닥만 보고 있다가 옆으로 허리를 돌리니 누군가 내밀고 있는 손이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는 놓쳤던 마지막 카드가 들려있었다.

아직 땅에 박힌 눈은 상대의 신발을 보았다. 아, 맞다. 아까 다른 손님 밑창으로 들어갔다 했더니 이 사람인가보다.

 

 

“고맙습니다.”

 

 

진심을 담아 말하고 받으려는 때에 급작스레 손이 휙 옆으로 돌려빠졌다. 주는 시늉만 하다 뒤로 뺀 것이다. 이게 뭔가 싶어서 똑바로 눈을 떴다.

키가 꽤 작은 남학생 한 명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까만색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확실히 남자였다. 남자교복을 입고 있었고, 눈썹도 진했으며 무엇보다 눈이 엄청 똥그랬다. 눈만 보이는데도 인상이 굉장히 셌다는 뜻이다.

 

 

“아까 보니까 포카 많으시던데.”

“네? 포...카요?”

“네, 포토카드요.”

 

 

역시 남자였다. 정황상 나와 같은 그 아이돌의 남자 팬일 것이다. 반가움이 일어야하는데 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한 톤 정도는 더 낮아서 머리털까지 쭈뼛 섰다.

무릎을 꿇어야할 것 같은 기운이다. 게다가 남학생에게서 왠지 모를 전문가 냄새가 풍겨왔다.

 

 

“제가 이 멤버만 없거든요. 교환 하실래요?”

 

 

입고 있던 두려움을 얼른 벗어냈다. 날 구하기 위해 내려오신 구원자였다. 형광등 불빛이 쨍하게 비춰져 어쩐지 등에 날개 형상이 보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놓치고 그가 주운 카드 주인공은 아이돌 그룹 리더였다. 눈이 선하게 생기고 전체적으로 웃는 상인 멤버다.

 

 

“네, 네! 당연하죠!”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음반점에 목소리를 널리널리 퍼뜨렸다. 또 다시 눈길이 꽂혀왔다.

남학생 역시 느꼈는지 우선 나가서 이야기하자며 먼저 길을 밟아나갔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데도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다.

 

 

“누구 드려요?”

“카이...요.”

 

 

그는 끄덕거리며 작은 지갑을 꺼냈다. 안에는 무슨 순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멤버들 얼굴이 박힌 카드가 줄지어 끼워져 있었다. 종류가 꽤 여러 가지였다.

한 곳에 정확하게 멈춰 꺼내지고 있는 이는 분명 며칠 전에 누나에게 납치당했던 카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저려와 바지에 몇 번 닦아냈다.

 

당장에라도 카드를 품에 껴안고 뛰어다니고 싶었지만 학생의 눈빛이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분명 교환은 끝났을 텐데 계속 서서 멀뚱히 쳐다보고 있길래 주머니에서 다른 카드들을 다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학생이 잠시 끔뻑였다. 힘을 풀고 있을 때도 컸는데 확실히 선이 강하다.

카이를 얻었으니 이제 다 되었다. 굳이 그 외 카드들이 있을 이유가 없다.

정말 고마워서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이내 멀어지려는데 학생이 불러 세운다. 정말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괜한 부담을 준 것인가 했다.

 

 

“저기.”

 

 

하지만 그건 아닌 듯하다. 이미 카드들은 모두 작은 지갑 속으로 끼워 넣어진 뒤였다.

대신 딱 하나만 손에서 흔들거렸다. 들고 있는 한 장은 약간 낯설면서도 익숙한 형태였다. 저 물건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아챘다.

내 민증.

 

 

 

 

 

팬싸 시간은 성큼 다가왔다. 이번에는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현장이었기에 조금 더 마음이 편했다. 비교적 사람들 눈에 덜 보여 지겠지.

저번에 갔던 카이 단독 팬싸에서는 주변 팬들과 더불어 지나가던 이들이 쏘아대는 눈총까지 맞았다. 사방에서 꽂아온다. 피할 새도 없이 건드려왔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사죄를 해야 하는 느낌이었다. 앞으로도 쭉 이런 식으로 비공개적인 행사가 열렸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종이에 적힌 번호대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옆 자리에 익숙한 모습이 있다. 분명 아까 낮에 나에게 카이를 전해준 남학생이다. 이곳은 온풍이 제법 세서 후텁지근함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는 벗지 않는다.

뭐든 간에 이번에는 확실한 반가움이 번져났다. 고개를 비틀어 행동을 가만 지켜보았다.

열심히 메신저를 보내고 있었는데 상대 이름이 무슨 매니저라고 저장이 되어있다. 고등학생이라 패스트푸드점 알바라도 하나 더욱 고개를 빼고 지켜보았다.

그가 시선을 느낀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돌아선 고개에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는 눈매라 전보다 배는 매서웠다.

 

 

“어, 안녕하세요.”

 

 

머쓱함에 인사가 절로 나왔다. 남학생은 힘 뺀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화면을 까맣게 꺼버리기도 했다.

상대 기분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나 보다. 어찌 사과할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데 학생 쪽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증보니까 동갑이던데. 그냥 말 놔.”

 

 

남학생이 한 말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녀석이 형을 놀린다. 이 애가 나보다 아이돌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사회로 따지면 선배인 건 확실하나 옳지 못하다. 타인들이 어찌 말하는 건 상관없이 그게 내 신조였다.

김카이에게 줄 편지 첫 문구가 ‘종인이 형’인건 나와 변백현만 아는 사실이니 굳이 따져 물을 필요 없다.

내가 아래위로 훑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배에서 끓어온 숨을 푸욱 내뱉는다. 무시당한 감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진득한 날숨이었다.

그는 걸고 있던 목걸이 형태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건 딱 보아도 신분증이었는데 앞쪽에 박혀있는 숫자가 나와 엇비슷하게 일치하는 것이라 입을 떡 벌렸다. 생일이 연초인 것으로 보아 빠른 년생이다. 내 기준으로 따지면 변백현보다 더 가까운 나이였다. 

나랑 동갑이라면 대충 잡아도 대학 졸업반이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 있다. 혼란에 가득차 입 주변 근육이 일그러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팬 코스프레야.”

 

 

도경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스크 때문에 정확히는 안보여도 눈이 여전히 풀려있는 걸로 봐서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듯하였다. 그리고 왜 그가 마스크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멀쩡한 대학생이 교복을 입고 아이돌 팬 사인회에 왔다는 건 감추고 싶은 일일 것이다. 더욱이 남자가, 남자 아이돌을 보러 왔다는 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나도 다음에는 안경이라도 쓰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멤버들 지금 다 왔는데 앞쪽에 팬들이 막아서 못 들어오고 있대.”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정말로 행사 관계자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신기하다는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경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렸다.

 

 

“리더 형 포카 5장이나 줬으니까 너한테만 말해줄게.”

 

 

5장,2장,2장 비율로 들어가 있던 9장의 포토카드 중에 다행히도 그가 좋아하는 멤버가 가장 양이 많았다. 내심 흡족해하고 있었던 거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도경수가 손가락을 까딱여 곧장 그곳으로 귀를 갖다 붙였다. 마스크 속 웅얼거림에 소리가 먹혀 재차 물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리고야 말았다.

주변에 웅성거리던 데시벨이 화악 솟구쳤다. 사진 찍지 마세요! 카메라 압수합니다! 하는 스태프들 음성마저 한순간에 뒤덮였다.

무대 옆쪽 커튼에서 한 사람씩 튀어나왔다. 총 6명이 나오기로 한 일정이었다. 도경수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듯 보이는 리더 역시 당연히 참석하였다.

눈알을 연신 한쪽으로 굴리다가 딱 멈추었다. 물 빠진 머리색으로 앞머리를 쭉 쓸어 올리면서 나타난 남자는 포토카드 9장으로 구해낸 납작한 김카이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입체적으로 생긴 옆모습이 피곤함을 담았다. 팔다리가 쭉쭉 뻗어나가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여섯 명 중에 가장 어두운 피부 톤을 가졌으면서 가장 번쩍거렸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독 팬싸 때보다 더욱 시선을 위협했다.

이제는 의자에 앉아 자신들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팬들을 한 명씩, 천천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때는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날 보고 있는지는 확신 못한다. 그저 피곤함으로 둘러싸여 저만큼 쳐져있던 눈 꼬리가 쭉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살며시 웃었다. 그가 미소 지었다. 김종인이 입매를 한 가득 머금었다.

 

 

 

 


'L'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ㅊㅈ 카이짱팬 다섯.  (0) 2014.05.17
ㅊㅈ 카이짱팬 넷.  (0) 2014.05.13
ㅊㅈ 카이짱팬 셋.  (0) 2014.05.10
ㅊㅈ 카이짱팬 하나.  (1) 2014.05.08
ㅊㅈ 카이짱팬 서막.  (0) 2014.05.07

ㅊㅈ 카이짱팬 하나.

L2014. 5. 8. 02:24

 

 

 

01.

 

 


솔직히 나보다 어린 상대에게 형이라는 존칭을 붙이는 데에는 약간 거부감이 있었다. 사회에 나가면 그런 건 다 필요 없다고들 했지만 난 그랬다. 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게 제대로 된 예의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존대어라면 몰라도 보다 어린 사람에게 형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대학에서는 재수를 하는 이들이 꽤 많다보니 선배가 저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서로를 존중해서 선배님, 후배님이라고 부르는 때는 많이 보아왔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간혹 겉보기에도 한두살 이상은 거뜬히 차이나는 사람이 한참 어린 아이에게 '형'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많이 어긋난다. 보는 이도, 듣는 이도 불편했다. 직접 말하는 사람만 해맑았다.

 

 

“이 새끼 또 편지 쓰네. 얼씨구, 종인이 형? 혀엉?”

 

 

보는 이도, 듣는 이도 불편했다. 직접 말하는 사람만 해맑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게 내가 되었다. 나만 해맑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지금 가장 후회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변백현과 수능등급이 비슷했던 거요. 평소 실력이라면 내가 한수 위였는데 그게 실전에서 뒤집혔다. 더불어 원래부터 지원하는 과도 같았다.

 

성적표가 나오고 예상 등급보다 하나씩 떨어져있어 울적했다. 그런 내 앞으로 이죽거리는 얼굴이 다가왔다. 찍은 게 잘 맞았다는 같잖은 소리를 하여 정강이를 까주었다. 고통에 찬 얼굴을 보고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가 금세 또 기어오르는 브이 자에 아예 눈을 찔러버렸다.

수강신청 때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바람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다. 변백현은 대체 뭘 하는 새끼일까.

 

 

“내놔, 인마!”

“뭐야 너 왜 징그럽게 남자한테 편지 쓰고 있어.”

 

 

앞서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은 몇 번 봤었지만 직접 뺏어가서 읽은 건 지금이 처음이다. 물론 그동안은 어떻게든 종이를 사수했기에 가능했다. 풋풋한 연애 편지정도로 생각했었는지 형이라는 단어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제 와서 무엇을 변명하리오. 같이 보고 온 그 남자라는 걸 알려주었더니 표정이 더욱 이상해진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톡톡 쳐냈다. 이제는 아예 백안시다.

 

 

“야이, 이 새끼 이것 봐라. 우리보다 어리잖아!”

 

 

지금 말하는 새끼는 박찬열 새끼냐, 카이 새끼냐. 아직도 변백현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편지지를 도로 뽑아왔다.

 

 

“빠른 년생이라 한 살밖에 안 어려.”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인데 자꾸만 사람 거슬리게 해서 손바닥으로 휙휙 밀어냈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궁금증이 끝나지 않았나보다. 이런 거 써서 걔한테 어떻게 줄 건데? 편지 주면 읽긴 한데?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제일 궁금하긴 했다. 그래도 팬이 준건데 읽지 않을까하는 희망이다. 볏짚보다 매가리 없는 희망이기도 했다. 툭 치면 끊어질 희망.

 

 

“며칠 뒤에 팬싸 있어.”

“어? 진짜? 예전에 갔다 왔던 그런 거? 나도 갈래!”

“너 10만 원 있냐.”

 

 

뜬금없이 통장 사정을 묻는 말에 놈은 고민 따위 내던지고 바로 고개를 젓는다. 없을 것 같아서 물어봤다.

 

 

“이번에는 앨범 팬싸라서 추첨이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었더니 뭔 소리인지 도통 이해를 못하고 있다. 무지한 놈. 아 이런 건 무지한 게 원래 맞는 건가.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미 흥미를 잃은 표정이다.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 움직인다. 내려오는 눈빛이 어쩐지 측은했다. 야레야레. 이 자식이 요즘 일본어학과 친구들이랑 붙어 다니더니 이상한 말을 배워왔다. 한층 더 상대하기 싫어졌다. 이제는 기분 나쁜 움직임으로 정수리를 쓰다듬어대 감정을 담아 쳤다.

 

 

“간밧떼. 여리쨔응.”

 

 

그렇게 떠나갔다. 그래, 내 통장 간밧떼.

 

 

 

 

 

 

 

 

당첨됐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직 캠퍼스 안이라 그러지 못했다. 입술을 꾹 눌러 잡고 묵은 신음을 냈다.

 

당첨 공지가 올라오는 5시까지 액정이 녹아내릴 정도로 매만졌다. 조금 닳은 것 같기도 하다. 평소 무교인 주제에 오늘만은 온갖 신들을 끌어다 품에 담았다. 그동안 교회 가서 국수만 먹고 온 거 죄송해요. 절밥만 얻어먹은 거 죄송해요. 코끼리 머리에다 다리도 많다고 해서 죄송해요. 인자하신 마리아님 절 보아주세요.

혼자서 계속 중얼거렸다. 오랜 시간 걸쳐서 했던 기도가 무색하게 5시가 돼도 문자는 오지 않았다. 역시 될 사람만 되는 구나 싶었다. 집 책상에 쌓여있는 표지가 똑같은 앨범 10장이 왠지 울음을 쏟고 있을 것 같다. 기대했던 만큼 심적 충격이 강했다. 어깨가 절로 축 내려간다. 술이라도 마시러갈까 하다가 주책이란 생각에 발걸음만 재촉했다.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아 당장에 확인했다. 술. 이 한 글자만 떠 있는 메신저는 변백현이었다. 이놈이 술을 마시고 싶었나보다. 그럼 마셔야지. 코로 마시게 해줘야지.

 

하지만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답장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혹시! 해서 열어보았으나 역시 변씨였다. 술술. 답이 없는 게 그리도 속상했는지 또 보냈다. 어지간히 마시고 싶나보다. 지금 가면 왠지 변백현 귀로 술을 들이부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 전화를 하려다 그냥 다시 집어넣었다. 괜히 기운 뺄 필요 없이 오늘은 집에 가서 가스 밸브 켜놓고 잠이나 자야지. 조금이라도 빨리 안락함을 추구하러 가야했다.

또 진동이 울렸다. 우리 백현이가 술을 눈으로 마시고 싶은가하여 욕지기와 함께 화면을 열었다. 그런데 무언가 감이 달랐다. 메신저 창이 아니라 편지봉투 모양이 떠 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선물 포장지 뜯는 것처럼 설렜다.

아직 내 품 안에 갇혀있던 여러 신들이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마음으로 주신 게 틀림없다. 오류로 인해 당첨문자가 늦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당첨되었으니 공지 읽고 시간날짜 잘 맞춰서 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첨됐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당첨되었다. 로또 1등이 되어도 이보다 기쁠까했다. 곧바로 변백현에게 전화했다. 이 즐거운 소식을 알려주어야 했다. 상대 쪽에서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내 사정부터 늘어놓았다. 쉼 없이 지껄이는 데도 대꾸 한 번 없는 게 수상해 화면에서 떨어져 나왔다. 끊겼다. 배경화면에다 자랑을 실컷 늘어놓고 있던 것이다. 그치지 않고 다시 번호를 누르는데 바로 진동이 온다.

 

 

[오메데또ㅗ]

 

 

일본어에서 이 말이 축하한다는 뜻 인건 잘 알겠다. 그 외에 다른 뜻이 더 함축되어보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이런 일로 기분을 흐려놓을 때가 아니다. 얼른 집에 가서 가스 밸브 잘 잠겼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정성들여 썼던 편지를 정리해야 한다. 너무 김카이한테만 집중하는 게 부끄럽기도 해 괜히 다른 멤버들 것도 써놓았다. 이러면 김종인이 좋아 죽으려고 해서 그런 것보다는 단순한 팬으로 보이겠지.

벌써부터 긴장돼 죽을 것 같다. 당일 날 가면 아마 둘 중 하나일 거다. 좋아 죽든지, 긴장돼 죽든지.

 

 

 

 

 

어렸을 적에 누나가 거실에 앉아 가수들 무대 보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는 건 많이 보아왔다. 가끔씩은 자기가 직접 부르기도 했다. 춤까지 외어 저 여자 아이돌과 똑같이 않느냐고 선보여 주었다. 아니라고 하면 곧장 발뒤꿈치가 날아왔기에 절대적으로 긍정해야했던 날을 기억한다. 가수들 춤을 외울 시간에 그 기억력을 다른 곳에 이용하면 좋을 텐데 느꼈다.

어린 박찬열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영혼 없는 박수를 칠 게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다. 저걸 내가 기필코 외우고 말리라. 나는야 인간 박찬열, 하고 말 것이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다급하게 춤 영상을 껐다. 대답도 하기 전에 머리를 구겨 넣어 안쪽을 휘 둘러보는 누나가 무섭다. 머리에 맺힌 물방울들에 이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우리 OXE 애들 노래가 들렸는데.”

 

 

내가 그렇게 노랫소리를 크게 틀어놨던가 하여 침이 넘어갔다. 아니면 그저 저 여인의 본능적인 안테나가 수신율이 높은 것일 수도 있다. 왠지 후자 쪽이 조금 더 가능성이 높았다.

 

 

“누나 걔네 팬이야?”

 

 

내 물음에 눈이 번뜩해졌다. 팬이구나. 눈알이 데굴데굴 움직이다 곧 책상에 꽂혀 내렸다. 아차. 그 때 샀던 앨범 10장중에서 따로 빼놓은 것이 아직 올려져있었다. 상태가 가장 좋은 데다 받고 싶은 마음에 쟁여둔 그걸 그만 누나가 발견하고야 말았다.

 

 

“어? 이거 앨범 이번에 나온 건데.”

 

 

직접 샀냐는 식으로 앨범을 들어다 흔들었다. 응, 직접 샀지. 장롱에 9장 더 있어.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게 원통했다.

 

 

“아니, 학교 여자애가 자기 많이 샀다고 줬어.”

“아아. 그 여자애 팬싸 응모했구만.”

 

 

다 부질 없는 짓이지. 혼잣말인지 다 들으라는 건지 감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맞아, 팬싸 응모했어. 누나 동생이. 누나 앞에 있는 박찬열이. 게다가 당첨까지 되어 며칠 뒤에 그들을 보러간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입이 간질간질했지만 참아야한다.

앨범은 게다가 아직 뜯지 않은 새 것이었다. 뜯어보아도 되냐고 묻는 말에 기꺼이 내주었다. 당일 날까지 먼지 묻히기 싫었는데 이제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미 질문과 동시에 뜯어내고 있었다. 곧이어 누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약간 광적인 느낌이 묻어나왔다.

 

 

“카이다!”

 

 

익숙한 단어에 바로 눈을 갖다 박았다. 그녀는 앨범 사이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집어냈다. 나도 보았다. 카이다. 카이였다. 앨범 봉오리를 펼치자 그 안에서는 작은 카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나는 내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포토카드를 들고 방밖으로 나가버렸다. 자세 그대로 굳어 생각을 정리했다. 카이가 납치당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같이 있던 카이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쫓아갈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방문을 잠그고 장롱을 열어 나머지 9장을 꺼내보는 일이 최선이었다.

한 장씩 비닐을 뜯어가면서 차차 깨달아갔다. 누나가 들고 날아간 카이는 10분의 1 확률로 들어와 있던 것이다.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깟 종잇조각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이냐 묻겠지만 중요하다. 더없이 중요했다. 앨범 10장을 더 사야하는 생각까지 하는 이 시점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찾지 못했다.

 

삶을 뜯어간 마귀를 저주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춤출 의욕도 잃었다. 팬 카페 회원들은 얼마나 당첨이 되었나 보았다. 그런 중에 아주 유용한 정보를 찾아내었다. 다른 사람들 중에도 나와 같은 고민으로 골머리를 썩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팬 사인회 현장에서 카드를 교환한다고 하였다. 당연히 가는 길이었지만 더욱더 가야할 이유가 생겨났다.

바닥에 흩뿌려진 포토카드들 중에 가장 많이 나온 얼굴을 집어 들었다. 아마 이 사람이 그룹 리더였다. 이 얼굴에 모든 것을 걸겠다. 부디 카드를 교환해주는 선량한 팬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L'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ㅊㅈ 카이짱팬 다섯.  (0) 2014.05.17
ㅊㅈ 카이짱팬 넷.  (0) 2014.05.13
ㅊㅈ 카이짱팬 셋.  (0) 2014.05.10
ㅊㅈ 카이짱팬 둘.  (0) 2014.05.09
ㅊㅈ 카이짱팬 서막.  (0) 201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