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히방

공지사항

ㅊㅈ 목련

S2014. 4. 30. 00:06

 

 

 

꽃을 닮았다하였다. 늘어진 천을 휘어잡아 끌어당기며 그리 귓가에 속삭였다. 얌전히 있으라 명을 받았으나 감히 밀쳐냈다. 목주변까지 내려오는 단내가 너무도 강한 이유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그 꽃이 무엇이냐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않았다. 그저 그날따라 유난히 휘황찬란하게 비추어오는 달만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꽃. 사내로 태어난 자에게 해줄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 이는 꿋꿋이 입술을 달싹였다. 제법 깔끔하게 떨어지는 턱선도 같이 움직이고있어 쉽게 눈을 뗄 수 없던 것을 기억한다.


종인아.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은 때에따라 무게가 달랐다. 마치 연못 위를 걸어다니는 선인이라도 된 것처럼 가볍기도, 빗방울에 가라앉아가는 잎사귀처럼 무겁기도했다.


어찌 부르시옵니까.

아직은 날이 쌀쌀했다. 그래서 더욱 달빛이 맑게 드리워졌는지도 모른다. 나뭇가지가 그림자로 이루어져 방 안쪽까지 넓게 펼쳐왔다. 또 다시 향기가 풍겼다. 사뭇 익숙했다. 그에게서 흘러넘치는 것이라 여겼다 나중에야 비로소 온전한 방향을 찾았다.
정확히는 목덜미였다. 바로 뒤에서 넘쳐났다. 딱히 거울로 보지 않고 손을 가져다댔다. 비단 촉감이 엉겨오는가 싶더니 그가 붙였을 것이 당연한 꽃잎이 잡혔다. 하얀 불빛을 따로 켜놓기라도 한듯 밝았다. 아직 봉오리였지만 향은 충분했다. 영문을 물으려 슬쩍 내밀자 입매를 위로 쭉 밀고 눈을 휘었다. 장난이라도 치려고 그랬던 것인지 큭큭대는 소리마저 냈다.
역시 닮았구나. 예? 너는 그것이야. 아직 여물지않은 목련.
뒤는 작은 탄식이었다. 커다랗게 떠 있던 달이 가려지고 까만 풍경이 가득 차올랐다. 터져나오는 기침 소리가 거칠었다. 어찌 손 써볼 틈도 없었다. 그가 직접 막아섰다. 후두둑하며 목구멍에서 곧장 무언가 쏟아져 나오는 울림까지 들렸다. 순간 코를 시큰하게 뒤흔드는 비린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였다.
그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아오는 손길, 바라보던 눈짓 심지어 겹쳐온 피부결마저 모두 병든 것이었다. 애초에 그러했다. 별다른 기대를 가지진 않았다. 알고있어 놓아주기 쉬웠다.




"...쉬웠다."




한번 입으로 내뱉자 끓어오르는 공명이 판을 뒤집었다. 쉽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았다. 쉬웠을리 없다. 그를 지워가는 일은 맨살을 베어내는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남모를 비명을 질렀다.
쉬워보여야 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연도 있어 보이면 안되었다. 그는 한 집안에 자리 잡고있던 산이다. 어느 날부터는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산은 우뚝 서 있었다. 박찬열. 차라리 아무것도 남기지말 것을, 그는 자신대신에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새기고 떠났다.
지독하게 진해지는 봄이 오면 살아나는 그를 만나기 위하여 신을 신는다. 달을 머금은 나무 꽃봉오리 하나를 떠낸다. 목덜미에 느리게 묻혀내면 어느새 다가와있다.
종인아, 너는 꽃을 닮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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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초콜릿

S2014. 4. 29. 23:50

 

 

경쾌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둑하게 내려앉았던 공간에 흐린 빛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눅눅하면서도 달큼한 향내가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꽉 막혀 환기가 되지 않았다. 남자가 문을 놓자 방울은 격렬하게 제 몸을 뒤흔들다 이내 진정된다. 그나마 들어오던 바깥이 차단되었다. 다시 어두워졌다. 안에 있던 모든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그는 특별할 것 없다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소리에 하나에도 품위가 묻어나왔다.

코트는 내부와 엮여 무거운 차림이었다. 그 안에서 언뜻 정복자가 내뿜는 기운이 보였다. 색이 다른 한 명이 안쪽을 어지럽혔다. 너무도 진했다. 어깨를 움츠리는 자들이 여럿이었다. 그 중에서도 멋모르고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있던 이는 남자가 바로 앞으로 걸어오자 시선을 내렸다. 꼬리가 있었다면 땅에 처박힌 꼴이었다.

원형으로 설계되어있는 가게 내부에는 사람들이 여럿 자리하였다. 곳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무런 말도, 소리도 내지 않고 눈만 떴다. 그들은 제법 잘 차려입은 행색이었으나 노곤한 눈빛들이었다. 마치 주변 향기에 취해있는 듯 보였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한 손마다 들고 있는 은색 접시였다. 빛이 거의 없는데도 유독 반짝거렸다. 위에는 초콜릿 한 조각이 놓였다. 모양은 각자 달랐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그들을 음미하였다. 구두 굽이 마찰하는 소리만 멀리까지 공명하였다.

중간 쯤 도달한 그는 마침내 발을 멈췄다. 여전히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본다. 방금 전까지는 침침했던 눈동자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 앞에는 머리색을 하얗게 뺀 소년이 다리를 여유롭게 꼬아 앉아있었다. 턱을 괴고 있는 손에 접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낸 채로 꺼풀을 닫았다 열고 하는 것이었다. 저들과는 확연히 다른 기운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턱을 쥐었다. 달려 올라가서야 눈을 마주했다. 진하게 패여 있는 눈두덩을 잠시 보다 시선이 내려온 남자는 진 미소를 지었다. 두툼한 입술에 머금고 있는 둥근 초콜릿은 농익어있다. 은물결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쥐어 고개를 꺾게 하였다. 남자는 허리를 숙였다. 그대로 목구멍까지 훑어낸 초콜릿은 상당히 달았다.

빨간 혀가 잠깐 튀어나오며 눅진한 숨을 뱉어내었다. 오히려 소년이 먼저 물어 씹었다. 기세를 죽일 생각이 도무지 없어 보였다.

그는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소년이 앉아있는 자리 바로 옆에 놓았다. 박찬열. 세 글자만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명함을 두고는 곧바로 등을 돌려 나머지 길을 밟아나갔다. 여전히 여유는 놓지 않았다. 들어오기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뒤에 소년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게 안 모든 시선이 이번에는 양쪽으로 나뉘었다. 방울 소리는 큼지막하게 사방을 뛰어다녔고 얼마 후, 가라앉았다.

 

까만 리무진 한 대가 유유히 도로를 지났다. 안은 제법 텁텁한 공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찬열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제 얼굴 쪽으로 소년을 끌어당겼다. 당연하게 벌려온 입술 끝에서는 초콜릿 향이 묻어났다.

 

 

“이름은?”

 

 

거칠게 몰아쉬는 숨에서도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미처 답할 새도 없이 다시 집어삼켰다. 소년은 모든 것을 다 받아내었다. 일순간 밀려올라오는 아랫도리에도 같이 움직여주었다. 옷끼리 마찰하며 더욱 또렷한 자극을 전했다.

 

 

“카이.”

“그거 말고.”

 

 

찬열이 내는 말에 카이는 입매를 잘게 구겼다. 가게에서 쓰는 가짜는 쓸모없다는 의미였다. 입가를 더 미세하게 부수어 위로 쭉 끌어당긴 그는 밀려오는 찬열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뚝뚝 끊어지는 듯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 싶어?”

 

 

소년은 몸을 돌려내어 그 위로 올라갔다. 옷은 여전히 갖추어진 상태였다. 척추 한 가운데를 눌러 상체를 깊게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입술 위에서 숨결을 불어넣었다.

 

 

“알아내봐.”

 

 

그것을 신호로 허리에는 커다란 손이 감겨왔다. 아주 느린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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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ㅈ 향

S2014. 4. 29. 23:48

 





진한 향냄새가 피어올랐다. 곰방대 끝에서 빨간 불을 지피며 타들어가는 것이 제법 맵다. 깊게 들이쉰 이는 한동안 숨을 멈춘 듯 눈을 감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밀어 올라가는 눈꺼풀이 느렸다. 한숨과 함께 내쉰 하얀 김이 구불구불한 모양을 가지고 천장으로 넓게 퍼져갔다.

귀하게 들여온 것이라 하여 서랍장 깊숙이 넣어놓았던 물건이다. 그리 달라고 졸라댈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양반이 그것을 오늘에야 쥐어주었다. 최근에는 고집 따위 딱 버리고 가만히 시키는 대로 해서 상을 준 것 인가보다. 종인은 몇 번이고 그 진득한 냄새를 목구멍으로 들이켰다.

몸을 감싸 앉은 주름진 천이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세밀하게 반응한다. 흘러나는 연기가 그대로 품속에 내려앉았다. 천에 널린 죽어있던 동백꽃문양이 꿈틀거리고 있다.

향을 한참 머금고 있던 그는 어느 순간, 혼을 뺀 듯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팔다리가 방금 잡아 올린 활어처럼 튀어 오르기도 했다.

동동거리던 주변 울림이 서서히 멈췄다. 나른하게 의자 위에 퍼져있던 몸이 급한 숨을 뻗어냈다. 속눈썹이 파르르 여린 움직임을 가졌다. 마침내 늘어져갔다. 텅 빈 육체 위로 곧 그림자 두 개가 다가섰다.

머리통을 잡아 쥐고 온갖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앞에 놓인 풍경이 자못 낯설어 시선이 좌우로 바삐 움직였다. 한쪽을 제외한 사방이 벽이었다. 종이로 된 미닫이가 다른 장소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누워있는 곳은 평범한 이불이다. 분명 가게 안쪽 어딘가에 있는 방임에는 틀림없었다. 여전히 향냄새가 났다.

골을 부여잡아 간신히 허리를 일으켰다. 얼마간 쳐진 눈매로 주변을 살피던 종인은 손바닥을 입 바로 앞에 가져다 길게 숨을 내었다. 바로 들이쉬기가 무섭게 갑자기 눈썹 사이가 팍 구겨졌다.

 

 

씨발, 여기서 나는 거잖아.

 

 

가게가 아니다. 바로 목울대를 쭉 끓어다 바닥에 갈겼다. 입가에 묻어낸 침을 슥 닦아냈다. 투명한 실과 함께 붉은 선혈이 묻었다. 고개를 꺾고 가만히 바라보며 혀로 입 주변을 핥아본다. 찹찹하는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더니 초점을 다시 했다. 자세히 보니 연지였다. 평소에 바르던 것보다 색이 둘 정도는 진했다. 피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시뻘건 색조였다.

이제는 시야를 더 넓혔는지 팔과 다리를 들어 옷을 살펴본다. 옷마저 달라졌다. 가게 안에서 입고 있던 것보다 조금 더 속살이 비친다. 그리 하얗지 않은 몸 색이라 이런 조화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뜯어내던 종인이 뜬금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고개를 꺾으며 깔깔대던 그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눈동자를 느리게 쭉 굴렸다. 웃음은 급작스레 끊겼다.

또 어떤 취향 더러운 색골이야.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 여겼는지 큰소리로 벽에 던졌다. 맞을 거면 맞으라는 듯 제법 날카로운 음색이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진동은 일정 장소에 딱 멈추었다. 핑그르르 돌던 팽이가 한 자리에 곧추선 것처럼 어색한 침묵이었다.

맨발이 바닥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소음이 얼마간 일렁였다. 종이로 이루어진 미닫이문이 조심스러울 정도로 고요하게 옆으로 밀렸다. 곧장 그곳을 향해 눈길이 돌아갔다. 길게 찢어진 눈과 마주친 이는 다소 겁이 많아 보였다. 어둠 속에서 몸을 반만 내보이고 어딘지 불완전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김..종인?”

 

 

달달 떨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나니 종인이 짓는 표정이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쭉 펴고 있던 다리를 하나 들어 반대쪽으로 꼬았다. 안주인이라도 되는 모양새였다.

 

 

“넌 뭐야, 씨발.”

 

 

튀어나온 욕지기에 상대는 환한 웃음을 내비추었다. 방금 낸 말이 김종인임을 시인하는 가장 알맞은 문장이라는 것 같았다. 남자는 문을 조금 더 밀어열고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쩌덕, 쩌덕. 맨발은 계속해서 바닥에 달라붙었다.

반쪽이 가려져 있을 때보다 큰 키였다. 하얀색 드레스셔츠를 입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했다. 내려다보는 눈 생김새가 동그랗게 떠 있었다. 창촌에 발 디딜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고전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이 더 어울렸다. 딱 샌님다운 모습이다.

 

 

“이거 그쪽이 입혔어?”

 

 

팔을 들자 속곳 없이 얇게 자리한 비단만이 흩날렸다. 통이 넓은 안쪽으로는 바람과 함께 눈알이 굴러들었다. 종인은 시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부러 팔을 더 높이 올렸다. 옷은 미끄러지듯 흘러 종인의 피부를 두들겼다. 대조되는 색깔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남자가 내는 눈빛은 방금 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있었다. 샌님이어도 일단 달렸다 이건가.

아직도 향내가 가득히 풍겨 나오는 입안이 거슬려 혀를 끝까지 눌러 뺐다. 이렇게 하니 언뜻 구역질이 나올 것도 같다. 괴악스러운 표정이다. 남자가 저를 보고 벙하게 짓는 얼굴이 재밌다. 잠시 마주하다 얼른 입을 쏙 다물고 이번에는 얄궂게 웃었다.

 

 

“당신 이름은 뭐야?”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질문에 대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대신에 남자는 한달음에 종인이 있는 이불로 다가와 입술을 물어 씹었다. 음산하게 내려앉아 있던 속 알맹이에 다른 향이 섞였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찰나라 종인은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했다. 엄지를 꺾어 억지로 벌려진 입 안으로 쑥 밀어 넣는 오동통한 혀를 저도 모르게 꽉 물었다. 피 맛이 났다. 꽤 고통스러울 텐데도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위로 겹쳐와 이제는 아예 종인을 눕히고 배에 자리를 잡는다. 손목까지 짓눌렸다. 숨구멍 하나 만들어주지 않고 덮어왔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것에서 비릿한 잔향이 났다.

김종인은 여태 수많은 손님들을 접대해 왔다. 뒤를 풀지도 않고 제멋대로 쑤셔 넣는 인간, 온몸을 밧줄로 묶어 눈으로 구경만 하는 인간, 과일즙을 얼려와 피부에 쳐 바르는 인간. 다시는 상종하기 싫은 부류가 대다수였다. 인간쓰레기들을 대하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여겼다. 몸에 값을 매겨 내놓기 시작하면서 얻은 것은 별 것 없었다. 그 중에서 그나마 자신을 굳건하게 자리할 수 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여유. 어떠한 상황에서도 웃었다. 네가 어떤 걸 하려고 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는 여유가 필요했다. 오히려 상대를 당황시킨 후라면 다음부터는 자신이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김종인은 모든 행동과 생각을 지워냈다. 샌님이라 무시했던 까닭인지 도무지 앞을 읽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남자에게서 나는 향이 텁텁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내가 목구멍 안까지 밀고 들어와 퍼져나갔다. 점막 안쪽을 훑어내고 있는 살덩어리는 찹쌀을 엮은 듯 끈적거렸다. 자꾸만 달라붙어 아프기도 했다. 붙었다 떨어지고, 붙었다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덕분에 푹한 숨결이 들쑥날쑥하게 넘나들었다.

어느 새 앞섶을 휘젓고 있다. 걷어낸 비단으로 함께 잡아채 매끄러움이 더해졌다. 익숙한 느낌이 감겨오자 드디어 머리를 굴릴 수 있게 되었다. 허리를 길게 들어 올려 아랫도리가 아예 남자의 손에 꽉 차게 만들었다. 고개를 휘어 각도를 뒤집자 그제야 머리통이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아래쪽은 잡혀있었지만 숨을 쉴 수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종인은 피와 침이 뒤섞여 엉망이 됐을 입 주변을 슬쩍 핥아냈다. 남자는 그것에도 어쩐지 황홀하다는 인상을 내었다. 다 큰 남자가, 그것도 자신보다 큰 남성이 발그레한 양 볼을 하고 있는 꼴은 썩 달갑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은 이것도 일이니 웃는다. 주인 새끼가 전에 했던 말이 귀 바로 옆에서 지르는 것 같이 느껴져서라도 웃는다. 넌 웃는 얼굴이 제일 엿 같아. 그러니까 웃는다. 죽을 때도 웃으면서 죽을 거다.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밝게 웃고 있을 것이다.

 

 

“당신 이름.”

 

 

어느 정도 숨이 골라지고 나서야 종인은 다시 말을 낼 수 있었다. 이 질문 어디에 이 사람을 건드리는 단추가 있었는지 몰라도 일단 묻고 싶었다. 남자는 문틈으로 얼굴을 보자마자 김종인이라 불렀다. 썩 반갑다는 듯 목소리가 다소 들떠있었다. 그러니 종인도 알아야했다.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야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박찬열...”

 

 

이름을 너무 작게 말해서 어느 정도는 유추해야했다. 이런 이름은 모른다. 그리 나쁘지도 않은데 왜 자신감이 없는지 알 수 없었다. 별 거 아니겠지. 그리 생각을 단절했다.

느리게 감았다 떠도 여전히 박찬열은 두 볼이 붉었다. 한숨이 나오려했지만 찬열은 손님이다. 그가 원하는 정도를 최대한 채워주고 자신은 얼른 가게로 돌아가야 했다. 한숨은 그 뒤에 뿜어도 괜찮다. 망할 안주인이 오늘은 또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을 자신 앞으로 돌려놨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연스러운 손길로 바지를 잡아 끌렀다. 춤이 잔뜩 쟁여져 있어 손놀림이 다급해 보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당황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었으니 상으로 조금 더 길게 해줄 생각도 해보았다. 딱히 시간제한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오늘은 하루 종일 여기서 일하라는 뜻을 내포했을 수도 있다. 쉽게 시간을 떼려는 소리가 핑글핑글 들려온다.

가만히 종인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찬열은 끝내 참지 못하고 어깨를 다시 눌렀다. 퍽하고 이불 위로 떨어졌다. 급했던 전보다는 천천히 목덜미부터 감싸 안으며 도톰한 입술을 연신 찍어냈다. 약하게 씹기도 하고 소리 나게 빨기도 했다.

 

 

“왜 이렇게 급해.”

 

 

저도 모르게 키득대는 웃음이 같이 나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은 쉬지 않고 핑글핑글 돌아가고 있다. 길게 늘어진 옷을 들어 얼굴 위로 덮었다.

 

 

“얼른 끝내. 주인 화내니까.”

“이제 아니야. 못 나가.”

 

 

찬열이 내는 말에 잠시 멈춰있다 이내 스스로 머리통을 잡았다. 종인은 눈썹이 더 이상 갈데없이 일그러졌다. 얼마간 그렇게 얼다시피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찬열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무슨 개소리야.”

“내가 샀어, 너.”

 

 

그리고 또 한참을 웃었다. 목젖을 쩍 벌리고 토기가 밀려올 때까지 웃어젖혔다. 샀다. 저리 쉽게 말한다. 그 말이 종인을 죽였다.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절망이었다. 어디로 와서 이제는 어딜 향해 가는가.

종인이 짓는 비소가 벽을 갈랐다. 시커멓게 변한 동공이 뭉그러졌다. 그저 다리를 더 넓게 벌려냈다. 가득하게 찰 수 있도록.

 

*

 

조용한 거리.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 않는 곳. 텅 비어있는 이곳에 있는 것은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붉은 간판뿐이다. 표지판이 없는 골목으로 이어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닿아있다. 동그랗게 구슬을 엮은 발이 입구를 자리한다. 젖혀 열면 피어나는 역한 향냄새가 순식간에 밀려와 코를 쥐어 비트는 이가 대다수다. 처음 오는 자라면 인상이 더욱 매서워진다.

오늘이 되어 처음으로 발과 함께 묶여있는 방울이 몇 번 딸랑거렸다. 펜 꼭지에 달린 깃털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주인이 느리게 허리를 세웠다. 들어온 손님은 코를 막지 않았다. 커다란 눈동자를 도륵 도륵 굴리고만 있다. 입고 있는 옷을 봤을 때 있는 집 자제가 분명하다. 하얀색 드레스셔츠에 몸에 꼭 맞춘 양장이다. 가게 주인은 머리를 매만지며 눈을 바로 떴다. 그리고는 깃털을 휘적거리며 상대를 근처로 불러 세웠다.

남자는 한동안 가게를 더 둘러보다 주인에게로 다가섰다. 연기는 더욱 진하게 지펴졌다. 장부에 펜촉을 올리고 눈을 마주쳤다.

 

 

“찾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여기 혹시,”

 

 

쨍그랑.

소리만 들었을 때는 꽤 커다란 도자기 한 점이 떨어져나갔음이다. 복도에 이어진 수많은 방들 중 어느 곳에서 들려왔는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주인은 무언가 예상을 한 것인지 부들부들 떨리는 입매로 실례를 청했다. 묘한 한기가 덮였다. 주인은 망설임 없이 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슬쩍 그곳을 눈짓으로 틀어서 보았다. 주인이 돌아나간 길에 널린 분위기는 이곳에 잔뜩 퍼져있는 향과 흡사했다. 연꽃 모양 전등이 복도 천장 가득 이어져 비추고 있다. 분홍빛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붉고, 적색이라고 하기에는 연하다. 바람이 불어 발이 흩날렸다. 고요한 방울 소리가 내려앉았다.

방은 여러 개였다. 지하와 위층으로 향할 수 있는 계단도 옆에 같이 자리했다. 주인은 어수선한 방을 정확히 골라 들어갔다. 깊숙이 위치해 있는 저쪽 방 어디선가 여러 명에게서 나오는 높은 언성이 오갔다. 이번에는 작은 기물이 벽에 부딪치는 소음이 울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깨진 것같지 않았다. 한동안은 또 조용했다.

손님은 주인이 놓고 간 펜을 들었다. 자신 쪽으로 장부를 잡아 올려 칸을 센다. 끝에 붙은 깃털을 턱에 굴려대던 남자는 ‘김종인’이라는 이름이 시선에 걸리자마자 탁 찍었다. 까만 잉크가 살짝 번져 나왔다. 그리곤 옆으로 펜을 죽 그어가며 비어있는 곳을 찾아 망설임 없이 무언가를 적었다. 한 글자마다 종이에 자국이 남도록 강하게 썼다. 검은 선들이 일제히 섞여 단어를 만들어갔다.

 

박찬열.

 

찬열은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근육이 더없이 찢어져 올라간다. 이대로라면 소리가 터질 새라 얼른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물어 담았다.

길게 이어진 나무의자가 구석에 있는 것이 보여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직 소란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목소리가 잘게 파편이 되어 날렸다. 매서운 음색이다. 찬열은 눈을 감고 소리를 골라내었다.

 

아, 씨발 진짜! 저 새끼가 먼저 지졌다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또 다시 웃음이 터져나오려했다.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역시 여기 있었다. 김종인, 여기 있었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거였어.

이제는 양손으로 얼굴 전체를 감싸고 무릎에 묻었다. 자꾸만 어깨가 들썩인다. 끅끅대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꽉 붙어있는 손가락 사이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삐져나와 흘러내렸다. 톡, 바닥에 닿는다. 찬열은 한동안 손바닥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

 

 

“밧줄로 묶어주실 수 있나요?”

 

 

주인이 시야에 잡히자마자 찬열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 앞뒤 문맥 따위 자르고 던지는 말에 당황할 법도 한데 눈썹을 굴리며 턱만 매만진다. 찬열은 황급히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흰 봉투를 내밀었다. 두 손으로, 그것도 굉장히 공손히 건네는 폼이 역시 이런 곳에 자주 오는 자는 아니었다.

두툼하게 부풀어있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주인은 내용물은 확인도 해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에 이미 손님이 올려놓은 이름을 보고는 찬열을 머리끝에서 발밑까지 훑어 내렸다.

 

 

“이건 오늘 쓸게 못되는 데.”

“괜찮아요. 그냥 대화만 할 거니까.”

 

 

찬열은 그 어디에도 장난기를 섞지 않았다. 주인은 가만 서서 시선으로 뚫을 듯 빤히 응시했다.

 

 

“눈도 가려드려?”

 

 

왠지 선심 쓰는 듯 건넨 말이다. 돈은 그게 다였다. 바지춤을 뒤지는 찬열의 행동을 눈치 채고 픽 웃었다.

 

 

“그건 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대던 찬열이 당장 머리통을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그의 열광적인 반응에 주인은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앞서 걸어 나갔다.

연꽃이 새겨져있는 다른 방들과는 달리 동백꽃이 박힌 문 앞에 섰다. 널려있던 깨진 도자기 조각이 발에 밟혔다.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잘게 부서지자 놀란 찬열이 얼른 다리를 들어 피했다. 주인은 아래를 힐끔 쳐다 보다가 신발 바깥쪽에 담아 사각으로 쭈욱 밀어냈다.

 

 

“잠시만.”

 

 

그가 들어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안쪽이 또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찢어지는 목젖이 공기 중을 뒤덮었다. 찬열은 문 옆 벽에 등을 기댔다. 자꾸만 벅찬 숨이 터져 나왔다. 표정이 구겨졌다 펴졌다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손등을 물었다. 자국이 새겨질 정도로 강하게 씹었다. 피가 모여든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방 안이 조용해졌다. 찰칵하며 손잡이가 돌아가는가 싶더니 곤죽이 된 주인이 나왔다. 말할 기운도 없어 손짓으로 들이민다.

 

 

“한 시간.”

 

 

문이 닫히고 마침내 둘이 되었다. 방에서 나는 향은 바깥보다 강했다. 전체적인 느낌이 약간 어수선하기도 했다. 볕은 들어오지 않았다. 꽉 막혀있어 향이 구석구석 배어있었다. 바닥은 깨끗했지만 어쩐지 정신없었다. 물건들이 제멋대로 놓여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방 한 가운데는 빨간 천으로 눈이 가려져 밧줄로 꽁꽁 묶여있는 사람이 보였다. 팔은 뒤로 돌려져 있었고, 발목끼리 겹쳐져 엑스 자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묶여있었다.

이곳저곳으로 뻗친 짧은 머리에는 왼쪽 통수 부근에 노란 노리개가 꽂혀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여자용 한복이었다. 저고리와 치마 모두 하얀 색이었는데 핏자국인지, 원래 있던 무늬인지 모를 홍색 꽃이 자잘하게 번져났다. 속곳까지 입었으나 맨발이었다. 버선은 애초에 보이지 않았다.

신을 벗어서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발을 떼었다. 인기척이 가까워오자 종인은 이를 세웠다.

 

 

“씨발...”

 

 

목을 긁으면서 내뱉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전율이 일었다. 앞에 자리한 이는 확실히 김종인, 김종인이다. 김종인이 눈앞에 있다. 할 말이 너무도 많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모든 것을 알기에 한 시간은 짧다.

저를 기억 못할 것이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아예 처음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 김종인 네가 나에게 다가온 그날을 잊지 못한다. 멀리 떨어져서는 심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던 넌 분명히 나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난 너를......

 

 

“어떤 양반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스듬히 꺾어 올리는 음성은 정확한 상대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 입이 벌어진 종인에게 집중하기 위해 찬열은 차곡차곡 개었던 생각을 쑥 집어넣었다. 침 넘기는 소리가 설사 그를 방해할까싶어 한참 느리게 넘겼다.

 

 

“내 몸에 손대는 순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순간 찬열은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한 안도였다. 김종인은 이런 곳에 갇혀있어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김종인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입 꼬리를 있는 대로 찢어놓았다. 눈을 가리고 있어 모습이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웃음소리가 벽을 치고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달라붙었다. 종국에는 사방에서 김종인이 낄낄 내지르는 괴성만이 울려댔다.

찬열은 바로 앞까지 기어갔다. 말을 포기했다. 지금 종인에게는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을 거다. 가까이서 향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까워질 때마다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무릎을 꿇었다. 뼈가 세워진 발등 위로 닿을 듯 말듯 입을 가져갔다. 굳이 울림을 가지지 않았다. 입모양을 박았다.

 

너는 내가

기필코

꺼내줄게.

 

 

 

 

19.

 

아직 추운 날이었다. 중학생 때를 채 벗지도 못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학교로 쏟아져 들어왔다. 까만 덩어리들처럼 보였다. 머리도, 교복도 모두 검은 구더기들처럼 꿈틀거렸다.

바깥 운동장에서 힘찬 목소리들이 울렸다. 찬열은 조회시간부터 집중하고 있던 책에서 떨어져 눈을 비벼 떴다. 가까이 붙어있는 창문이 환하게 열려있다. 왜 하필 저 많은 창들 중에 자신 앞에 있는 것이 열려있는지 한참을 쳐다보았다. 결국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빙빙 맴돌던 바람이 마침 쏟아졌음이다.

팔만 들어도 닿는 거리였지만 괜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맑다. 구름 두어 점이 해 반대편에서 어느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다시금 불어오는 바람은 그대로 얼굴에 묻혔다. 아직 1교시 담당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고 계셨다.

입학식이다. 몇 년 전에 저도 섞여있던 무리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이만큼 올라와있다. 가장 높은 학년에 들어서게 되어 그들을 보자니 새로웠다.

까만 머리통이 셀 수 없이 늘어서 있다. 저게 다 남자들이라니. 숨통이 턱 막혀와 목 주변을 손으로 슥 쓸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이 누구 것이냐 묻는다면 찬열은 답할 수 없다. 정확히 알지 못했다. 많은 신입생들 중 유독 한 얼굴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딱 띄었다. 어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눈코입이 전부 뭉그러져 보였다. 이쪽인가? 아니면 지겨움을 못 이기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따름인가?

몇 분 동안이나 찬열은 그리도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까만 머리통들 중에 다른 색을 띤 동그란 형태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느 덧 입학식이 끝났는지 여러 갈래로 학생들이 흩어진다. 중구난방으로 까만색과 살구색이 채워졌다.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바람을 몽땅 집어삼킨 것처럼 폐가 마구 부풀었다. 안에서는 심장이 굴러다니는 느낌도 났다.

가슴팍을 두드리는 중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1교시는 윤리였다. 올려놓고 있던 책 대신에 교과서를 펼쳐들었다. 여전히 코끝에는 차가운 결이 묻어났다.

 

 

 

19.5

 

아직 추운 날이었다. 교복 무게가 가벼워졌다. 담고 있던 부담이 줄어든 덕이다.

같이 오신 찬열의 부모님은 꽃다발을 꼬옥 안겨주었다. 고생했다는 말도 빼놓지 않으셨다. 이제 끝이다. 오늘로써 이 시커먼 옷은 더 이상 입지 않아도 된다.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운동장이 이렇게 좁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모든 줄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넘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은 흙바닥에 둘러있었고, 찬열은 조회대 옆 벽돌담에 앉았다. 한동안 책에 빠져있던 그는 앞머리에 언젠가 떨어져 붙은 나뭇잎을 떼어냈다. 그리고 아이를 보았다. 일방적으로 보았다. 창문 틀 속 기대어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였다. 어느 때부터는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은 색 교복을 입었지만 명찰 색은 다르다.

익숙한 느낌이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아주 짧은 고민이었다.

바람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 차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아이에게도 똑같이 불었다. 앞머리가 살랑거리고 아이는 눈을 감았다. 아마 속눈썹에도 닿았을 것이다.

온 정신이 멍했다. 자신이 지금 무얼 하고 있었는지, 다른 이들은 무얼 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저기 있는 저 아이가 가진 시선이 이제 어딜 바라볼지가 더 큰 관심사였다.

몸속에 있는 부분이 크게 어긋나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옆에 앉았던 남자 아이가 실수로 등을 치고 지나갔다. 잡고 있던 책이 작은 충격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안. 상대는 그렇게만 말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펼쳐져있던 쪽수가 단숨에 덮여있다. 끔뻑이는 눈모양이 이어지고 이내 퍼뜩 머리통을 들었다.

없다. 사라졌다. 바람에 쓸려간 듯 텅 비어있다.

곧 운동장은 꽉 메워졌고 그렇게 끝을 알렸다.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떠나갔다. 묘한 그리움을 묻히고 떠나갔다.

 

20.

 

아직 추운 날이었다. 두터운 코트를 꺼내 입으신 아버지가 나오셨다. 찬열아, 가게 잘 보고 있어라. 이런 일과였다.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가게 안에 있는 집까지 보는 일은 이제 찬열에게 맡겨진 업무였다. 부모님은 모두 각자 사업으로 바쁘셨다. 서점 일은 이제 자신에게 돌려진 사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점 문 앞까지 나와 아버지를 배웅하고 그는 다시 들어갔다. 이 또한 일과에 속하였다.

하루 동안 그리 많은 손님이 오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크게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책을 사러 오는, 또는 책을 팔러 오는 사람.

출입구에서 그가 있는 책상까지는 일직선으로 뻗어져있는 구조이다. 덕분에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볼 수 있다.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인지 머리털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겠다. 손님이 오지 않는 것이 그 입장에서는 도리어 나았다.

초침 소리가 지워져가고 있을 즈음 책상 위로 둔탁한 무게가 실렸다. 꽤 많은 양의 책들이 한데 묶여져 올려졌다. 책등을 보니 교과서다. 졸업생인가 싶어 눈을 휘 굴렸다. 상대 얼굴은 높게 쌓여진 책들에 가려있었다.

찬열은 서둘러 권수를 세고 그에 맞는 값을 계산했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중고 값을 쳐주자니 아쉬워할 듯한 마음에 몇 장을 더 꺼내 보탰다.

손님은 지폐들을 받자마자 앞에서 손가락을 굴리지도 않고 입을 먼저 열었다. 그가 값을 알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존나... 씨발, 고작 이거?

 

괴상한 울림이 걸걸하게 퍼져 나왔다. 방금 들은 단어는 좋은 색이 아니다. 굉장히 지저분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찬열은 어찌 하지 못해 굳어버렸다. 불만에 가득 차 중얼 중얼대는 음성만 다시 들려왔다. 이제야 제 값을 알기 위해 돈을 한 장씩 손 안에서 뒤로 넘겨댔다.

조심스럽게 책 뭉치들을 아래로 잡아 내렸다. 슬쩍 치켜뜬 눈으로 만나게 된 상대는 의외였다. 물론 손님은 손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햇볕에 적당히 탄 얼굴색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띄었다. 진하게 패인 꺼풀에서 둥근 듯 오뚝한 코, 불룩하게 툭 튀어나온 입술 선까지 눈알이 단번에 굴러 떨어졌다. 설마라고 느꼈을 때 이번에는 몸을 보았다. 답답하게 꽉 조여진 새카만 교복이다. 그래도 설마 했다. 하지만 확실했다. 명찰 색이 말해주었다. 이 아이는 아직 학교에서 배움을 받아야하는 그 때 그 아이가 맞았다. 김종인. 노란 바탕에 까만 실이 감겨 써있었다. 김종인. 그리 불리는 이 아이는 이곳에서 저에게 책을 묶어 내밀면 안 되었다. 책을 팔아넘긴 돈을 세고 있음은 더욱더 안 될 일이었다. 무어라 충고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알 리가 없어 함부로 꺼낼 수 없다. 어떤 말이 상처를 입히게 될지 모른다.

찬열은 아예 머리통을 푹 숙이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정신없는 박동이 튀어나올 듯 안쪽을 두들겼다. 너무도 빨라서 숨쉬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 틈으로 종인이 설핏 비추었다. 아이는 뒤를 슬쩍 바로보았다가 고개를 쭉 내려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아저씨, 내가 한 번 대주면 여기에 세 배 쳐줄래?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렸다. 찬열은 원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딸꾹질이 밀려왔다. 바람이 아이의 머리를 뒤섞었던 그 어느 날로 잠시 돌아갔다.

얼마 뒤, 호탕한 웃음소리가 주변을 깨뜨렸다. 농담이야, 농담. 아저씨 완전 샌님이네. 쥐고 있던 지폐더미를 반대 손으로 몇 번 털고 나서 아이는 망설임 없이 돌아나갔다. 옆으로 꺾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벙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뛰쳐나갔다. 하지만 이미 사라져버렸다. 또 다시 바람이 떠간 듯 없어졌다.

거센 고동이 일었다.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한참을 머금었다. 아직 남아있다. 주체 없던 그리움이 진해져 있었다. 마침내 찾아냈다. 그 때부터 줄곧 이어져있던 끈을 잡았다.

이제 끈을 잡고 걸어 나갈 차례다. 잡은 순간부터 어디선가 향이 밀려왔다. 향긋하다해야할지, 지독하다해야할지 모를 향이었다.

 

 

*

 

 

종인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오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일단 온몸이 굳는다. 눈알이 먼저 옆으로 넘어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또 무슨 일일까. 어쩐 일로 저리도 자상한 음성이다.

입고 있는 옷을 쥐어 잡고 방문 앞으로 나아갔다. 손바닥이 자꾸만 미끄러워져 바지 자락에 비볐다. 미닫이를 열지 않은 상태로 딱히 무어라 대꾸도 하지 않고 공손히 입을 내었다.

 

 

“예, 아버지.”

그 사람들은 왔느이?

“아니오, 오지 않았어요.”

...그래.

 

 

다시 고요해졌다. 벽에 갇힌 소리가 막혔다. 저 너머에서 이쪽으로 넘칠 만큼 큰일은 없다. 같이 노는 동네 벗을 부르는 어린 아이 목청만이 골목 가득 채워져 갔다.

종인은 뒷걸음질로 문에서 멀어져 먼저 앉아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꿰찼다. 다 떨어진 교복 천을 떼고 있었다. 까만색이라 그런지 다행히 크게 티는 나지 않았다. 다행이야. 만족한 듯 미소 지으며 송곳니를 엇갈려 실을 뚝 끊었다.

윗옷을 탈탈 털어 앞뒤로 제 몸에 대보았다. 제법 그럴싸한 모습에 입모양이 푸스스 번져났다.

이번에는 상 위쪽 구석에 밀어놓았던 자그만 노란조각을 집었다. 평소에 종인을 예뻐하시던 옷감 가게 할머니께 받아온 것이다. 묻어난 먼지를 세심하게 떼어냈다.

윗옷을 넓게 펼쳐, 입었을 때 왼쪽 가슴에 닿는 부분에 조각을 올려두었다. 주머니보다 살짝 벗어나는 크기였지만 괜찮은 것 같다. 잠시 집어 올렸다.

둘둘 말린 실 뭉치에서 죽 끌어내 바늘에 살살 끼워내고는 노란 천에 푹 박았다. 점차 글자가 이루어져 갔다. 흥이 나는지 한쪽 발을 바닥에 쉼 없이 떼었다 붙였다. 맨발이라 질게 달라붙기도 했다.

어느 때부터 살짝 비뚤게 끼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인은 재빨리 실을 끊고 바늘로 홈에 끼워 강하게 뜯어냈다.

 

 

“아!”

 

 

연신 새어난 땀에 미끄러져버린 바늘심이 엄지에 깊이 박혔다. 현실적인 아픔이 진득하게 전해졌다. 바늘을 따라서 주르륵 흘러나는 핏방울이 진하다. 교복 소매 위로 톡하니 떨어진 혈이 슬며시 번져갔다.

쪽 빨아냈다. 비릿했다. 혀 안쪽까지 밀어 올라가는 향이다. 맛없어. 이로 잘근잘근 씹어대다 피가 그쳐가자 정도에 멈추었다. 마저 글자를 채우기 위해 실 끝을 곱게 묶었다.

마루는 바람이 꽤 잘 통했다. 특히 겨울철 나무 바닥에선 숭숭 뚫린 틈으로 찬 기운이 밀려들고는 했다. 대문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계세요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귀를 쫑긋 세워야했다. 때문에 마루 쪽에 따로 창을 만들어 닫는 일은 없었다. 뻥 뚫려있는 채였다. 그나마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집 안에서 가장 두터운 이불이 필요했다. 등부터 둘둘 싸매고 종인은 일을 계속 이어나갔다. 끝이 붉게 물든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돌바닥을 튀었다 떨어진 작은 돌이 가까이 떨어졌다. 잘못 들었나하여 고개를 들자 이내 한 개가 더 넘어온다. 좁은 마당으로 떼구르르 떨어진 돌멩이 두 개는 결코 어린 아이 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이 집에서만 통하는 하나의 신호였다.

종인은 이불에서 벗어나 신을 신지도 않고 한달음에 대문으로 뛰쳐나갔다. 혹여나 철문이 녹슨 비명이라도 지를까싶어 아주 천천히 열었다. 바깥에는 머리를 가볍게 쪽지고 곱게 분을 바른 여인네가 서 있었다. 단아한 생김새와는 달리 새빨간 연지가 입술을 뒤덮은 모양이 다소 상반된 느낌이었다. 보따리를 한 가득 짊어지고 있었는데 많이 무거운지 눈썹이 푹 꺼졌다.

 

 

“그 사람들은?”

 

 

여자가 내민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오지 않았어요. 대답도 같이 얹었다. 그녀는 안심한 숨을 깊게 내쉬었다. 가슴팍을 쓸다가 이내 눈을 차분하게 들어 올리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어?”

“방에...”

“종인아.”

 

 

이 역시 너무도 자상한 음색이었다. 아까부터 다른 세상에 온 듯 어색함만이 가득했다. 손가락들을 제각기 엇갈려 부딪치는 종인이 한참을 어물거렸다.

 

 

“예.”

“너 그 고등학교 꼭 가야하니?”

 

 

창 없는 마루만큼이나 휑한 감각이 일어났다. 아직 다 꿰매지 못한 이름표가 먼저 떠올랐다. 입을 열지 못하자 여인은 얼굴을 굳혔다.

 

 

“잘 생각해 보구. 그리고 이건 아버지 드리구, 이건 너 따로 써.”

“예...... 어머니.”

 

 

갈색 종이로 꾸깃꾸깃 싸여있는 두툼한 것을 받았다. 뒤이어 따라온 종인 몫은 그저 지폐 몇 장이었다. 그녀는 차갑게 돌린 시선으로 멀어져갔다.

거리가 떨어졌다 생각했는지 단정하게 꽂아놓았던 비녀를 망설임 없이 풀어버렸다. 종인은 아직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였다. 그럼에도 별로 신기할 것 없다는 얼굴로 천천히 철문을 닫았다.

욕은 제 아비에게 배웠다. 곤란한 일이 있을 적에 혀를 굴리는 버릇은 어미에게 배웠다. 어디서든 살아남아야 했다.

 

 

“아, 존나... 씨발 고작 이거?”

 

 

그러려면 집 안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돈이 될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값을 칠 수 있는 건 예전에 이미 달아놓은 뒤였다. 유일하게 돈으로 메길 수 있는 건 이제 책뿐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머리에 가득 채워 고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집 안에서 쏘아대는 매서운 눈살을 받으며 다니기에는 역시 무리였다.

욕심을 부렸다. 학교를 가고 싶었다. 배우고 싶었다. 여느 학생들과 같이 또래 아이들을 어울리고 싶었다.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것은 고집이었다. 하지만 그리도 평범한 일이 김종인에게는 가장 어려웠다.

여태껏 모아온 돈은 학교 쪽으로 전부 빠져나갔다.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오고 싶었던 곳이다.

교과서만큼은 새로 지급하는 것으로 쓰길 원했다. 교복은 다 떨어져가면서 책은 또 새 것이니 아이들은 종인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어쨌든 책안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였다. 차마 쓸 수 없었다.

책을 팔고 받아낸 푼돈으로 빚에 보태기에는 턱도 없다. 그래도 아예 빈손인 것보다 나을 것이다. 이제 이 교복과도 끝이다. 일 년이면 충분했다. 자신이 결코 그들과 어울리기에는 알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아마 학급에서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아마 어머니가 가장 기뻐할 거다. 거기다 돈까지 만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리 목을 조여 왔으니 분명 친절히 맞아줄 것이다. 어쩌면 근소하게나마 빚에 보탬이 되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실지 몰랐다.

이 골목만 지나면 된다. 발걸음을 가볍게 놀렸다. 언제나 하교 후에 지나가던 길인데 훨씬 깨끗해 보인다. 갑자기 햇빛이 쨍하게 들어왔다. 너무도 맑았다. 눈이 시렸다. 앞이 흐리다. 아아. 목젖이 갈려나오는 성조였다. 골목에서 종인은 한참동안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도한 집 앞은 어딘지 모르게 스산했다. 철문이 떨어져 겨우겨우 매달려있었다. 살며시 고개만 집어넣고 안을 확인했다. 작은 마당에 깨진 독이 널려있었고, 언제나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의 신발이 사라졌다. 마루 정중앙에 있던 상은 엎어져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아주 이상했다. 그 사람들이 오간적은 많지만 아버지 신발이 사라진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종인은 눈가를 슥 밀어내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 때에 뒤에서 누군가 입을 확 막았다.

 

 

“새끼.”

 

 

척추부터 오싹하게 번져나는 공포였다. 낮게 깔린 음성은 들어봤던 것이다. 자주 찾아와 빚을 요구하던 남성이었다. 우락부락한 덩치가 눈에 띄어 기억하고 있다.

 

 

“네 애미애비는 어딜 갔누.”

 

 

바동거리는 종인의 몸을 더욱 꽉 옭아매며 남자가 귀에 속삭였다. 그 말에 순간 움직임이 멎었다. 항상 아버지가 계시던 방 안에서는 다른 남자가 나왔다. 아무것도 없다고 크게 소리친다. 사람도, 물건도, 돈도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왜 저에게 물어보는 것일까. 게다가 방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한다.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숨만 들었다 놓고 있다.

 

 

“에이, 육시럴. 그 새끼 지금 아는 게 없는 눈치인데.”

 

 

뒤뜰 쪽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육두문자를 곱씹었다. 종인을 잡고 있던 남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무 대처 없이 던져져 어깨를 그대로 박았다. 안 그래도 약했던 천이 이제는 완전히 너덜하게 찢어진 꼴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담아 물었다.

 

 

“그 여편네가 너만 놓고 갔다. 어떻게 할래?”

“이 놈 그냥 어미가 일하던 가게에 팔지.”

“거기는 남창도 취급한대?”

 

 

더러워. 저들끼리 낄낄대며 가래를 끓어다 퉤 뱉었다. 쓰러져있는 무릎 바로 앞이었다. 마치 자신 얼굴에 가져다 뱉은 듯 화가 배에서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어찌하지 못했다.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는 고집만 부려오던 짐짝을 내버렸다.

그래, 당연한 것이다. 일 년이면 길기도 길었지. 말을 듣지 않는 핏덩이는 쓰레기로 찬 시커먼 암 덩어리에 불과하다. 끝까지 이고가면서 제 몸을 울컥울컥 쏟아내는 것을 택할 바에야 떨쳐내는 것이 최선이다. 그들도 그리 생각했기에 저를 버린 것이다. 버렸다. 버려졌다.

그리고 팔았다. 아니, 팔렸다.

 

종인아.

 

차분하게 부른다. 부른 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안아주었다. 종인이 벌려놓은 다리로 파고들어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을 휘저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농후한 향과 함께 퍼져나갔다.

작은 소년은 한순간에 너른 품으로 쑥 들어갔다. 빠져나오려 했지만 체향을 맡자 금세 노곤해졌다. 이상하게 그리운 감각이었다. 박동이 안정적으로 가라앉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들썩거리는 어깨가 우스워 호흡을 참았다. 그 덕에 전신이 달달 떨렸다.

마디가 굵은 손이 굳어있는 몸을 살살 쓸어주었다. 툭 튀어나온 뼈가 손바닥 전체에 감겼다. 얼마나 음식을 먹지 않았는지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다 비치는 옷을 입으니 더욱 잘 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정도가 심했다.

자신의 안에서 바들거리는 종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아편 향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미소는 줄곧 피어있었다. 살고 싶어 어떻게든 발악하고 있는 꼴이다. 입 주변으로 쭉 번져나간 새빨간 연지가 눈에 꽂혔다. 찬열은 고개를 내리고 그의 입가를 슬쩍 핥았다. 움찔 떨려온다. 반응에 홀려 종인이 입은 저고리를 어깨 밑으로 밀어 내렸다. 쇄골을 이로 긁어내자 입 안에 김종인이 가득 찼다. 벅찬 맛이었다. 잘 익은 열매를 한 입 물어 씹은 듯 과즙이 새어나왔다.

 

 

“당신, 나 알아?”

 

 

대뜸 종인이 그렇게 물었다. 가슴골로 내려가고 있던 혀가 멈추었다.

그 날, 아이가 들고 온 책들은 그대로 이 방 벽장에 놓여있다. 묶어온 모양에서 어디로도 흐트러짐 없다. 손길이 남아있는 그 때 모습과 같다. 예전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김종인처럼.

누구에게도 되팔지 않았다. 찬열에게 있어 그 책들은 김종인 자체였다. 유일하게 이어져 있는 연결고리였다.

앞에 앉아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종인을 응시했다. 진한 눈꺼풀 속 시선이 뒤흔들린다.

 

 

“응? 나 아냐구.”

 

 

찬열이 듣지 못했다 여겼는지 다시 한 번 묻는다. 이번에는 허리를 가만 잡고 작게 솟아난 돌기를 입술로 머금었다. 혀로 돌려내자 아직 아편 향에 취한 노련한 신음이 샜다.

벽장 안에 있는 책은 이제 쓸모없게 되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다 생각했던 종인이 지금 이곳에 있다. 손 안에 들어차있다. 그럼 된 것이다. 저만 알고 있던 상대가 마침내 자신을 궁금해 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과거는 지워져도 상관하지 않는다.

찬열은 종인과 같이 미소 지었다. 벌어진 다리를 허리에 감아올리고 치마폭에 손을 집어넣었다. 착 감기는 촉감이 좋다.

찬열이 안쪽에 가득 차 들어와 울며 신음하는 때에도 종인은 연신 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나를 알아? 기억하고 있어? 잊혀져가는 그 때를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여주지 않았다. 새로운 향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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