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직 추운 날이었다. 중학생 때를 채 벗지도 못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학교로 쏟아져 들어왔다. 까만 덩어리들처럼 보였다. 머리도, 교복도 모두 검은 구더기들처럼 꿈틀거렸다.
바깥 운동장에서 힘찬 목소리들이 울렸다. 찬열은 조회시간부터 집중하고 있던 책에서 떨어져 눈을 비벼 떴다. 가까이 붙어있는 창문이 환하게 열려있다. 왜 하필 저 많은 창들 중에 자신 앞에 있는 것이 열려있는지 한참을 쳐다보았다. 결국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빙빙 맴돌던 바람이 마침 쏟아졌음이다.
팔만 들어도 닿는 거리였지만 괜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맑다. 구름 두어 점이 해 반대편에서 어느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다시금 불어오는 바람은 그대로 얼굴에 묻혔다. 아직 1교시 담당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고 계셨다.
입학식이다. 몇 년 전에 저도 섞여있던 무리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이만큼 올라와있다. 가장 높은 학년에 들어서게 되어 그들을 보자니 새로웠다.
까만 머리통이 셀 수 없이 늘어서 있다. 저게 다 남자들이라니. 숨통이 턱 막혀와 목 주변을 손으로 슥 쓸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이 누구 것이냐 묻는다면 찬열은 답할 수 없다. 정확히 알지 못했다. 많은 신입생들 중 유독 한 얼굴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딱 띄었다. 어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눈코입이 전부 뭉그러져 보였다. 이쪽인가? 아니면 지겨움을 못 이기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따름인가?
몇 분 동안이나 찬열은 그리도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까만 머리통들 중에 다른 색을 띤 동그란 형태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느 덧 입학식이 끝났는지 여러 갈래로 학생들이 흩어진다. 중구난방으로 까만색과 살구색이 채워졌다.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바람을 몽땅 집어삼킨 것처럼 폐가 마구 부풀었다. 안에서는 심장이 굴러다니는 느낌도 났다.
가슴팍을 두드리는 중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1교시는 윤리였다. 올려놓고 있던 책 대신에 교과서를 펼쳐들었다. 여전히 코끝에는 차가운 결이 묻어났다.
19.5
아직 추운 날이었다. 교복 무게가 가벼워졌다. 담고 있던 부담이 줄어든 덕이다.
같이 오신 찬열의 부모님은 꽃다발을 꼬옥 안겨주었다. 고생했다는 말도 빼놓지 않으셨다. 이제 끝이다. 오늘로써 이 시커먼 옷은 더 이상 입지 않아도 된다.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운동장이 이렇게 좁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모든 줄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넘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은 흙바닥에 둘러있었고, 찬열은 조회대 옆 벽돌담에 앉았다. 한동안 책에 빠져있던 그는 앞머리에 언젠가 떨어져 붙은 나뭇잎을 떼어냈다. 그리고 아이를 보았다. 일방적으로 보았다. 창문 틀 속 기대어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였다. 어느 때부터는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은 색 교복을 입었지만 명찰 색은 다르다.
익숙한 느낌이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아주 짧은 고민이었다.
바람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 차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아이에게도 똑같이 불었다. 앞머리가 살랑거리고 아이는 눈을 감았다. 아마 속눈썹에도 닿았을 것이다.
온 정신이 멍했다. 자신이 지금 무얼 하고 있었는지, 다른 이들은 무얼 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저기 있는 저 아이가 가진 시선이 이제 어딜 바라볼지가 더 큰 관심사였다.
몸속에 있는 부분이 크게 어긋나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옆에 앉았던 남자 아이가 실수로 등을 치고 지나갔다. 잡고 있던 책이 작은 충격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안. 상대는 그렇게만 말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펼쳐져있던 쪽수가 단숨에 덮여있다. 끔뻑이는 눈모양이 이어지고 이내 퍼뜩 머리통을 들었다.
없다. 사라졌다. 바람에 쓸려간 듯 텅 비어있다.
곧 운동장은 꽉 메워졌고 그렇게 끝을 알렸다.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떠나갔다. 묘한 그리움을 묻히고 떠나갔다.
20.
아직 추운 날이었다. 두터운 코트를 꺼내 입으신 아버지가 나오셨다. 찬열아, 가게 잘 보고 있어라. 이런 일과였다.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가게 안에 있는 집까지 보는 일은 이제 찬열에게 맡겨진 업무였다. 부모님은 모두 각자 사업으로 바쁘셨다. 서점 일은 이제 자신에게 돌려진 사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점 문 앞까지 나와 아버지를 배웅하고 그는 다시 들어갔다. 이 또한 일과에 속하였다.
하루 동안 그리 많은 손님이 오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크게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책을 사러 오는, 또는 책을 팔러 오는 사람.
출입구에서 그가 있는 책상까지는 일직선으로 뻗어져있는 구조이다. 덕분에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볼 수 있다.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인지 머리털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겠다. 손님이 오지 않는 것이 그 입장에서는 도리어 나았다.
초침 소리가 지워져가고 있을 즈음 책상 위로 둔탁한 무게가 실렸다. 꽤 많은 양의 책들이 한데 묶여져 올려졌다. 책등을 보니 교과서다. 졸업생인가 싶어 눈을 휘 굴렸다. 상대 얼굴은 높게 쌓여진 책들에 가려있었다.
찬열은 서둘러 권수를 세고 그에 맞는 값을 계산했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중고 값을 쳐주자니 아쉬워할 듯한 마음에 몇 장을 더 꺼내 보탰다.
손님은 지폐들을 받자마자 앞에서 손가락을 굴리지도 않고 입을 먼저 열었다. 그가 값을 알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존나... 씨발, 고작 이거?
괴상한 울림이 걸걸하게 퍼져 나왔다. 방금 들은 단어는 좋은 색이 아니다. 굉장히 지저분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찬열은 어찌 하지 못해 굳어버렸다. 불만에 가득 차 중얼 중얼대는 음성만 다시 들려왔다. 이제야 제 값을 알기 위해 돈을 한 장씩 손 안에서 뒤로 넘겨댔다.
조심스럽게 책 뭉치들을 아래로 잡아 내렸다. 슬쩍 치켜뜬 눈으로 만나게 된 상대는 의외였다. 물론 손님은 손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햇볕에 적당히 탄 얼굴색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띄었다. 진하게 패인 꺼풀에서 둥근 듯 오뚝한 코, 불룩하게 툭 튀어나온 입술 선까지 눈알이 단번에 굴러 떨어졌다. 설마라고 느꼈을 때 이번에는 몸을 보았다. 답답하게 꽉 조여진 새카만 교복이다. 그래도 설마 했다. 하지만 확실했다. 명찰 색이 말해주었다. 이 아이는 아직 학교에서 배움을 받아야하는 그 때 그 아이가 맞았다. 김종인. 노란 바탕에 까만 실이 감겨 써있었다. 김종인. 그리 불리는 이 아이는 이곳에서 저에게 책을 묶어 내밀면 안 되었다. 책을 팔아넘긴 돈을 세고 있음은 더욱더 안 될 일이었다. 무어라 충고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알 리가 없어 함부로 꺼낼 수 없다. 어떤 말이 상처를 입히게 될지 모른다.
찬열은 아예 머리통을 푹 숙이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정신없는 박동이 튀어나올 듯 안쪽을 두들겼다. 너무도 빨라서 숨쉬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 틈으로 종인이 설핏 비추었다. 아이는 뒤를 슬쩍 바로보았다가 고개를 쭉 내려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아저씨, 내가 한 번 대주면 여기에 세 배 쳐줄래?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렸다. 찬열은 원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딸꾹질이 밀려왔다. 바람이 아이의 머리를 뒤섞었던 그 어느 날로 잠시 돌아갔다.
얼마 뒤, 호탕한 웃음소리가 주변을 깨뜨렸다. 농담이야, 농담. 아저씨 완전 샌님이네. 쥐고 있던 지폐더미를 반대 손으로 몇 번 털고 나서 아이는 망설임 없이 돌아나갔다. 옆으로 꺾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벙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뛰쳐나갔다. 하지만 이미 사라져버렸다. 또 다시 바람이 떠간 듯 없어졌다.
거센 고동이 일었다.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한참을 머금었다. 아직 남아있다. 주체 없던 그리움이 진해져 있었다. 마침내 찾아냈다. 그 때부터 줄곧 이어져있던 끈을 잡았다.
이제 끈을 잡고 걸어 나갈 차례다. 잡은 순간부터 어디선가 향이 밀려왔다. 향긋하다해야할지, 지독하다해야할지 모를 향이었다.
*
종인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오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일단 온몸이 굳는다. 눈알이 먼저 옆으로 넘어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또 무슨 일일까. 어쩐 일로 저리도 자상한 음성이다.
입고 있는 옷을 쥐어 잡고 방문 앞으로 나아갔다. 손바닥이 자꾸만 미끄러워져 바지 자락에 비볐다. 미닫이를 열지 않은 상태로 딱히 무어라 대꾸도 하지 않고 공손히 입을 내었다.
“예, 아버지.”
그 사람들은 왔느이?
“아니오, 오지 않았어요.”
...그래.
다시 고요해졌다. 벽에 갇힌 소리가 막혔다. 저 너머에서 이쪽으로 넘칠 만큼 큰일은 없다. 같이 노는 동네 벗을 부르는 어린 아이 목청만이 골목 가득 채워져 갔다.
종인은 뒷걸음질로 문에서 멀어져 먼저 앉아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꿰찼다. 다 떨어진 교복 천을 떼고 있었다. 까만색이라 그런지 다행히 크게 티는 나지 않았다. 다행이야. 만족한 듯 미소 지으며 송곳니를 엇갈려 실을 뚝 끊었다.
윗옷을 탈탈 털어 앞뒤로 제 몸에 대보았다. 제법 그럴싸한 모습에 입모양이 푸스스 번져났다.
이번에는 상 위쪽 구석에 밀어놓았던 자그만 노란조각을 집었다. 평소에 종인을 예뻐하시던 옷감 가게 할머니께 받아온 것이다. 묻어난 먼지를 세심하게 떼어냈다.
윗옷을 넓게 펼쳐, 입었을 때 왼쪽 가슴에 닿는 부분에 조각을 올려두었다. 주머니보다 살짝 벗어나는 크기였지만 괜찮은 것 같다. 잠시 집어 올렸다.
둘둘 말린 실 뭉치에서 죽 끌어내 바늘에 살살 끼워내고는 노란 천에 푹 박았다. 점차 글자가 이루어져 갔다. 흥이 나는지 한쪽 발을 바닥에 쉼 없이 떼었다 붙였다. 맨발이라 질게 달라붙기도 했다.
어느 때부터 살짝 비뚤게 끼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인은 재빨리 실을 끊고 바늘로 홈에 끼워 강하게 뜯어냈다.
“아!”
연신 새어난 땀에 미끄러져버린 바늘심이 엄지에 깊이 박혔다. 현실적인 아픔이 진득하게 전해졌다. 바늘을 따라서 주르륵 흘러나는 핏방울이 진하다. 교복 소매 위로 톡하니 떨어진 혈이 슬며시 번져갔다.
쪽 빨아냈다. 비릿했다. 혀 안쪽까지 밀어 올라가는 향이다. 맛없어. 이로 잘근잘근 씹어대다 피가 그쳐가자 정도에 멈추었다. 마저 글자를 채우기 위해 실 끝을 곱게 묶었다.
마루는 바람이 꽤 잘 통했다. 특히 겨울철 나무 바닥에선 숭숭 뚫린 틈으로 찬 기운이 밀려들고는 했다. 대문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계세요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귀를 쫑긋 세워야했다. 때문에 마루 쪽에 따로 창을 만들어 닫는 일은 없었다. 뻥 뚫려있는 채였다. 그나마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집 안에서 가장 두터운 이불이 필요했다. 등부터 둘둘 싸매고 종인은 일을 계속 이어나갔다. 끝이 붉게 물든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돌바닥을 튀었다 떨어진 작은 돌이 가까이 떨어졌다. 잘못 들었나하여 고개를 들자 이내 한 개가 더 넘어온다. 좁은 마당으로 떼구르르 떨어진 돌멩이 두 개는 결코 어린 아이 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이 집에서만 통하는 하나의 신호였다.
종인은 이불에서 벗어나 신을 신지도 않고 한달음에 대문으로 뛰쳐나갔다. 혹여나 철문이 녹슨 비명이라도 지를까싶어 아주 천천히 열었다. 바깥에는 머리를 가볍게 쪽지고 곱게 분을 바른 여인네가 서 있었다. 단아한 생김새와는 달리 새빨간 연지가 입술을 뒤덮은 모양이 다소 상반된 느낌이었다. 보따리를 한 가득 짊어지고 있었는데 많이 무거운지 눈썹이 푹 꺼졌다.
“그 사람들은?”
여자가 내민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오지 않았어요. 대답도 같이 얹었다. 그녀는 안심한 숨을 깊게 내쉬었다. 가슴팍을 쓸다가 이내 눈을 차분하게 들어 올리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어?”
“방에...”
“종인아.”
이 역시 너무도 자상한 음색이었다. 아까부터 다른 세상에 온 듯 어색함만이 가득했다. 손가락들을 제각기 엇갈려 부딪치는 종인이 한참을 어물거렸다.
“예.”
“너 그 고등학교 꼭 가야하니?”
창 없는 마루만큼이나 휑한 감각이 일어났다. 아직 다 꿰매지 못한 이름표가 먼저 떠올랐다. 입을 열지 못하자 여인은 얼굴을 굳혔다.
“잘 생각해 보구. 그리고 이건 아버지 드리구, 이건 너 따로 써.”
“예...... 어머니.”
갈색 종이로 꾸깃꾸깃 싸여있는 두툼한 것을 받았다. 뒤이어 따라온 종인 몫은 그저 지폐 몇 장이었다. 그녀는 차갑게 돌린 시선으로 멀어져갔다.
거리가 떨어졌다 생각했는지 단정하게 꽂아놓았던 비녀를 망설임 없이 풀어버렸다. 종인은 아직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였다. 그럼에도 별로 신기할 것 없다는 얼굴로 천천히 철문을 닫았다.
욕은 제 아비에게 배웠다. 곤란한 일이 있을 적에 혀를 굴리는 버릇은 어미에게 배웠다. 어디서든 살아남아야 했다.
“아, 존나... 씨발 고작 이거?”
그러려면 집 안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돈이 될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값을 칠 수 있는 건 예전에 이미 달아놓은 뒤였다. 유일하게 돈으로 메길 수 있는 건 이제 책뿐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머리에 가득 채워 고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집 안에서 쏘아대는 매서운 눈살을 받으며 다니기에는 역시 무리였다.
욕심을 부렸다. 학교를 가고 싶었다. 배우고 싶었다. 여느 학생들과 같이 또래 아이들을 어울리고 싶었다.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것은 고집이었다. 하지만 그리도 평범한 일이 김종인에게는 가장 어려웠다.
여태껏 모아온 돈은 학교 쪽으로 전부 빠져나갔다.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오고 싶었던 곳이다.
교과서만큼은 새로 지급하는 것으로 쓰길 원했다. 교복은 다 떨어져가면서 책은 또 새 것이니 아이들은 종인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어쨌든 책안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였다. 차마 쓸 수 없었다.
책을 팔고 받아낸 푼돈으로 빚에 보태기에는 턱도 없다. 그래도 아예 빈손인 것보다 나을 것이다. 이제 이 교복과도 끝이다. 일 년이면 충분했다. 자신이 결코 그들과 어울리기에는 알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아마 학급에서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아마 어머니가 가장 기뻐할 거다. 거기다 돈까지 만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리 목을 조여 왔으니 분명 친절히 맞아줄 것이다. 어쩌면 근소하게나마 빚에 보탬이 되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실지 몰랐다.
이 골목만 지나면 된다. 발걸음을 가볍게 놀렸다. 언제나 하교 후에 지나가던 길인데 훨씬 깨끗해 보인다. 갑자기 햇빛이 쨍하게 들어왔다. 너무도 맑았다. 눈이 시렸다. 앞이 흐리다. 아아. 목젖이 갈려나오는 성조였다. 골목에서 종인은 한참동안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도한 집 앞은 어딘지 모르게 스산했다. 철문이 떨어져 겨우겨우 매달려있었다. 살며시 고개만 집어넣고 안을 확인했다. 작은 마당에 깨진 독이 널려있었고, 언제나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의 신발이 사라졌다. 마루 정중앙에 있던 상은 엎어져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아주 이상했다. 그 사람들이 오간적은 많지만 아버지 신발이 사라진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종인은 눈가를 슥 밀어내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 때에 뒤에서 누군가 입을 확 막았다.
“새끼.”
척추부터 오싹하게 번져나는 공포였다. 낮게 깔린 음성은 들어봤던 것이다. 자주 찾아와 빚을 요구하던 남성이었다. 우락부락한 덩치가 눈에 띄어 기억하고 있다.
“네 애미애비는 어딜 갔누.”
바동거리는 종인의 몸을 더욱 꽉 옭아매며 남자가 귀에 속삭였다. 그 말에 순간 움직임이 멎었다. 항상 아버지가 계시던 방 안에서는 다른 남자가 나왔다. 아무것도 없다고 크게 소리친다. 사람도, 물건도, 돈도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왜 저에게 물어보는 것일까. 게다가 방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한다.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숨만 들었다 놓고 있다.
“에이, 육시럴. 그 새끼 지금 아는 게 없는 눈치인데.”
뒤뜰 쪽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육두문자를 곱씹었다. 종인을 잡고 있던 남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무 대처 없이 던져져 어깨를 그대로 박았다. 안 그래도 약했던 천이 이제는 완전히 너덜하게 찢어진 꼴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담아 물었다.
“그 여편네가 너만 놓고 갔다. 어떻게 할래?”
“이 놈 그냥 어미가 일하던 가게에 팔지.”
“거기는 남창도 취급한대?”
더러워. 저들끼리 낄낄대며 가래를 끓어다 퉤 뱉었다. 쓰러져있는 무릎 바로 앞이었다. 마치 자신 얼굴에 가져다 뱉은 듯 화가 배에서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어찌하지 못했다.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는 고집만 부려오던 짐짝을 내버렸다.
그래, 당연한 것이다. 일 년이면 길기도 길었지. 말을 듣지 않는 핏덩이는 쓰레기로 찬 시커먼 암 덩어리에 불과하다. 끝까지 이고가면서 제 몸을 울컥울컥 쏟아내는 것을 택할 바에야 떨쳐내는 것이 최선이다. 그들도 그리 생각했기에 저를 버린 것이다. 버렸다. 버려졌다.
그리고 팔았다. 아니, 팔렸다.
종인아.
차분하게 부른다. 부른 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안아주었다. 종인이 벌려놓은 다리로 파고들어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을 휘저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농후한 향과 함께 퍼져나갔다.
작은 소년은 한순간에 너른 품으로 쑥 들어갔다. 빠져나오려 했지만 체향을 맡자 금세 노곤해졌다. 이상하게 그리운 감각이었다. 박동이 안정적으로 가라앉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들썩거리는 어깨가 우스워 호흡을 참았다. 그 덕에 전신이 달달 떨렸다.
마디가 굵은 손이 굳어있는 몸을 살살 쓸어주었다. 툭 튀어나온 뼈가 손바닥 전체에 감겼다. 얼마나 음식을 먹지 않았는지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다 비치는 옷을 입으니 더욱 잘 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정도가 심했다.
자신의 안에서 바들거리는 종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아편 향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미소는 줄곧 피어있었다. 살고 싶어 어떻게든 발악하고 있는 꼴이다. 입 주변으로 쭉 번져나간 새빨간 연지가 눈에 꽂혔다. 찬열은 고개를 내리고 그의 입가를 슬쩍 핥았다. 움찔 떨려온다. 반응에 홀려 종인이 입은 저고리를 어깨 밑으로 밀어 내렸다. 쇄골을 이로 긁어내자 입 안에 김종인이 가득 찼다. 벅찬 맛이었다. 잘 익은 열매를 한 입 물어 씹은 듯 과즙이 새어나왔다.
“당신, 나 알아?”
대뜸 종인이 그렇게 물었다. 가슴골로 내려가고 있던 혀가 멈추었다.
그 날, 아이가 들고 온 책들은 그대로 이 방 벽장에 놓여있다. 묶어온 모양에서 어디로도 흐트러짐 없다. 손길이 남아있는 그 때 모습과 같다. 예전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김종인처럼.
누구에게도 되팔지 않았다. 찬열에게 있어 그 책들은 김종인 자체였다. 유일하게 이어져 있는 연결고리였다.
앞에 앉아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종인을 응시했다. 진한 눈꺼풀 속 시선이 뒤흔들린다.
“응? 나 아냐구.”
찬열이 듣지 못했다 여겼는지 다시 한 번 묻는다. 이번에는 허리를 가만 잡고 작게 솟아난 돌기를 입술로 머금었다. 혀로 돌려내자 아직 아편 향에 취한 노련한 신음이 샜다.
벽장 안에 있는 책은 이제 쓸모없게 되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다 생각했던 종인이 지금 이곳에 있다. 손 안에 들어차있다. 그럼 된 것이다. 저만 알고 있던 상대가 마침내 자신을 궁금해 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과거는 지워져도 상관하지 않는다.
찬열은 종인과 같이 미소 지었다. 벌어진 다리를 허리에 감아올리고 치마폭에 손을 집어넣었다. 착 감기는 촉감이 좋다.
찬열이 안쪽에 가득 차 들어와 울며 신음하는 때에도 종인은 연신 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나를 알아? 기억하고 있어? 잊혀져가는 그 때를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여주지 않았다. 새로운 향이 피어난다.