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카이짱팬 여섯.

L2014. 5. 20. 11:44

 

 

 

 

 

06.

 

방송국에 가고 싶다고 졸랐다. 그 말에 도경수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그럼 가라는 단문만 뱉어냈다. 어떻게 가냐고 묻자 버스 타고 가라고 한다. 누가 그걸 물었나. 같이 가달라는 의미를 빙 돌려 말한 것인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심드렁해 있다. 정수리를 쥐어박고 싶은 욕망에 불탔지만 간신히 참았다. 이 녀석은 때리고 싶게 생겨서는 의외로 어렵다.

한번쯤 음악방송도 보러가고 싶었다. 허나 그곳은 거의 최종 보스가 사는 던전 급에 가까웠다. 방송국 앞은 언제나 여학생들이 진을 쳤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몰래 혼자 가 본적 있긴 하다. 그저 앞에 아주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음에도 다들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방송국 앞에서 서성이는 남성이 어색한 것이다. 달려드는 눈빛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전문가 도씨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전혀 신경 안 쓴다고 쫄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당당한 놈이 밖에서는 절대로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그냥 무시해 버렸다. 다른 스케줄이라도 확인해 볼까 싶어 휴대폰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켰다.

 

 

“아니면 라디오에 사연이라도 보내봐.”

“라디오?”

“사연 뽑히면 전화연결 해주는 코너 있어.”

 

 

그냥 두기가 안쓰러웠는지 생각지도 못한 길을 뚫어준다. 직접 보러가고 싶다니 알려준 방법이 이따위다. 앞에서 직접 움직이는 카이를 보고 싶어 굳이 방송국까지 가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아무리 잘해봤자 목소리다. 잠시 고민했다. 내가 너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상대 쪽에서 갑자기 한 번 크게 박수를 쳤다. 그거 경우에 따라서는 방송국 측에서 불러. 안에 들어갈 수 있어.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에 머리가 번쩍 뜨였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무엇보다 굳이 사람들이랑 부딪치면서 기운 빼지 않는 부분이 괜찮았다. 뽑히면 좋은 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고정은 아니지만 게스트로 무슨 요일에 나올지는 알 수 있다. 그게 도경수가 마저 얹어준 말이었다.

 

집에 가서 보니 벌써 메일을 통해 라디오 게스트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프로그램과 요일을 쫙 뽑아다 보내주었다. 이제부터는 주제에 맞게 사연을 지어내는 일이 남았다. 이것 역시 도경수가 알려주었다. 꼭 사실대로 쓸 필요 없다는 조언 아닌 조언이 메일에 같이 첨부되었다. 그리고 중복되는 내용은 절대 안 된다며 별표까지 붙였다.

자판에 손을 올리기 전에 공중에서 잡아 위로 쭉 당겼다. 뚜두둑, 마디끼리 부딪쳐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과제에 임할 때보다 더욱 진지한 자세였다. 이런 나를 누군가 훔쳐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방문 걸쇠까지 단단히 눌러 잠갔다.

일단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검색했다. 보내준 요일에 맞는 사연으로 무얼 써야하나 살피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주제만 보았을 때는 아주 쉬웠다.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범위가 어디까지냐가 중요하다. 너무 흔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독특해버리면 오히려 부분을 벗어난다. 진위여부에 대해 궁금해 할게 뻔했다. 나보다 훨씬 많은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다. 어벙하게 속이면 멍청하다는 소리만 듣는다. 참신하면서도 재밌는 일을 끌어내는 건 맨 바닥에 우물을 일구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마땅히 떠오르는 내용도 없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한심했다. 사연으로 올릴 흥미로운 사건 하나 없이 살았다. 그 잠깐 동안 삶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우선 쉬자. 이 많은 라디오들 중에서 나와 관련된 주제 하나쯤 없겠어?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이런 일에 쓸 만한 사람이 근처에 마땅치 않다. 도경수? 도와줄 리 없다. 변백현? 도움 받을 생각 없다. 좁은 인맥을 탓하며 이번에는 고개를 길게 돌렸다.

네 번째로 적혀져있는 라디오 사이트에 들어갔다. 저녁 시간에 노련한 입담을 가진 아이돌 멤버 두 명이 이끄는 프로그램이었다. 여기는 제발 할 말한 내용이기를 바랐다.

하얀 바탕에 까만색 굵은 글씨로 쓰인 주제는 머리 한 구석에 확 박혔다. 앞선 것들에 비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나싶어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이거라면 굳이 갖은 방법으로 쥐어짜 생각하지 않아도 가능했다. 예시로 들어준 내용과도 아주 잘 들어맞았다. 번져나가는 박동이 어느새 몸 전체로 느껴졌다. 할 수 있다. 쓸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에 부풀었다.

거의 잊혀져가고 있던 고등학생 시절을 끄집어냈다. 살짝 들췄을 뿐인데 나름대로 쉽게 떠올랐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다 쓴 후 제목을 다듬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특수문자에 있는 검은 색 별을 앞에 달았다. 이렇게 하니 역시 눈에 쑥 들어온다. 도경수가 보낸 메일 내용에서 얻은 숨겨진 팁이다. 이정도면 되겠지. 얼굴을 마주대고 대화하는 건 자신 있었지만 그걸 글로 옮기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길게 주절주절 써도 작가들 흥미만 떨어뜨릴 것 같아 이만 마쳤다.

등록버튼을 누를 때까지 마우스 왼쪽에 닿은 손가락이 계속 떨려왔다. 에라이. 나도 이제 모르겠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미동이 느껴졌다.

등록자 열에 박찬열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박혔다. 이제 된 거다. 밀어닥치는 사연바다에서 헤엄치다 낚싯바늘에 얻어 걸리기를 바란다.

 

 

 

 

 

 

 

 

 

 

 

성적이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그것보다 낮았다. 이유는 알고 있다. 집중할 수 있는 때가 적어진 탓이다. 도서관에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니 책 내용이 눈에만 머물렀다. 변백현은 이번에 올랐다고 자랑만 연속이다. 성적을 캡처해서 바탕화면에 놓고 틈만 나면 들이밀었다. 저놈을 확 쥐어뜯을까. 금발로 색 뺐을 때 머리털을 다 뽑았어야했다.

 

 

"어째 너 공부하는 꼴을 못 봤다 했어."

 

 

등을 두들겨주기에 이제라도 쓸데없이 위로하나했더니 보다 형편없는 말이었다. 둘러진 팔을 위로 높게 잡아 꺾었다. 아프다고 비명에 비명을 지르는데 웃음이 섞여있어 기분이 푹 썩었다. 방학은 언제 오나. 그래야 얘 얼굴을 당분간이라도 안 볼 텐데.

 

 

"야, 내가 밥 살게. 이따가 후문 쪽 카페로 와."

 

 

변백현은 들어 올려 졌던 팔뚝을 탈탈 털면서 입안이 보이게 웃고 가버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 화가 그냥 풀릴 줄 알았나보다. 완전 풀렸다. 진수성찬마냥 크게 먹어야지. 변백현 통장 뚫리는 흥겨운 소리가 벌써부터 들린다.

다음 수업 강의실을 찾아가는데 때마침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프로필 사진이 잘생긴 남정네 눈인 것으로 봐서는 필시 도씨다. 물론 본인 얼굴은 아니었다. 알 사람들은 알아볼, 라인이 뚜렷하고 큼지막한 리더 눈이다. 이걸 바로 눈치 챈 나도 나였다.

 

 

「애들 오늘 입국한대 갈래?」

 

 

공항출두 문자였다. 당분간 해외 스케줄이 있어서 고요했던 서울이 또 떠들썩해지겠다. 강의실 제일 뒤에 자리를 잡고 화면창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일단 손가락을 자판 위에 굴렸다.

 

 

「몇시?」

「도착은 밤 11시쯤일 듯」

 

 

검지로 유리를 툭툭 쳤다. 뒤이어 어느 공항으로 오는지도 알려주었다. 지하철 막차가 몇 시인지 확인하자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슬아슬하다. 내일 수업은 1교시인데다 애들이 정확히 그 때 오리란 보장도 없다. 아직 공항까지는 가본 일이 없었다. 그럼에 오랜만이라는 이유라도 붙이고 가서 카이를 보고 싶었다. 이렇게 다급해지는 기분은 오랜만이다.

교수님이 들어오시는 게 보여 이따가 답하겠다고 했다. 정보망을 주머니에 넣어놓았다손 치더라도 수업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교수님 얼굴이 커졌다 작아졌다, 색깔이 까매졌다 하얘졌다 하였다. 마지막으로 카이 얼굴 본 것이 언제였더라. 해외 일정으로 도경수가 공항에 들렀던 날이 거의 삼일 전이다. 그렇다면 난 이주일정도 그를 보지 못한 것이다. 막상 세보니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친구들 중에는 반년정도는 못보고 산 아이들이 다섯 손가락을 넘어간다. 그럴 것인데 왜 이리도 김종인이라는 이 아이만은 가슴에 담겨있는지 모르겠다. 안보이니까 사무친다. 못 보니까 그립다. 미칠 노릇이다.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는데 또 얼굴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핸드폰을 꺼내들어 사진첩을 켰다. 이렇게 보고나서야 슬슬 이목구비가 바르게 잡힌다.

 

나에게 있는 카이 사진은 딱 세 장이다. 한번 고삐를 놓아버리면 용량이 폭발할 때까지 쑤셔 넣을 것이 염려되어 세 장만 추렸다. 본래 가진 짙은 고동색머리를 내린 모습들이다. 무대 위 카이도 좋지만, 내 옆에 바로 가까이에 있는 듯한 김종인이 더 좋다. 김종인은 어린 티가 나면서 수수하다. 오히려 카이 때보다 다가가기 어려울 때가 많았지만 어째서인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준 이는 김종인이었다. 그에게서는 다른 냄새가 난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 아이만이 가진 독특함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앞에서는 이미 모르는 내용만 언급하고 계신다. 이번 수업은 어차피 교양이었으니 괜찮다. 중간고사 학점이 날 향해 발악하는 모습이 언뜻 스쳤다. 넌 이제 됐어,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기말고사 학점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과연 끝까지 팔 벌린 인자한 형태일지는 모르겠다.

수업은 그냥저냥 마쳤다. 사진첩에 있는 사진 세 장에서 뭘 볼게 있다고 평소에는 한없이 더뎠던 시간이 이리도 빨리 가버렸는지 이해가 안됐다.

강의실을 나서는 동시에 리더짱팬에게 답장을 썼다. 용건만 담아 간결하게 쳤다.

 

 

「이따 거기」

 

 

숫자 1은 역시나 바로 사라졌고 달리 답은 오지 않았다.

잠깐 가서 변백현 통장만 털어나오려 했다. 긴 시간을 허비할 새가 없었다. 수업이 끝난 뒤라 할 일이 많았다. 집에도 가야하고 거기서 다시 밖을 나설 채비가 필요하다. 수업이 오후 여섯시에 끝났고 밥 먹는데 길어봤자 30분, 퇴근시간이니 넉넉잡아 집 가는데 한 시간, 씻고 단장하는데 한 시간, 공항까지 가는 거리가 또 한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맞추면 딱 9시 반이다. 정확히 11시에 한국에 떨어져도 이 시간이면 간신히 세이프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미리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 도선생 1장 1절 말씀, 일찍 가서 기다려라 그러면 그들이 내 앞으로 올 것이다.

그런데 큰 변수가 생겨버렸다. 할애할 시간은 30분밖에 남겨놓지 않았는데 카페에 갔을 때 변백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웬 머리 긴 숙녀분이 그 앞자리에 같이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나쳐갈 뻔했다. 당연히 혼자 있는 멍청한 놈만 찾아 헤맸는데 여자 사람이랑 함께라니. 슬쩍 뒷걸음질해 인사를 건넸다.

 

 

"어, 박찬열 왔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안쪽에 밀어 앉히고 저가 바깥을 꿰찼다. 어쩌다보니 여성분과 마주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머리긴 여성분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기는 동작까지 동시에 넘어갔다.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앞에 놓인 물만 밀어 넘겼다.

 

 

"이쪽은 무용과 지현이. 우리랑 동갑이야. 현이야 얘는 우리 과 박찬열."

 

 

어영부영 서로 인사를 끝냈다. 이미 메뉴는 주문해놨으니 조금만 기다리란다. 아니다. 지금은 어떤 메뉴가 나와도 얹힐 상황이다. 방금 전 물도 간신히 마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기를 바랐다. 허벅지를 질게 꼬집자 인상을 찌푸렸던 변백은 금세 준수한 척할 때 주로 쓰는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요즘에 네가 많이 외로워보이길래."

 

 

안에 숨긴 뼈마디를 단박에 간파했다. 아이돌 쫓아다니는 짓 그만하고 현실에나 충실하라는 뜻이다. 성질이 확 났다. 오래된 친구라고 할지언정 이건 과도한 간섭이다. 더욱이 앞에 덩그러니 앉아 우리 얼굴만 번갈아보는 여성에게는 더 큰 실례였다. 나 잠깐 전화 좀. 그렇게 나가버린 변 양반은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일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동안 식기들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먼저 운을 뗀 건 여성분 쪽이었다.

 

 

"혹시 오늘 다른 약속 있으세요?"

 

 

여자는 오감을 포함 여섯 번째, 육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하였다. 포크에서 미끄러진 웨지감자를 다시 눌러 꽂고 그녀 쪽으로 눈을 올렸다.

 

 

"아니... 계속 시계만 보고 계셔서 다른 약속이라도 있나했어요."

 

 

별다르게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목소리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접시를 바라다보며 흘낏 동자를 움직였다 얼른 다시 내린다. 벌어진 입에는 이어진 말이 나오는 대신 소스에 버무린 비트잎 한 잎이 들어갔다.

내가 그렇게 티나게 행동했나보다. 아니면 줄곧 울리는 메신저 창 때문일 수도 있다. 잘생긴 눈알이 프로필 사진으로 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 흥미를 가장 이끄는 건 당연히 진동 쪽이었다. 학교 끝났냐. 끝난지는 이미 오래다. 답장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6시 48분. 아직은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분을 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7시 반까지는 어떻게든 헤어지도록 하자. 목표를 단단히 잡았다.

계산을 하고 나간 줄 알았더니 변백현 이 놈 자식이 몸만 쏙 빠져나갔다. 결국 내가 긁는 수밖에 없었다. 어색했던 식사도 간신히 목표시간에 맞춰 끝났고 이제 돌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 얻어먹은 게 죄송해서... 커피는 제가 살 게요."

 

 

지현이라는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베푸는 인간성을 가졌나보다. 괜찮아요, 그 간단한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몸은 이미 그대로 따라 나갔다. 옆 건물 다른 카페로 옮겨왔다. 아까보다야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 수월했다. 어차피 동갑이니 말도 놓게 되었고 나름 교점도 많았다.

 

8시 14분. 아직 나는 그녀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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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카이짱팬 다섯.

L2014. 5. 17. 00:12

 

 

 

 

 

05.

 

좋아하는 사람이 꿈에 나타나는 건 당연해. 그리고 네가 한 건 꿈이 아니야. 그럼... 뭔데? 음, 그건 그냥 귀접이지. 귀접은 몸이 피곤할 때 많이 나타나. 아... 하긴. 어제 많이 피곤했지. 그러니까 괜히 김종인한테 미안해하지 마. 그냥 즐겨.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거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며칠 전 도경수와 했던 통화 내용이 계속 머리 안을 휘저었다. 완벽한 답은 얻지 못했지만 한 떨기 걱정은 덜었다. 선 경험자가 괜찮다고 한다면 괜찮은 것이다. 중간 중간마다 날 위로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어구들은 대부분 우리 둘 모두에게 속했다. 도경수는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딱 보면 딱이다.

눈치 빠르다는 소리를 제법 듣고 살아서 알 수 있다. 확실하다. 도경수도 겪은 일이다. 어디까지 갔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모든 일에서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가있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 길을 그대로 걸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답답했다.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방법이 최선이다. 도경수 말이 백 번 맞다. 즐기면 되는 것이다. 즐기자.

 

 

잠들기 전마다 했던 마음가짐 덕분에 뜻이 통했나보다. 이불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결이 불어왔다. 살며시 눈을 뜨자 벽에 붙어있는 내가 느껴졌다. 발밑에 축축한 감각까지 들었다. 단이 긴 검은 바지와 단추가 몇 개 풀어진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현실인 듯 굉장히 생생했다. 내려다보니 풀잎이 주변에 가득이었다. 잔뜩 날이 선 발등 뼈가 바로 보였다. 수평선 너머에 줄지어 피어있는 작은 꽃송이들이 흐리게 반짝였다.

아무리 보아도 바깥인데 등 뒤에는 벽이 있다. 과연 벽일까 싶었는데 마침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귀에서 들리는 건 아니었다. 속 안에서 울려왔다.

 

 

또 보네.

 

 

얼른 몸을 틀어 상대와 마주했다. 그는 나와 등을 대고 있던 것이다. 어쩐지 벽이 들락날락한다했다. 어둡게 깔려있던 침대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얼굴이 이제야 선명해졌다. 하얗게 색이 빠져있는 머리카락이 투명하게 보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눈코입을 보지 못했을 때도 예감하고 있었다.

 

 

김종인.

 

 

두터운 선이 눈과 눈썹 사이를 가르고 있다. 코끝이 망울져보였다. 시선이 둥글게 다가오며 유한 미소를 내보였다. 두툼하게 잘라낸 덩어리 두 개가 가벼이 나눠졌다. 더 이상 엇나갈 수 없게 딱 그 얼굴이었다.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불렀어?

 

 

인식하기 전에 벌써 고개가 끄덕였다. 너무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푸스스 웃음을 냈다. 그러고는 내 턱을 손가락으로 훑어 옆으로 지나갔다. 바로 쫓았는데 벌써 저만치 떨어졌다. 아무리 뛰어도 멀게만 느껴졌다. 잡힐 것처럼 근처에 다가왔다가도 다시 훅 거리가 떨어졌다.

한참 이름을 불렀다. 제발 멈춰달라고, 가지 말아달라고 질러댔다. 김종인은 한없이 달려 나갔다. 속에서 울려대던 목소리마저 묻혀가고 있다.

숨이 차 자리에 우뚝 서서 무릎을 잡았다. 그렇게 몇 번 호흡을 가다듬다 문득 뒤를 돌았다. 풀잎은 여전히 수평선에 걸쳐져 뻗어있다. 여태까지 달려왔던 길을 거슬러 뛰어갔다. 저곳을 향해 간 종인은 이제 점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곳은 신경 쓰지 않고 반대쪽만 집중해서 내달렸다. 일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꽃밭에 코를 묻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처음 눈을 뜬 곳으로 찾아왔다. 거기에는 종인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햇살을 닮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일렁였다. 일정 거리가 되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속으로는 셈을 했다. 꺾어지는 숫자에 맞춰 뒤꿈치를 풀잎에 붙였다. 그가 닿아올 수 있도록 느린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하나. 하나. 하나. 하나... 닿았다.

 

공기를 코로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면 종인은 숨을 내쉰다. 내가 내쉬면 그는 들이쉬었다. 편안한 감각이다. 작은 쉼터 안에 있기라도 한 듯 마음이 놓였다.

맨발바닥이 푹신하게 들어 올려졌다. 축축함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또 끝났구나. 오늘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얼굴을 봤다는 부분이다. 지난밤에 대한 괜한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그 역시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시야를 닫았다. 종인은 여전히 살을 맞대고 서 있다. 확실한 온기가 느껴져서 꿈이 아니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참 견고한 세계라고 마음이 읊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종인 역시 조용히 소리를 내었다.

 

 

꿈이 아니야.

 

 

 

 

 

 

 

 

 

시끄러운 알람 음이 침대에 번져나갔다. 금방이라도 두개골이 깨질 것 같았다. 양 옆으로 정확히 갈라질 소음이다. 눈이 안 떠져서 급박하게 손바닥을 놀렸다. 한참만에야 화면을 밀어 넘기고 고요함을 되찾았다.

첫 번째로 울린 알람만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일은 거의 드물었다. 심해에서 표면으로 한순간에 끌어올려진 느낌이라 개운하지 못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꿈이다. 이 상태로 눈을 감으면 꽃밭으로 전송될 수 있으려나. 꺼풀을 열고 닫을 때마다 앞에 있던 종인이 흐려져 갔다. 이상 생각해 봤자 허무해지기만 더 하겠나.

어깨를 열심히 돌리며 간밤에 날아온 메신저들을 확인해 보았다. 변백현이 잔뜩 날아와서 날 부르고 있었다. 무음이라 다행이지 하마터면 꿈속에서 진동 벌레들을 만날 뻔했다.

하지만 쉽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다 쓸모없는 내용들이라 넘기고 있었는데 단 한 단어가 내 몸뚱이를 세게 때렸다. 뻐근하던 근육들이 일제히 날 짓누르며 침대 밖으로 향했다.

 

 

「과제했냐고 똥멍충아!」

 

 

했을 리 없다.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마당에 끝을 보았을 리 만무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단장을 마치고 튀어나갔다. 익숙한 통화음이 이어지며 얼마 후 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어디야.”

[아 뭐야 박찬열 나 지금 졸려......]

“과제는.”

[어? 어어. 다 했지. 끝냈지.]

 

 

목소리에서 졸음이 묻어나온다. 비몽사몽간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금 찾아가도 제대로 된 사고는 못할 것이라 짐작되었다.

학교 쪽으로 향하던 발을 다른 곳으로 틀었다. 자취하는 놈이라 새벽같이 찾아가도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 이건 편리하게 굴려먹을 수 있다는 뜻도 같이 담고 있다.

시간을 확인하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꿈에서도 그렇게 뛰더니 현실에서도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게 뜀박질이다. 종인이 꿈이 아니라고 말했던 건 이걸 이야기하려던 것일까. 문득 원망스러워졌다.

뛰는 속도를 더 올렸다. 빠르게 맞닿는 공기 감촉에 물기가 어렸다. 원망해야할 건 꿈에서 나타나 뛰어다니게 만든 종인이 아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정하는 순간 급속도로 현실이 다가와 앞을 막아버릴 것이다. 난 아직 축축한 풀잎들이 가득 펼쳐져있는 꽃밭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 전화로 잠에서 깨어난 변백현이 열심히 방어한 덕에 과제를 베끼지 못했다. 이건 절망이었다. 학점이 이렇게 도루묵이 되는가싶어 여기서 변백현을 죽일까하는 생각도 했다. 허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교수님께서 과제 제출 기한을 밀어주셨다. 이건 희망이었다.

수업 중에는 한껏 노려보던 변백현이 다 끝나고 나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목을 졸라왔다. 여전히 머리색은 금빛 찬란하다. 그래도 전보다 상대적으로 편해졌다. 비슷한 머리라 할지라도 얼굴은 전혀 다르다. 변백현은 두 번 죽었다 깨어나도 카이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점점 조르는 힘이 강해져서 천장에 하얀 빛이 보일 지경이라 얼른 손을 쳐냈다. 숨 쉴 구멍은 남겨두고 목을 졸라야지. 눈빛을 보아하니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기야 밤까지 새면서 작성한 과제물인데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여섯 음절로 변백현을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다.

 

 

“돈가스 사 줄게.”

 

 

 

 

 

*

 

 

 

 

 

도경수와 만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앨범 활동하고 있을 때 바짝 달려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때 아니면 마땅히 볼 곳이 없다면서 날 볶아댔다. 학교에 있다가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면 바로 달려 나갔다. 그가 부르는 곳으로 가면 멤버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가 있는 곳으로 멤버들이 따라온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회사 앞까지 가기도 하였다. 고작 세 번 중에 카이를 만난 날은 딱 하루였다. 도경수가 보려는 멤버는 내가 간 날마다 항상 나타났다. 확률 싸움에서 이미 이기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또 엄청나게 크고 대단해 보였다. 실질적으로는 한참 작았지만.

카이가 나타난 날은 처음으로 회사 앞에 찾아갔을 때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위치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경수는 이미 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는지 눈길이 쏠리지 않았다.

대신 내가 모든 것을 받아냈다. 아래쪽에서 향해오는 따끔한 눈초리가 피부를 잘게 두들겨 아팠다. 그나마 안경을 쓰고 있어서 전보다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음악 방송이 끝나고 시간이 꽤 지났다.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서 툴툴거리는 미성들이 주변에서 터져 나왔다. 회식 간 거 아니냐는 울림도 들렸다. 불안함에 도경수를 보자 너무도 확실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회사 뒤쪽으로 주차되는 하얀 차는 전에 봤던 승합차보다 조금 더 작았다. 경차 정도 크기였다. 설마 그 안에서 카이가 나오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안에서는 카이를 비롯한 세 명이 튀어나왔다.

리더도 나오다 안에서 먹은 것으로 보이는 음료수 병 하나를 떨어뜨렸다. 저도 당황했는지 굴러가는 병을 지켜만 보았다. 유리병이라 깨질 줄 알았는데 용케 버티었다.

도경수는 그걸 보고 쪼르르 달려가 병을 주워 리더에게 넘겨주었다. 만담을 옮겨놓은 것 같은 장면이었다. 리더도 그걸 두 손으로 받아 들고 도경수에게 고개를 슬쩍 숙였다.

회사로 들어가는 그들에게 던져지는 것들은 수많은 이름이었다. 아마 자신들 이름이겠지. 도경수는 홀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멤버들을 한없이 쳐다만 보았다. 내가 입을 벌린 건 딱 그 순간이었다.

 

 

“이번 앨범 대박나세요!”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에 들어가려던 멤버들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내 목소리를 제외한 전체가 고요해졌다. 그러고도 몇 번 비슷한 말을 질렀던 것 같다.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종인이 형, 머리 예뻐요. 새하얀 머리를 위로 넘겨 시원스러운 이마가 딱 마음에 들었다.

 

몇 분 뒤, 카이는 매니저를 동반하고 다시 나와 차를 탔다. 복장이 다소 편해져 있었다. 저쪽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모였다. 이번에도 역시 응원을 해주려 숨을 크게 들이쉬는데 곧바로 막혔다.

카이가 뒷좌석에 타려다 말고 얼굴을 돌렸다. 공중에서 얽힌 시선에 확 굳어버렸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정확히 이쪽을 향한 손바닥은 양쪽으로 흔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곧장 허리를 숙였다. 연속적으로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그는 얼른 문을 닫았고 차는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옆구리가 쿡 찔려와 내려다보니 도경수였다. 왠지 한 건 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카이는 머리 스타일을 바꿨다.

 

후로 두 번 더 갔을 때는 어쩐 일인지 카이만 만나지 못했다. 아마 시기가 잘 맞지 않았던가보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 삼았다. 도경수는 저 혼자 신나서 리더와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말했다.

카이가 없을 때도 난 계속해서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더욱이 리더는 도경수말고도 내 얼굴까지 얼핏 기억해주는 듯 싶었다. 카이에게 주려던 선물을 리더에게 주기도 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약속을 잡지 않고 무작정 상대를 기다리는 일은 힘들다. 체력이 무서울 정도로 깎여갔다. 이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집에 오면 눅진해져 바로 잠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과제는 날 붙잡았고, 더 나아가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항상 가는 건 아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어색한 때는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일도 그러했다.

오늘은 언제나처럼 멤버들이 가끔 오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안을 비롯해서 바깥까지 역시 사람들이 우글우글하다. 조금 일찍 와서 자리를 잡기를 잘했다. 이제 이런 계산 머리까지 돌아가는 것을 보니 도경수가 옮은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여유로울 줄 알았으면 노트북이라도 가져올 걸. 기한이 모레까지인 과제가 남아있다. 뭐, 밤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일단 그렇게 일단락 짓고 유자차를 빨았다. 도경수는 건너편에서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떠먹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뒹굴뒹굴 구르다 딱 멈춰 섰다. 포크까지 테이블에 소리 나게 놓는다.

누가 왔나 싶어서 도경수가 보는 곳을 같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저 여자 손님들만이 도란도란 모여 있을 따름이다. 그를 마주하고 보니까 이번에는 그 큰 눈알이 이쪽을 향했다.

 

 

“왜 그래.”

“너 혹시 종이 있어?”

 

 

뜬금없이 종이는 왜 찾나 싶어 받아온 영수증을 슥 내밀었더니 이게 아니란다. 쉽게 버리지 않는 수첩이 필요하다고 했다. 무슨 중요한 걸 써야 된다고 수첩까지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애꿎은 지갑만 뒤졌다.

순간 무슨 생각이라도 났는지 도경수가 신속하게 지갑을 뺏어갔다. 손에 걸려 나온 물건은 내 신분증이었다. 가락 사이마다 움직이는 놀림이 제법 익숙했다.

저 신분증은 도대체 왜 이리 도경수 손에 자주 들어가는 걸까. 지갑 안쪽에서 뭔가 재밌는거라도 봤는지 잠깐 헛웃음을 냈다. 숨겨둔 카이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 가방에서 꺼낸 얇은 마카 뚜껑을 소리 나게 열었다. 망설임 없이 뒤편을 돌려 무언가를 열심히 긁적거린다.

 

 

“뭐해.”

 

 

메모를 할 생각이라면 거긴 완전 잘못된 곳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빼앗지도 못했다.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민증은 평생 가니까.”

 

 

착실하게 적어낸 끝에 점까지 찍고 돌려주었다. 그 평생 가는 민증에 대체 뭘 적어낸 건지 얼른 들어 확인했다.

낯선 주소가 길게 적혀있었다. 우리 집 주소는 확실히 아니다. 이사를 몇 번이나 다니는 바람에 신분증에 나와 있는 주소를 굳이 바꾸지 않았었다. 사실 귀찮았다. 그런데 도경수가 단숨에 우리 집 주소를 이상하게 바꿔놓았다.

 

 

“숙소 주소야.”

 

 

그래서 그렇게 비밀스러운 곳을 원했던 것이다. 혹여나 나중에 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알아두라고 했다. 이제는 내가 알아도 될 것 같다나 뭐라나. 믿음이 생겼단다.

이 말은 어쩐지 가시가 담겨있었다. 꽤 많은 일정을 같이 다녀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도경수는 아니었나보다. 카페에서 케이크 먹다가 생긴 믿음은 어디서 뛰쳐나온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주소를 속으로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학교에서는 그나마 가까웠다. 고맙다고 하자 그는 어느 새 깨끗이 비워낸 접시를 두 번 두들겼다.

도경수 믿음은 4500원짜리 조각케이크 값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신분증을 다시 끼워 넣은 지갑을 들고 일어서 카운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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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카이짱팬 넷.

L2014. 5. 13. 10:50

 

 

 

 

 

04.

 

 

예상은 했지만 도경수는 아주 전문적이었다. 그가 가진 능력은 매니저와 멤버들 연락망을 가진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인회 일정이 끝나고 천천히 나가려고 하는 때에 팔목을 잡혔다.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뚫고 지나갔다. 밀치는 사람 따로, 사과하는 사람 따로 있었다.

많은 이들의 눈총이 날 헤집어놓았다. 도경수는 밑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았나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말해봤자 그가 좋은 소리를 해줄리 없었다.

대체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건지 금세 숨이 찼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뒤에 있는 나도 신경을 써 줬으면 하였다.

비상구와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타면서 도착한 곳은 지하였다. 타이어와 바닥이 마찰하면서 만들어진 지독한 냄새가 가득했다. 도경수가 차가 있어서 이리로 왔나하는 생각은 바로 접었다.

그는 주차되어있는 승합차 두 대를 가리켰다. 경호원같이 보이는 사람들도 몇 명 주변에 돌아다녔다. 작은 몸이 밀치듯 시멘트벽에 날 숨겨두었다.

 

 

“멤버들 나오면 저쪽으로 갈 거야. 잘 따라와.”

 

 

출구로 이어진 길을 눈짓으로 쭉 살폈다. 꽤 긴데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자 경호원들이 반복해서 소리쳤다. 얼른 위로 올라가라고 하는데 순간 엄청 찔렸다. 유난히 큰 눈이 뻔뻔하게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그나마 위안했다.

숨이 막히지도 않은지 마스크를 쓴 채다. 경호원들은 수상한 행색을 한 도경수를 무시했다. 나 역시 그다지 옆에 붙어있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보는 저 눈초리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이곳을 벗어났을 것이다.

어디선가 여학생들이 구석구석에서 뛰쳐나왔다. 넓은 주차장 전체에 비명이 얽혔다. 경호원 여러 명이 일순간 한쪽으로 붙었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틈바귀에 카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토기가 몰렸다. 머리 안쪽이 웅웅거리고 생각이 하얗게 불탔다.

옷깃이 끌려갔다. 도경수가 잡아끌어 당겼다.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고, 그걸 신호로 그는 아주 빠르게 차 사이를 넘어갔다. 그 뒤를 따라가기가 무섭게 차 역시 저쪽에서부터 출발했다. 정확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도경수는 어느 때부터 발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흰색 승합차를 노려보았다. 나도 옆에 같이 서서 차를 가만 응시했다. 조수석에는 팀 리더가 타고 있었다. 도경수 역시 이를 본 듯했다. 마스크를 집어 내리고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경례 자세를 취한다. 그 멤버도 이런 도경수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반갑다는 느낌이 확 드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알만했다. 역시 도경수는 비범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저들이 자신을 기억하는지 포인트를 잘 잡고 있다. 똑같이 해야 하나 머뭇거리다 타이밍을 놓쳤다. 대신 본능이 예의를 붙잡았다. 차가 가까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두 대 모두 그렇게 떠나갔다.

 

 

“오, 괜찮은데?”

“뭐가?”

“그렇게 인사하는 거.”

 

 

작은 머리통에서 데이터를 저장하는 철컥철컥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거수경례한 사람이 말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 중 어느 차에 카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인사 하는 건 봐줬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하나씩 욕심이 늘어가는 것인가 보다. 아무것도 몰랐던 몇 시간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눅눅한 냄새는 계속해서 풍겨오고 있었다. 조금 어지럽기도 해서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도경수는 이미 마스크를 올려 쓴 뒤였다.

저게 냄새를 좀 막아주는 역할도 하는 것 같다. 황사용 마스크라도 다음에는 들고 와볼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뜸 내 핸드폰을 들고 간 그는 무언가를 입력했다. 전화를 거는 폼으로 봐서는 자기 번호를 해놓은 듯하다. 엄청난 거라도 준 양 건네주는 손에서 자신감이 넘쳐 나왔다.

 

 

“너 내 일행해라.”

 

 

도경수가 도대체 어디까지 내 범주를 벗어날지 감히 예상도 안 된다. 대답은 굳이 하지 않았다. 거절은 거절한다는 눈이었다.

남자 팬이 흔치 않은 이곳에서 아마 많이 외로웠나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 역시도 이를 놓치면 안됐다. 우리 둘은 조용히 손을 마주 잡았다.

 

 

 

 

 

현실성이 부족해진 게 확실하다.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피곤한 것은 확실했다. 내일은 오전 수업이라서 이렇게 뜬눈으로 있을 수 없다. 억지로 눈을 우겨 닫고 나서도 여전히 깜빡였다.

천장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저 얼굴이 진짜로 앞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냐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한다.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이지지 않았다. 너야말로 지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얼굴만 둥둥 떠 있던 그림자 덩어리가 점점 모양을 바꿔갔다. 팔다리가 생겨나는가 싶더니 알몸이 되어 배 위에 떨어졌다. 너무 어두워서 그런지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도 들린다기보다는 안쪽에서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악수를 못해주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대신 그것보다 더 좋은 걸 해주겠다면서 밋밋한 가슴을 가까이 붙였다. 따뜻한 숨이 코 바로 앞에서 끼쳐왔다. 아랫도리에 둥글게 문질러지는 자극에 전신이 굳었다.

숙맥처럼 보였는지 잘 빠진 그림자는 부서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어딘지 익숙한 소음이었다. 창가에서 희미하게 들어오던 달빛이 힘을 더했다. 흐드러져있는 금색 머리카락이 맨 먼저 보였다. 진한 피부가 묘한 향을 만들어내며 하늘거렸다. 내 위에 올라가있는 사람은 확실히 남자였고 알고 있는 이였다. 남자는 혀로 입술을 야살스럽게 굴렸다.

 

 

 

 

 

“변백현, 죽여 버린다.”

“이 새끼 왜 또 아침부터 지랄.”

 

 

결국 방이 푸르스름하게 변해가는 시간이 되어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심한 가위에 눌린 터라 눈 주변이 시커멓다. 거울 속에서 마주한 얼굴은 가히 가관이다.

동방이라도 가서 눈을 붙일까하다 자체휴강이 되면 큰일이라 강의실로 왔다. 한참 뒤 변백현이 왔을 때 욕이 절로 나왔다. 잠을 푹 자지 못해서 괜히 기분이 나빴던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연유였다. 다른 이들이 봤을 때 어이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머리색 뺐냐.”

“어제 했는데. 왜.”

 

 

변백현은 괜히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별로야? 묻는다. 어울리는 건 나중 문제였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저 머리스타일이 눈에 밟혀 죽겠다. 전등에 따라 반짝이는 금발 머리가 유독 거슬렸다.

밤새 양기를 뺏어간 남자와 같은 머리를 한 변백현은 너무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심한 욕을 지껄여주고 싶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 껴서 나타난 금발 남자는 충격을 남기고 떠났다. 분명 얼굴을 봤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 더 뇌리에 박혔다. 처음이었다. 남자 때문에 팬티가 젖어있는 경험은. 나이 먹고 하얗게 묻은 속옷을 내 손으로 직접 빨게 될 줄이야. 묘한 죄책감과 책임감만은 예전에 느꼈던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남자가 나와서 애무한 것 정도로 몽정을 해 버린 난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가. 이런 말을 변백현에게 해봤자 별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재차 노려보는 것으로 대화를 끊었다. 그 역시 아침부터 욕을 들어서인지 입술을 쭉 내밀고 멀리 떨어져 앉았다.

 

빈 시간을 이용해서 캠퍼스 밖으로 나왔다.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도경수라 저장돼 있는 번호를 찾아 누르려다 멈칫 했다. 전화로 하기에는 뭔가 민망한 내용이다. 번호 자체는 그가 먼저 알려주었다. 그래도 이런 용도로 쓰라고 준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자로 보낼까, 메신저로 보낼까 한참을 고민하다 일단 카페에 들어갔다.

음료를 앞에 두고 열심히 화면을 만졌다. 눈을 감아 곰곰 떠올려 보았다. 어릴 적에 했던 첫 몽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수영복을 입은 갈색 머리 여인이 숲 속에서 나타나 날 호수로 이끌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그 때는 분명 여자였는데......

카이를 본 뒤로 내 안에 새겨져있던 정의가 미묘하게 엇갈려가고 있다. 새벽에 나왔던 그 남자가 알고 보니 김종인이라면 난 이제 완전히 끝이다.

관자놀이를 누가 누르기라도 하는지 무지막지하게 저려왔다. 아무리 봐도 너무도 확실히 끝을 향해 곧장 뛰어가고 있다. 한 걸음마다 데드라인이 다섯 걸음 가까워져 온다.

어제 만났던 종인은 머리를 노랗게 빼서 야한 느낌이 강했었다. 그 얼굴이 오늘 새벽에 나타난 남자와 자꾸 겹쳐 보여 더 죽을 것 같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야. 수도 없이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는 김종인이었다.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종인이라고 확신하자 점점 기억이 또렷해진다.

도경수라면 혹시나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것대로 궁금하면서도 징그럽다. 한 자리에서 고민을 반복했다. 커피는 서서히 식어갔다.

그냥 한번 물어보자는 마음에서 서둘러 자판을 쳤다. 혹시 팀 리더가 꿈에 나왔던 적이 있냐고 물었다. 확인을 누르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숫자 1이 사라졌다. 답장 또한 아주 빨랐다.

 

 

「ㅇㅇ」

 

 

반발할 수 없는 명확한 대답이었다. 그랬구나. 하긴 도경수 입장에서 보면 안 나온 쪽이 더 억울하고 이상할 것 같다. 너무 뻔한 질문을 했다. 내가 필요한 건 이것보다 더 깊은 내용인데 말이다. 어떻게 돌려 말해야 될지 정리가 되지 않아 엄지만 공중에서 움직였다. 화면에 상대 쪽 말풍선이 하나 더 생겨났다.

 

 

「왜? 너 김종인나옴?」

 

 

너무 놀라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목구멍이 바짝 조여 들어온다. 쉽사리 긍정하는 뜻이 손으로 옮겨가기는 어려웠다. 도경수는 꽤 감이 좋아 보였다. 내가 어떤 말을 뱉으면 그 뒤까지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는 내용이 담긴 답장을 가까스로 보냈다.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꿀꺽꿀꺽 넘겼다. 이번에도 숫자는 금방 사라졌다.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걱정과 두려움을 같이 껴안고 있었다.

뜬금없이 진동이 울려와서 보니 도경수라는 석자가 버젓이 화면에 떴다. 전화가 올 정도면 이게 그리 중요한 일이었던가 곱씹기까지 했다. 이거 받아도 되는 건가.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먼저 확인했다. 창가 자리에 이어폰 꽂은 여성 분, 두 테이블 옆에 커플 한 쌍, 조금 멀리서는 우리 학교 학생들로 보이는 몇 명이 옹기종기 모였다. 이정도면 전화를 받을만하다. 커피로 한 번 더 목을 축였다.

 

 

“여보세,”

[너 김종인이랑 잤냐?]

 

 

지금은 커피를 마실 때가 아니었다. 아직 끝 쪽에 머물러있던 커피가 순간 열린 기도 쪽으로 흘러갔다. 토하듯 터져 나오는 갈색 액체는 주변인들 시야에도 정확히 걸렸다.

도경수는 이제 무서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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